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살아 있는 연구실에서 성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돼지처럼 사는 사람도 있음을 우리는 확실히 보았다. 누구든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 수 있지만, 결국 어떻게 살지는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살아 있는 연구실이란 나치 시절의 유대인 수용소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 어떤 자유도 없을 것 같은 곳에서도 사람은 ‘선택’이라는 것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감정의 문제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노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타고난 성질 같은 것이라고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살아가는 내내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과 관계 맺게 해주는 정서의 문제에 좀 더 본격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자유롭고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미경 저자의 책 『솔직하게, 상처 주지 않게』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인터뷰 – 전미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편>
오늘 모신 분은 2030 세대의 ‘마음의 멘토’로 손꼽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입니다. 전작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를 통해 ‘가짜 자존감’에 속지 않고 ‘진짜 자존감’ 만드는 법을 알려주셨죠. 이번에는 우리의 감정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책 『솔직하게, 상처 주지 않게』를 쓰셨습니다. 전미경 저자님입니다.
김하나 : 이번 책은 ‘감정’, ‘감정 능력’에 대한 책인데요. 감정 능력이라는 말부터가 조금 얼떨떨한 것 같아요. 감정이라고 하면 보통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 사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처럼 생각을 하는데요. 이 책에서는 감정에 대한 정의 자체도 다르고, 감정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제가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전미경 : 다들 감정이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내 안에 있어서 내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것, 어쩔 수 없이 수동적인 것이라고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감정이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도구거든요. 우리가 누군가의 성격을 말할 때는 사실 그 사람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요.
김하나 : ‘그 사람은 성격이 불 같아’라든가 ‘강단 있는 사람이야’라든가...
전미경 : 그렇죠. ‘그 사람은 감수성이 풍부해’, ‘누구는 멘탈이 조금 약해’ 여러 가지 수식어나 형용사가 붙는데요. 가만히 보면 감정선이라는 것을 고유하게 가지고 있고, 그걸 지칭하면서 우리가 그 사람의 성격을 드러내잖아요. 그러니까 감정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거죠. 내 것에서 밖으로 흘러나와서 남들한테 보여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또 우리가 감정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을 해야 되는데,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 거예요. 감정을 단지 수동적인 것,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많이 이야기하더라고요. 우리가 감정에 대해서 공부해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고, 조절해야 된다고 이야기를 안 하고, 그런 것에 대해서 제가 조금 의아했던 거죠. ‘왜?’ 우리는 감정을 가진 사람인데,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내가 표현이 되고 감정을 통해서 사람과 소통하는데, 그냥 단지 수동적인 모드에서만 감정을 다루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감정 능력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죠. 내가 적극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감정을 조절한다는 게 냉정하게는 감정보다 행동을 조절한다는 게 더 맞을 거예요.
김하나 :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을 어떻게 표출하는가를 나눠서 생각할 수 있는 거군요.
전미경 : 그렇죠. 짜증이 나지만 짜증을 내는 건 다른 거죠. 화가 나지만 화를 내는 건 다른 거죠. 이걸 나눠서 생각을 해야 되고 나눠서 행동을 해야 되는 거죠. 부정적인 면에서의 감정도 그렇지만, 긍정적인 면에서도 ‘저 사람과 협상을 성사시키고 싶어’ 혹은 ‘저 사람과 연인이 되고 싶어’ 같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잖아요. 그때도 적극적으로 감정을 이용해서 타인과 세상과 의사소통을 하고 살자는 거죠. 사실 그런 데 필요한 게 감정이고요.
김하나 : 그러네요. 감정이 차오르는 대로 쓸려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감정을 정확히 느끼고 그것을 조절해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감정 능력’인 거군요.
전미경 : 네. 세상과 소통하고, 특히 친한 사람과 소통하고, 이러면서도 우리가 감정을 잘 사용하고 활용하고 나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거죠. 사실은 부모님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저의 부모님이 세상의 프로토타입이라고 생각했어요.
김하나 : 그거 여쭤보고 싶었어요. 책의 시작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셨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시고 키워주시고 사랑해주신 나의 아버지께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하셨는데요. 부모님이 아니라 콕 집어서 ‘아버지’이신 거죠?
전미경 : 그렇죠. 부모님 두 분 다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신데, 전통적으로는 엄마는 아이들 돌보는 가사 일을 전담하고 아빠는 바깥일을 하셨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한테 세상의 인간적 가치를 느끼게 해주신 분은 아버지이셨어요. 저희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셨어요.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 있는 분은 아니세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의 그릇 안에서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자식들을 열심히 기르고 가장으로서 충실히 역할을 하시고, 또 동네 이장님을 장기집권으로 오래 하셨거든요(웃음).
김하나 : 장기집권 이장님이셨다(웃음).
전미경 : 네, 최소 10년 이상 하셨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요(웃음). 이장님을 하실 때 동네를 위해서 엄청난 일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장기집권하신 거예요(웃음).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깜냥 안에서의 최선을 기쁘게 하신 분이세요.
김하나 : 동네의 일을 추진할 때도 그렇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논쟁을 할 때도 있을 테고,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감정을 잘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저런 부분의 능력을 참 잘 쓰신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전미경 :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관공서에 가서 뭘 하셨는지는 잘 몰라요. 제가 기억하는 직접적으로 맞닿는 것은, 유머를 많이 사용하셨어요. 유머라는 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생기는 재주잖아요. 아빠가 작년에 위암 4기 진단을 받으셨단 말이에요. 여명이 짐작 안 되는 힘든 상황이었어요. 아빠한테 어떤 상황인지 말씀드렸더니 화를 내시더라고요. ‘위암일 리가 없을 텐데’라고 하시면서 ‘내가 담배를 많이 피우기 때문에 내 마지막은 폐암으로 정해놨다’고(웃음). 가족들이 심각하다가 같이 웃었어요(웃음). 자신의 힘듦을 유머로 잘 승화하시면서 세상을 살아가시는 분이세요. 엄마도 뇌출혈 이후로 인지 기능이 많이 떨어지신 상황인데 모든 돌봄을 십여 년 넘게 아버지가 해오셨는데, 정말 ‘이 사람이 살아있어서 내가 너무 행복하다’고 하시면서 기쁜 마음으로 하세요. 항상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사셨어요.
김하나 : 정말 대단하시네요.
전미경 : 아버지를 보면서 ‘감정 능력이 좋은 분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드러나는 건 인품인 것 같아요.
김하나 : 감정 능력이라는 게 세상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이기도 하고, 그것을 다루는 능력이 결국 가장 잘 발현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걸 다 인정받는다면 그것이 인품이 되겠네요.
전미경 : 그렇죠.
김하나 : 목차를 보면 열네 가지 상황들이 쓰여 있는데, 몇 가지를 읽어 보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채고 싶다면’, ‘나쁜 일은 왜 쉽게 잊히지 않는 걸까’, ‘남들이 모르는 상처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 ‘센스 있게 분위기를 잘 바꾸는 사람의 비밀’, ‘외로울 순 있어도 무기력해지기는 싫다면’... 이렇게 제목만 훑어봐도 ‘이거 궁금하다, 나도 이럴 때 있었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등등의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열네 가지를 선택한 기준이 있나요?
전미경 : 제가 만나는 주된 사람들이 환자들이고 제 정체성은 정신과 의사잖아요. 환자들이 고민하는 내용을 쓰다 보니까 열네 가지를 뽑게 됐는데요. 일에서의 고민, 인간관계에서의 고민, 사랑에 대한 고민, 이런 고민들을 찾다 보니까 열네 가지가 찾아졌죠. 그리고 환자들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진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다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적어서 정리했고요. 앞에 썼던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환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못다 한 저의 이야기입니다.
김하나 : 여러 사정으로 진료실을 못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일단 정신과에 발을 들여놓는 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진입 장벽이 아주 높잖아요. 그런 분들한테 조금 더 길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내원하는 환자들에게도 상담 이외에도 이 책을 참고할 수 있도록 쓰신 거로군요.
전미경 : 그렇죠. 정신과는 병을 보는 과예요. 예를 들어서 제가 A라는 환자 분을 만나면 ‘A 환자 분은 공황 장애가 있어요’(라고 진단하는 것과) A라는 사람이 살아온 역사로 A를 규정짓고 고민하는 문제는 공황장애와 상관없을 수 있어요. 때로는 상관있을 수도 있지만, 이런 분들이 많으세요. 병에 대한 이야기는 학술서에 많으니까 보시면 되고요(웃음). 저는 우리가 늘상 할 수 있는 고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환자는 아니고 삶에 괴로움이 있으신 분, 진단명이 붙을 수도 있고 안 붙을 수도 있고. 그래서 정신과 영역보다는 심리학의 영역이 조금 더 많아진 것 같아요.
김하나 : 책에 보면 상처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어요. “상처는 나의 욕구가 깨지는 것과 가장 큰 관련이 있다”는 부분이 있었는데, 상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전미경 : (예를 들어서) 내가 좋아하는 연인, 나의 미래를 함께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연인이 나에게 이별을 고했는데 알고 보니 양다리였다면, 내가 믿었고 신뢰했고 나를 사랑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컨셉이 깨지면서 상처를 받죠. 우리가 상처를 받는다는 건 뭔가 기대하는 관계에서, 그 사람에 대한 기대나 아니면 나에 대한 컨셉이 깨질 경우예요. 요새 왕따가 사회적 문제가 되잖아요. 왕따를 당하게 되면 마지막에 드는 생각이 ‘내가 못났어, 내가 바보 같아’ 하면서 나 자신한테 꽂히게 되면서 나에 대한 컨셉이 깨지게 되면서 상처를 받아요.
김하나 : ‘나에 대한 컨셉이 깨진다’라는 말씀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전미경 : 자기 개념이라는 게 있어요.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자존감하고 연결될 수 있어요.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고,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고, 나는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살면 인간은 행복하잖아요.
김하나 : 그것 자체가 깨어지는 거군요.
전미경 : 깨져버린 거죠.
김하나 : 모든 게 다 내가 못난 탓이고...
전미경 : 내가 못나서 그렇고, 애들이 날 싫어하고, ‘바보야, 바보야’라고 너무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내가 바보가 아닌가?’ 하면서 컨셉이 깨지게 되면서 위축이 되고 속상하고 상처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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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