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할머니 옥수수 언제 나와?” 나의 여름은 외할머니의 옥수수와 함께 시작됐다. “쪼끄만 게 옥수수 하나를 통째로 쥐고 잘도 먹는 거 보니 좋아서.” 여름이면 몇 번씩 갓 딴 옥수수를 가져다주시며 외할머니는 슬쩍 덧붙이셨다. 올해는 까만 찰옥수수, 작년에는 노오란 옥수수, 재작년에는 알록달록 옥수수. 어떤 옥수수를 손녀가 가장 잘 먹을까 매해 새로운 품종의 옥수수가 추가됐다. 처음 집 뒷마당 텃밭에서 시작된 할머니의 옥수수 키우기는 점점 기세를 확장해 나중에는 아예 밭 하나를 차지했다.
6월의 마지막 날 내 생일은 할머니의 손녀 사랑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장사하느라 늘 바쁜 엄마가 매해 생일마다 커다란 대형 생일상을 가득 채울 수 있었던 데는 외할머니 덕이 컸다. 할머니가 키우신 커다란 수박과 옥수수, 할머니 댁 마당에서 딴 자두, 앵두, 살구, 생일날 아침 할머니가 방앗간에서 뽑아 오신 따끈한 생일떡까지. 버터크림 케이크 하나와 내가 좋아하는 시장 통닭에 엄마 가게에서 파는 과자 몇 가지를 더하면 생일상은 더없이 푸짐하게 완성됐다.
손녀 먹을 거라고 농약 한 방울 치지 않는데도 할머니의 옥수수는 알이 꽉 차 그 어떤 맛있는 옥수수도 그 맛만 못했다. 옥수수를 키우는데 뿐만 아니라 맛있게 쪄내는 데도 할머니는 남다른 솜씨를 가지고 계셨다. 같은 옥수수인데도 엄마가 찐 것보다 할머니 것이 맛있어 여름이면 매일 같이 할머니 댁을 찾았다. “어이구, 이쁜 내 새끼 왔냐.” 얼싸안으며 반겨주시는 친할머니보다, 천성이 무뚝뚝해 살가운 애정 표현 한 번 하지 않으시지만 내가 마당에 들어서면 무심한 듯 따끈따끈한 옥수수 한 소쿠리 내어다 주시는 외할머니의 사랑이 나에게는 항상 더 컸다.
할머니 댁에 자주 찾아가던 나였지만, 그렇다고 딱히 뭔가를 같이 하지는 않았다. 한쪽이 무뚝뚝하면 한쪽이 살갑고 다정하면 좋으련만 외할머니를 똑 닮은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할머니가 내어주시는 주전부리들을 먹고, 티브이를 보다, 가끔 할머니를 따라 나를 위한 옥수수와 수박이 자라는 밭으로 가는 날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더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 사랑스러운 애교쟁이였단다. 가끔 할머니는 나란히 앉아 옥수수니, 감자니 먹기 좋게 손질해 주시며 사랑스러웠던 꼬맹이와 그 꼬맹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당신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마음의 위안이 필요할 때면 할머니 댁으로 가 늘 따뜻하게 해가 내리쬐던 마루에 앉아 할머니를 기다리고는 했다. 사범님 몰래 얇은 도복 밑으로 자꾸 꼬집는 친구가 싫어 태권도장에 가기 싫을 때도, 친구들과 싸워 속상할 때도, 엄마 아빠에게 혼났을 때도 할머니의 옥수수와 툇마루는 늘 내 편이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끈한 밥 지어 먹이고 보내시던 할머니처럼.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내가 할머니를 찾아가는 날은 줄어들었다. 6시간 반은 걸리는 멀리 서울의 대학교에 가면서는 더더욱. 한 때 마음의 위안이 되어 주었던 그 공간을 숙제하는 마음으로 찾으며 할머니 얼굴을 뵐 때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을 고향 집에 있으면서도 서울로 올라가기 직전에야 간신히 들러 기차 놓치니까 얼른 갈게요 서둘러 떠나는 내 뒷모습을 보던 할머니 마음은 어땠을까?
숙제하는 마음 대신 할머니가 보고 싶어 다시 할머니 댁을 찾은 건 결혼을 앞두고 고향을 찾았을 때다. 할머니 좋아하시는 막걸리 한 병 들고 가 옆에 앉아 어린 시절 그때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옥수수 대신 막걸리가 있었다. 여름 툇마루는 몹시도 뜨거웠고, 낮에 마시는 막걸리는 적당한 취기를 일으켜 내가 기억 못 하는 어린 시절의 나처럼 나는 다시 사랑스럽고 애교 많은 손녀가 되었었다. 할머니 댁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임신, 출산, 육아를 핑계로 할머니 입원해 계신 동안 병원도 몇 번 못 찾았다. 그래도 다행히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생신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할머니가 내 생일상에 올려주시던 옥수수와 수박 대신 내가 사 간 케이크를 두고 우리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가 사랑했던 그때의 아이와 닮은, 통통한 아이를 무릎에 안고 노래를 부르는 나. 그때는 몰랐는데 남편이 찍은 동영상 속 할머니의 눈은 우리 둘만 쫓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밭에 이것저것 심기 시작했다. 철마다 손녀 생각하며 정성으로 키워 낸 채소와 먹거리가 택배로 도착할 때마다 아이는 말한다. “난 콩을 싫어하지만, 이건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 먹으라고 힘들게 키운 거니까 다 먹을 거야. 그게 사랑이야.” 내가 그랬듯 내 아이도 엄마의 엄마가 주는 사랑을 먹으며 자라나고 있다.
강초롱 장래희망란에 적었던 작가의 꿈을 아직 놓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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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초롱(나도,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