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
1992년 가을, 초등학생 6학년이었던 김보희 편집자는 드라마 <아들과 딸>을 열혈 시청했다. 극중 주인공 ‘후남’(김희애)의 직업은 편집자.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사람’을 처음 인지한 것이 바로 ‘후남’을 통해서였다. 허름하고 추워 보이는 출판사에서 후남이가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빨간색 돌돌이 색연필로 교정을 보는 장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김보희 편집자는 당시 ‘출판사에서 일하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구나’ 생각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출판사에 들어갔다고 외할머니께 말했을 때, 할머니는 손녀를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말없이 손을 잡아주었다. 할머니 역시 <아들과 딸>의 애청자였다.
“드라마에서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받고, 집을 나와 고생하고 결핵까지 걸린 상황에서도 늘 책을 놓지 않았던 후남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저에겐 ‘편집자’라는 직업을 최초로 알게 된 드라마라서 무척 각별해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영화 연출을 꿈꾸다 졸업 후 길벗출판사에 들어갔다. 3년쯤 실용서 위주로 책을 만들다가 다른 분야의 책을 만들고 싶어 마음산책으로 이직했다. 이후 웅진씽크빅 단행본본부, 청림출판, 큐리어스, 넥서스 등에서 일하다가 현재 휴머니스트에서 만 5년째 일하고 있다. 편집자 경력은 올해로 17년차다.
“ 휴머니스트는 원래 인문, 역사, 청소년 분야가 강한 출판사인데요. 2030세대, 즉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책을 만들자는 미션으로 새 팀이 신설되었고, 주간님과 함께 입사했습니다. 처음 1년은 거의 시리즈 브랜딩에 집중했어요. 고객을 연구하고 페르소나 독자를 만들고요. 첫 책 『안 부르고 혼자 고침』이 출간된 게 13개월째였어요.”
‘자기만의 방’ 이름으로 나오는 책들은 가상의 독자 페르소나인 ‘32세 김시영’을 위한 시리즈다.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시영 씨의 일상과 삶에 필요한 모든 책을 만드는 일이 시리즈의 큰 방향이기 때문에 ‘페르소나에게 전해 주고픈 메시지나 조언, 노하우’를 담은 책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자기만의 방’ 팀은 편집자 네 명으로 이뤄졌다. 90년대생이 두 명, 80년대생과 60년대생이 각각 한 명씩 있다. 디자인은 외부 디자인 스튜디오와 함께 작업하고 있다. 김보희 편집자는 유일한 80년대생.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어렵지 않을까? 물으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저희 팀 주간님이 권위적인 분도 아니시고, 팀 내 소통도 자유로워서 중간 역할이 어렵진 않아요. 오히려 중간에서 제 역할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인데요. 제가 우당탕하며 책 만드는 모습을 보며 후배들이 ‘아, 선배도 책 만드는 게 쉽지 않구나.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일이 원래 쉬운 게 아니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질문을 많이 하는 것요. 마음의 안부를 자주 묻는 일이라고 할까요.”
오랫동안 일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 능력은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레 성장하지만, 마음의 일은 다를 수 있다.
“책과 자신을 너무 동일시해도, 일과 나를 너무 밀접하게 생각해도 오래 일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갖는 일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 책이 다르게 보여요
인스타그램(@_jabang) 페이지를 가보면 ‘자방’ 팀은 특유의 팀워크를 자랑한다. 독자들이 만드는 책도 아끼지만, 책을 향한 진심도 아낌없이 응원한다.
“선물 같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왜 그렇잖아요. 선물은 받는 기쁨도 크지만 주는 기쁨이 더 큰 것처럼. 수공업으로 굿즈를 포장하다가 ‘우린 누구? 여긴 어디? 싶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웃으면서 일해요. 왜 이 일이 가능할까? 생각해보면 ‘자기만의 방’ 주민들의 피드백이 너무 좋기 때문이에요.”
‘자기만의 방’ 시리즈는 현재까지 34권이 나왔다. 책이 출간이 될 때마다 독자들은 SNS에 정성스런 리뷰를 남겨준다. ‘자방’ 마을소식지를 발행할 때는 출판사로 손편지 답장을 보내오기도 한다.
“몇 년 전에 독립서점에서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책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독자 분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재밌어 하시더라고요. 그 후에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불러주시면 최대한 참여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모두 입을 모아 해주신 말씀이 “이제 책이 다르게 보여요”였어요. 책뿐 아니라 제품이든 브랜드든 만들어가는 과정을 알면, 의미가 더 깊어지잖아요. 좁게는 저희 책을 더 의미 있게 전달하고 싶었고, 넓게는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소통하기 시작했어요.”
작년 12월에는 독자들에게 ‘자방일보’라고 이름 붙인 손편지를 보냈다. 코로나 세상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묻고, 편집부의 근황도 전했다. 며칠 후 전국 곳곳에서 독자들의 답장이 도착했다. ‘책 몇 부가 출고되었다’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느낌을 만끽했다. 책을 만들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다.
김보희 편집자가 만나고 싶은 저자는 ‘존중과 신뢰’의 태도로 편집자를 대하는 사람이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로, 출판전문가로, 그리고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신뢰해주는 저자는 더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이는 저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람과 일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니까.
“지금까지 만든 책을 영화에 비유하자면 상업영화와 독립장편 사이를 오간 것 같아요. 대중성이 있는 독립단편영화 같은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몸집을 가볍게 하고, 틀에서 벗어난, 그간 책 만들며 안 해본 혹은 할 수 없었던 시도들을 해보는 책, 그런데 심지어 잘 팔리는 책, 그래서 트렌드의 한 귀퉁이라도 만들 수 있는 책 (웃음) 만들어보고 싶어요. 아, <놀면 뭐하니?> 초창기에 저런 책!! 했었는데, 독립단편과는 거리가 머네요. 답하다 보니 제가 욕심이 크네요. (웃음)”
오래오래 같이 책 만들어요
후배 편집자들에게 종종 하는 이야기는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되돌아보면 당시에 만들고 싶은 책을 따라, 하고 싶은 마음에 따라 출판사를 선택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무언가 조급했다. 잘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텐데, 역시 그 마음 때문에 힘들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조급해하지 않는 일”이다.
“편집자의 일은, 들여다보면 결국 사람이 중심인 듯해요. 독자, 저자, 동료 등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시작되고 사람에 대한 진심으로 만들어지는 일. 그래서 관심과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평소 저자들에게 ‘함께 나이 들어가요’라는 말을 자주 해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텐데요. ‘계속 써주세요. 저도 계속 만들게요, 그리고 저희랑 오래오래 같이 책 만들어요’ 같은 마음일 거예요.”
김보희 편집자는 우연히 신문에서 출판인회의가 운영하는 출판편집자 입문과정 광고를 봤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수업을 들은 후 출판사에 입사했다. 1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지금은 예비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종종 한다.
“강의할 때는 포트폴리오를 만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이를 위해 추천하는 건 출간된 책을 보고 역으로 기획서를 써보는 ‘역 기획안 쓰기’예요. 나라면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을까?를 떠올려보면서요. 또, 좋은 제목과 카피들을 수집하는 것도 좋아요. DB처럼 쌓아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고민한 결실이잖아요. 그 안에서 많은 힌트를 찾을 수 있고요.”
수년 전 김보희 편집자는 일본의 한 출판사를 방문했다. 실용서를 중심으로 출간하는 곳이었는데, 1년에 한 권은 어떤 조건 없이 편집자가 만들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출간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렇게 기획한 책들에서 초대박 베스트셀러가 탄생하기도 했다고.
“당시 일본에서 반응이 좋은 소설이 있었거든요. 알고 보니 그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한 분이 우연히 본 연극이 너무 좋아서 직접 작가를 섭외해서 소설화한 작품이더라고요. 동기 부여가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실력은 먼지처럼 쌓인다는 말을 믿는다. 첫 책을 함께 만든 작가와 두 번째 작업을 이어갈 때, 각별히 행복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김보희 편집자. 그가 2021년에 만드는 책들은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할까. ‘자기만의 방’ 독자들은 손꼽아 기다린다.
김보희 편집자가 작업한 책들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최고요 지음 / 휴머니스트)
하우투 콘텐츠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자에게 제안하는 삶의 태도가 담긴 에세이,라는 편집 방향(혹은 스타일)의 책을 오래전부터 만들고 싶었는데 최고요 작가 덕분에 행복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자기만의 방’을 널리 알려준 고마운 책이기도 하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임진아 지음 / 휴머니스트)
작가님과 1년 반 정도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나며 차근차근 만들었다. 작가와 ‘함께’ 만들고, ‘함께’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와 즐거움을 일깨워준 작업이었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최혜진 지음 / 휴머니스트)
‘편집은 경험의 설계다’. 나름의 편집에 대한 정의다. 분야 막론하고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책은 특히 경험 설계에 공을 들였다. 교양 실용 분야를 접목한 첫 번째 시도이기도 하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지음 / 휴머니스트)
2021년 첫 작업 책이다. 작가님을 ‘기록 동기부여전문가 김기록’ 씨라고 부르곤 하는데, 작업하면서 나도 여러 가지 기록을 시작했다. 책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기록을 제안하는데, 4장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기록을 특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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