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마노의 디자인은 그의 주변 공기를 형성해온 디자인 스승들의 영향과 기꺼이 함께 간다. 아버지 안상수, 헬무트 슈미트, 볼프강 바인가르트.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와 바젤디자인학교의 학풍 역시 그를 형성한 근간이다.
안마노의 Desktop
안마노는 안그라픽스 출판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북 디자인이 핵심 업무인 디자이너로서는 흔치 않은 이 명칭에는, 한국 그래픽디자인의 역사에서 남다른 위치와 행보를 이어온 안그라픽스의 문화적인 활로를 안고 가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감독과 선수, 그러니까 디렉터와 북 디자이너로서 그의 업무는 지금은 5:5 정도라고 한다.
그의 데스크톱1을 보면 관리자로서의 시야가 드러난다. 책상으로 치면 신경 써야 할 사안들을 눈에 조금씩 다 보이도록 겹쳐서 펼쳐놓은 상태라고 할까? 하나의 창이 다른 창을 다 덮어 가리지 않고, 또 모서리를 선택해서 손쉽게 앞으로 끌어올 수 있도록 들쭉날쭉하게 두었다. 2차원 평면 모니터 안에 시퀀스적인 깊이의 차원이 있는 셈이다. 디렉터로서 다루는 업무의 범위가 넓은 만큼, 툴도 점점 엑셀과 구글 시트 등이 흥미로워진다고 한다.
1985년 안상수가 창립한 안그라픽스는 올해 36년이 된다. 파격적인 실험과 자유로운 탐색의 정신으로 유명하지만, 지금 출판팀의 책들은 안전하게 정돈된 인상을 준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떠오르는 상태다. 과학의 역사에서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혁명적인 이름이 두드러지지만, 대부분은 ‘정상과학’의 시기다. 정상과학 시기에는 패러다임을 따라 이론을 충직하게 쌓아나간다. 그러다 보면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결국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이것이 ‘과학혁명’이다. 안그라픽스는 지금 정상과학의 안정기를 가고 있는 것 아닐까? 묵묵히 격을 쌓아나가는 시기. 안상수는 파격(破格)은 격(格)을 전제한다고 말한 바 있다. 파격이라는 단어 자체가 격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격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파격이 아니라 치기에 불과하다.
이런 안그라픽스의 토양에서 디자이너 안마노의 북 디자인 작품 경향은 크게 세 종류의 방향을 보인다. ‘정상과학’ 시기의 성격에 부합하는 책으로 『현대미술 글쓰기』를 꼽고 싶다. 얼핏 여느 학술서 같은 외관이지만, 본문을 펼쳐보면 ‘품질이 곧 스타일’이다. 원서가 이미 공들인 디자인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이를 한글 타이포그래피로 옮기는 것은 일종의 ‘시각적인 번역’이다. 복잡한 위계에 질서를 부여한 타이포그래피만으로 본문이 윤택하다.
두 번째 방향은 이로부터 한 걸음 나아간 확장적인 경향이다. 안그라픽스에서 얀 치홀트의『타이포그래픽 디자인』은 세 차례에 걸쳐 출간되었고, 그때마다 각각 다른 디자이너가 북디자인을 맡았다. 세 번째 판본을 디자인한 안마노는 로마자 제목에 모더니즘과는 거리가 먼 스크립트체를 적용했다. 그럼으로써 모더니스트이면서도 그에 국한되지만은 않고 활자를 포괄적으로 이해한 타이포그래퍼 얀 치홀트의 면모를 드러냈다. 역설적이기보다는, 편협하게만 보지 말자는 제안에 가깝다.
세 번째 방향은 안그라픽스적인 경향과는 좀 더 멀어져 있다. 『READ』는 CMYK의 원색 분판에 비슷한 색감의 형광색을 매치해 리소프린트와 같은 뉘앙스를 주었다. 형광색들이 본문 텍스트를 조각조각 분할하지만, 읽을 때 단절된다거나 하는 지장은 거의 없으면서 색채감이 더해져 아티스트 김윤기를 적절히 물들이고 있다.
안마노가 아끼는 도구 중에는 종이의 두께를 측정하는 다이얼 게이지가 있다. 문지숙 주간이 구입해서 안그라픽스의 소장품이 된 도구로, 한국 북 디자인의 역사와 함께해 온 안그라픽스의 옛 책들에 사용한 종이를 추리하는 용도 등으로도 활용된다.
안마노의 Desk
북디자인이 직업적인 업무라면, 포스터와 전시는 예술 탐구를 위한 개인 작업의 미디어다. 창작 방식은 레터링. 홍대 시디과와 안그라픽스에서 안마노의 타이포그래피적 훈련은 디지털 폰트인 활자로 시작했다. ‘손으로 쓴 글씨’에서 ‘기계적이고 찍어내는 활자’로 이동하는 것이 글자 역사의 일반적인 추이인데, 안마노는 거꾸로 활자에서 출발해 글씨로 관심을 확장해나간다.
활자인쇄는 하나의 판을 만들어 찍기에 활판인쇄라고도 한다. 동시적이고 장면적이다. 고체처럼 응결되어 있다. 반면, 글씨는 순차적이고 선적이고 흐름이 있다. 액체처럼 유동적이다.
그의 레터링은 글씨를 끌어안고 시작한다. 종이에 필기도구로 스케치를 해본다. 그리고 인디자인에서 글씨를 쓰듯 펜슬 툴로 큰 골격을 슥슥 그린다. 여기에 아우트라인을 생성하고 수정을 거듭하며 다듬어간다. 글씨가 마치 도예를 하듯 빚어지며 디지털 레터링이 되어간다.
이런 레터링 작업은 2014년에 시작해 2016년〈연애담〉에 이르러 완숙해져 있다.
『16시: 가곡실격–나흘밤』은 마치 글자 이전의 프로토타입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글자가 의미를 가진 말과 관계 있다면, 이 형태들은 보다 원초적인 소리와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았다. 공연창작자 박민희의 퍼포먼스를 보고 음형과 몸짓의 파동을 시각화했다. 유클리드적인 기하도형을 벗어나 인간 신체의 복잡함을 함축한다.
〈Hot Cold Wet Dry〉에서는 이를 로마자로 확장했고, 연극, 무용, 패션, 시 등 여러분야 창작가들과 협업하며 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형식으로 나아간다.
안마노의 레터링은 고무줄 같은 탄성을 띤다.몸의 복잡한 신체성이 기하학을 만난 결과다. 안상수의 〈홀려라〉(왼쪽)과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는 차이가 드러난다. 안상수의 문자도와 안마노의 레터링에는 둘 다 신체성과 기하학이 공존하지만, 이들의 관계가 안상수는 혼합물 같다면 안마노는 화합물 같다. 안상수는 기하학적 초성과 민화 같은 중성 및 종성이 결합되는 데에 비해, 안마노는 손글씨에서 출발해 이를 베지어 곡선이라는 기하학적인 디지털 툴로 다듬어간다. 새로운 화학적 변성의 세계로 발을 딛는다.
책과 레터링, 활자와 글씨, 그래픽과 다양한 협업의 영역들, 안정기가 배태하는 패러다임 전환. 그는 타이포그래피의 닻을 붙들고, 안전 하지만은 않은 미답의 바다로 잔잔히 나아가려는 것 같았다. 격과 파격의 리듬을 넘실넘실 타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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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디자이너)
글문화연구소 소장,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작가. 『글자 풍경』, 『뉴턴의 아틀리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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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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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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