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좋아한다. 목적 없이 걷다 보면, 그 시간만큼은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매일 동네를 걷는 나지만, 그날의 산책은 조금 특별했다. 대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으며, 서울역에서 내려 공항철도를 타기 위해 청파동 방면 15번 출구를 지나고 있었다. 하필 날씨가 너무 좋은 날이어서, 열린 문 너머 펼쳐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녹음과 쏟아지는 햇빛,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정밀아의 노래 '서울역에서 출발'을 떠올리고는 다음엔 꼭 노래를 들으며 산책을 해야지 생각했다. 오늘은 짐도 있고 구두를 신었으니 안될 것 같아 하면서. 그리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바뀌었고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하며 다시 올라가 그 풍경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앨범 <청파소나타>에 수록된 '서울역에서 출발'을 재생하고 무작정 청파동 골목을 걸었다. 오래된 도시의 모습을 간직한 골목과 간판들. 그의 노래 '오래된 동네' 가사처럼 열린 문으로 엿보면 여전히 미싱이 돌아가는 동네. 마찬가지로 오래된 도시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골목이 있는 동네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문화적 지층을 누리며 살았던 나는, 이런 서울의 풍경이 좋다.
가수 정밀아는 서울역 뒷편 동네에 살며 청파동 일대를 직접 걸어다니며 이 노래들을 만들었다. 낮 동안은 서울역 주변을 무작정 산책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경계없이 섞여드는 동네의 소음들을 참아내다 결국 노래에 녹여낼 때까지 도시를 관찰했다. 노래가 태어난 장소를 직접 걸으며, 이 노래를 사랑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그는 ‘오래된 동네’에서 '지금도 미싱 소리가 뛰'는 골목 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언니’에서는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동생에게 골목 끝 식당에 밥 먹으러 가자는 다정함을 건넨다. 그렇게 목소리들은 경계를 넘어서 ‘광장’에 모인다. 정밀아의 세계 안에서는 '날 선 경계가 없는' 마음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여러 목소리를 담아내는 그의 폭넓은 감성은 결국 '나' 자신의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이 노래들은 서울에 올라와 그림을 공부하고 타향살이를 시작한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한데, 구체적인 장소와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과정은 결국 자신의 역사성과 다층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오래된 도시의 복잡성을 바라보며, '나'는 그 시간을 오롯이 겪은 깊은 존재가 되어간다.
나 역시도 서울살이 10년이 넘었지. '서울역에서 출발한 내 스무 살은 한 백 번은 변한 것 같아'라는 가사에 깊이 공감하며, 내가 이 도시를 사랑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와서 모든 게 낯설기만 했던 때, 혼자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역을 지나 영화를 보러가거나 서울신문사에서 내려 무작정 거리를 산책했던 기억이 나. 그후 함께 걸었던 사람들 덕분에 나는 서울 곳곳에 감정을 담게 됐고, 도시만큼이나 복합적인 존재가 되어 갔다.
아마, 환한 햇살을 느끼며 산책하는 동안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던 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 덕분이었던 것 같아. '허나 딴짓을 아주 열심히 하였더만은 이젠 노래하며 잘 살아갑니다'라는 가사를 내 것처럼 느끼는 충만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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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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