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비물질적인 시간은 권력이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영역이다. 시간과 날짜의 개념은 각 문화권마다 다양했으나 오늘날에는 서구 기독교 문화의 기년법인 기원전(B.C.)과 기원후(A.D.)를 세계적으로 사용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모두 혁명력(혁명일을 원년으로 하여 개정한 달력)이 만들어졌다. 권력자들은 체제를 새로 바꾸면 시간의 중심도 바꾸려고 한다. 시간은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다. 시간은 권력과 공존한다.
시간을 다루는 언어도 시대마다 변한다. 지금 60대 이상은 날짜를 셀 때 ‘초사흘’, ‘아흐레’ 등의 어휘를 사용하곤 한다. 순우리말로 날짜를 세던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점점 이 어휘들의 사용이 줄어들어 오늘날 젊은 층은 때로 ‘사흘’도 낯설어 한다. 그만큼 세대 간에 사용하는 어휘의 차이가 크다. 또한 젊은 세대로 갈수록 음력과 멀어진다. 윤달과 윤년의 개념을 어릴 때 잘 이해하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어떻게 사흘을 모르지?’라는 생각이 불쑥 올라오다가 주춤한다. 음력보다는 양력이 표준 달력이 되고, 순우리말 사용 빈도가 점차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럽에서는 ‘분’의 개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근대화가 되면 될수록 속도가 중요하기에 인간의 시간은 점점 더 작은 단위로 쪼개어졌다. 느림은 근대적이지 않은 퇴보의 모습이며 더욱 부정적이 되었다. 느림에 대한 부정은 나이가 들면서 몸이 굼떠지고, 생각의 반응이 느려지는 노화를 더욱 쓸모없는 낡음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빠르게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성장을 칭송하며 인간은 자연의 시간도 거뜬히 바꾸어 놓았다. 기후위기로 꽃이 피는 시기가 바뀌어 이제 4월 5일인 식목일을 3월로 옮겨야 할 지경이다. 식물은 기후의 변화에 적응하며 수천 년간 조금씩 이동해왔지만 오늘날 기후위기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나무들이 이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인간의 진보는 이 상태라면 멸종을 향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최근 10년간 467종의 동식물이 멸종했다. 1년에 46.7종이 멸종한다는 뜻이다.
누구의 시간으로 누가 돈을 버는가
“시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 질문을 들으면 대부분 ‘시간은 돈’을 떠올린다. 1748년에 벤저민 프랭클린이 “시간은 돈이다”라고 한 이후로 시간은 곧 돈과 동일시되었다.
총알배송과 새벽배송이 일상에 침투했다. 순식간에 날아드는 총알처럼 빠르게 원하는 물건을 집으로 배송해준다며 빠름을 내세운다. ‘총알’이라는 언어가 자백하듯, 속도에 대한 열광은 폭력성과 무관하지 않다. 총알처럼 빠른 배송은 총알처럼 사람의 목숨도 빠르게 가져가도록 일조한다. 유통업체들은 자정 전에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새벽에 물건이 집 앞에 도착한다고 자랑스럽게 광고한다. 택배 기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물량을 배달할수록 더 많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은 시간과 다툰다. 길거리에는 배달 오토바이가 급증했고 이들도 시간과 다툰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배달해야 더 많이 배달할 수 있기에 신호위반과 과속 등으로 위험천만한 상황을 만든다. 이들에게 시간은 돈이다.
그러나 택배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을 해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결국 개인의 식사시간이나 휴식, 취침 시간들을 그만큼 줄여야 한다. 성수기에는 하루 14시간 이상 일한다. 그중 5시간가량은 배달이 아니라 분류작업에 들어간다. 유통업체는 이 분류 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배달 건당 수수료만 계산한다. 배달이 지연되면 택배 기사의 수수료가 깎인다. 게다가 2002년에 1200원이었던 수수료는 2019년에는 800원이 되었다. 경력이 쌓였다고 돈을 더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시간은 과연 누구의 시간일까. 택배나 배달 노동자들의 시간은 고객과 유통업체 사이에 종속되어 있다. 노동자들의 시간을 들여 고객의 시간을 벌어주고 유통업체의 돈을 벌어준다. 노동자들은 시간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자본은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시간을 착취한다. 시간은 정말 돈인가? 누구의 시간인가를 물어야 한다. 누구의 시간으로 누가 돈을 버는가.
감염병 대유행 상황에서 우리는 시간과 권력이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돌봄노동자나 청소노동자와 같은 필수노동자는 온라인 비대면 노동이 가능하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물리적인 출퇴근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자영업자들은 밤 10시 이후에도 영업을 하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반면 많은 지식노동자들은 장소 이동 시간을 줄이고 화상 회의나 온라인 강의를 활용한다. 나아가 시차와 물리적 거리의 장벽을 넘어 유럽, 아시아, 북미에서 동시에 온라인 접속을 통해 소통한다. 계층 간의 시간 권력의 차이는 더욱 심화되었다.
여성은 시간에 갇힌다
가정법을 잘 쓰는 예의 바른 남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여성분에게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나이가 몇 살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이를 물을 때 유독 여성에게 공손한 이러한 질문양식은 주로 ‘숙녀’를 향한 ‘신사’의 태도다. 여자의 나이는 몸무게와 함께 함부로 물으면 무례한 사람이 되는 ‘조심스러워해야 하는’ 숫자다. 다시 말하면, 여성을 가두는 숫자다. 여성의 나이는 ‘가임기’에 얽매인다. 식물의 시간을 모른 채 인간의 기준으로 ‘제철’ 음식을 탐욕적으로 먹어치우듯이, 여성의 몸에 대한 이해는 없으나 가부장제는 가임기에 집착한다. 마리 루티는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에서 “당신이 이성애자 여성이라면, 모든 것이 난소의 나이로 귀결된다”고 다소 비꼬듯 말했지만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늙은 여성은 ‘노파老婆’이고 늙은 남성은 ‘노옹老翁’이라 하는데 둘의 쓰임새와 어감은 확연히 다르다. 노파는 노옹과 달리 비하의 의미로도 쓰인다.
남성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시간은 늘 무시당한다. 자본이 노동자의 시간을 소유하듯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의 시간을 소유한다. 결혼 제도는 여성의 시간을 남성의 삶에 이식하는 제도다. 그 제도 안에서 여성의 노동은 남성의 보조 배터리처럼 취급받는다. 남성의 현재는 늘 성실했던 과거와 기대할 미래 사이에 있다. 반면 시간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여성은 삶의 맥락이 뚝뚝 끊긴다. ‘경력단절’은 여성의 경제활동만이 아니라 개인의 서사마저 단절시켜 언젠가부터는 대부분 이름 없는 ‘어머니’가 된다.
여성이 시간의 주체가 되지 못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노동 현장은 종종 불화한다.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생리휴가를 편하게 사용하지 못한다. 이 생리휴가에 대해서도 물론 하나의 의견만 있는 건 아니다. 박이은실의 『월경의 정치학』은 생리휴가에 대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사이의 인식 차이를 설명해준다. 전자는 여성의 생리휴가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재강화하여 오히려 차별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면, 후자는 실제로 여성의 몸이 겪는 불편함을 고려하여 여성 노동자의 쉴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관점이든 한 가지 문제는 분명하게 발견한다. 노동자의 휴가 시간이 여성의 몸을 배제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1953년부터 출산(모성)휴가 제도가 있기는 했지만 여성이 직업을 갖기도 어려운 환경에서 사실상 무의미했다. 육아휴직은 1988년에 도입했으나 역시 현실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웠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정부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휴직자가 불이익이 없도록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기 시작한 시기는 2000년대 이후이다. 결혼 이후에도 직장을 유지하려는 여성들이 늘어났고 저출산고령사회에 대해 사회가 우려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5월 28일은 세계 월경의 날이다. 여성들의 생리 기간이 보통 5일이고, 28일에 한 번씩 하기 때문이다. 굳이 왜 월경의 날까지 만들어야 했을까. 여전히 일부 국가에서는 월경 중인 소녀를 학교에 오지 못하게 하거나 집 밖의 다른 장소에 머무르게 하는 등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월경을 월경이라 말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려 말한다. ‘그 날’이 아니라 정확하게 월경을 월경이라 말함으로써 여성은 제 몸의 시간을 찾아야 한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