“지옥은 필요 없어요. 사람을 교화하는 데는 신의 은총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종교를 강제와 협박으로 마음 속에 끌어들이려고 한다면 종교를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공포를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튼, 순정만화』 안에는 『아무튼, 순정만화』를 쓰게 된 이유가 틈만 나면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렇다. 똑 부러지는 여자애는 도무지 인기가 없다. 지적이고 능력 있는 여자 캐릭터가 그 특성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면서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 그 특성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남자들도 있다는 것, 순정만화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런 것들을 어디에서 알 수 있었을까” 같은. 순정만화는 어린이를 소녀로, 그 소녀를 어른으로 성장시켰다. 어른이 된 순정만화 키드는 순전히 스스로의 선택으로 잡지인이 되어, 지금은 현존하는 상업 잡지 가운데 가장 큰 소리로, 더욱이 꾸준하게 여자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엘르』의 에디터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이마루는 “왜 순정만화를 읽어야 할까요?” 같은, 순정만화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 이들에게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져도 당황하지 않고 술술 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십대, 기껏해야 이십대 초반인 여성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 전체를 끌고 나가는 장르라는 점에서 다른 장르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죠. 게다가 창작자 또한 90% 이상 젊은 여성이고요. 그녀들의 손에서 탄생한 여성 캐릭터들을 보세요. 오히려 전형적인 캐릭터를 찾기 힘들 걸요.”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13세기 중반 독일, 요정과 인간이 공존한다는 매혹적인 스케일에 영주의 딸에서 부조리를 아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권교정의 『헬무트』), 2020년대가 되어서야 ‘걸크러시’나 ‘시스터후드’로 추앙받는 여자들의 우정을 로맨스보다 더 앞세우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천계영의 『오디션』)을 순정만화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고전’이라는 조건을 달아도 기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작품이 세상에 나온 시대에 아무리 중요했다 해도, 지금 봤을 때 퇴행적이라면 고전에서 탈락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2000년대에 출간했는가(거의 20년 동안 좋은 작품을 내는 작가의 작품인가), 완결됐는가(연재 중단이 잦은 순정만화계의 관행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플랫폼에서 볼 수 있는가(종이책뿐 아니라)라는 기준을 더해 세 작품을 선정했다. 독자의 할 일은 그들이 펼쳐놓은 어마어마한 세계에 빠져드는 것뿐!
『불의 검』, 김혜린 지음
1992년 연재를 시작해 2005년, 총 12권의 여정으로 마무리. 2020년 ‘신장판’까지 발간됐을 정도로 마니아층이 두텁다. 작가 스스로 “영웅 판타지이자 활달한 야만의 노래이며, 동시에 여인의 이야기임을 희망한다”고 밝힌 만화는 부족 간 영토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청동기-철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평범한 여성(아라)과 영웅 가라한 아사(산마로)의 사랑과 고대 두 부족(아무르족과 카르마키족)의 전쟁이라는 언뜻 익숙한 서사를 토대로 하지만 『북해의 별』, 『비천무』 같은 전작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인간 군상을 향한 작가의 연민과 애정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든다.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생의 존엄을 놓지 않는 캐릭터들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기는 어려울지도. 한국 순정만화 역사상 ‘대작'이라는 단어에 가장 걸맞은 작품 아닐지.
『오디션』, 천계영 지음
1996년 『윙크』 신인 공모전으로 데뷔한 천계영은 정말로 ‘혜성 같은’ 신인이었다. 『예쁜 남자』, 지금도 연재 중인 『좋아하면 울리는』같이 드라마로 제작된 작품들도 있지만 ‘음악’과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운 『오디션』은 지금 다시 봐도 독보적이다.
『안티 레이디』, 윤지운 지음
첫 장편 『허쉬』부터 얼마 전 완결한 『파한집』까지. ‘과연 작가 한 사람이 이토록 다양한 작품을 한결같은 퀄리티로 내놓는 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데뷔 이후 20년간 활약 중인 윤지운. 넓은 장르 스펙트럼을 자랑하지만 특히 현대인의 ‘있을 법한’ 결핍과 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지점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 2011년에 선보인 『안티 레이디』는, 회계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이십대 후반 직장 여성 유지인이 주인공으로, 한국 순정만화에서는 상대적으로 보기 드물던 현대 직장인 여성을 전면에 등장시킨 작품이다. 몇몇 단어나 표현이 지금 보기에는 아쉽지만 스스로의 한심함을 껴안고 씩씩하게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태도는 지금도 아낌없는 공감을 보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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