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봄바람이 부는 3월이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던 그때! 새 학년에 대한 기대감은 나를 충분히 설레게 했다. 낯설고 부산했던 3월이 지나갈 즈음, 우리는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통장을 하나씩 받았다. "내일은 저축하는 날이니까 저금할 돈을 가져오도록!" 한 달에 한 번, 그렇게 우리는 1년 동안 푼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늘해진 날씨가 초겨울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선생님은 반장과 부반장을 앞으로 부르셨다. 반장에게는 통장을, 부반장에게는 우리 반 전체의 저금액을 건네주셨다. 반장이 통장에 적힌 금액을 큰 소리로 말하면 부반장은 돈을 세서 나눠주었다.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반장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교실 한가득 울려 퍼졌다.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0만 원이 넘는 나름 큰돈이었다. 반장에게 통장과 돈을 받아서 조심스럽게 자리로 돌아온 뒤, 그대로 가방 안쪽 깊숙이 넣어 두었다.
“선생님, 돈이 모자라요.” 부반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선생님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돈이 모자란다고? 얼마나?", "2,800원이요." 선생님과 반장, 부반장은 사라진 돈을 찾느라 분주해졌다. "누구냐?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줄 테니까 돈을 가져간 사람은 말해라.” 선생님은 아이들을 어르기도 하고, 혼내기도 했지만 사라진 돈은 찾을 수 없었다. 우리의 하교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돈을 가져간 그 아이가 몹시 미웠다. 결국 잃어버린 돈은 찾지 못했고, 선생님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 채로 종례를 마쳤다.
집에 돌아와서 통장과 돈을 확인하고 나서야 알았다. 통장에 적힌 금액보다 딱 2,800원이 더 있었다. ‘나였구나.’ 확인하지 않고 반장이 건네준 그대로 받아온 것이 문제였다. 왼쪽 호주머니에 2,800원을 챙겨 넣고 대문을 나섰다. 제법 쌀쌀해진 초겨울의 바람을 맞으며 학교를 향해 뛰었다. 호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선생님, 집에 가서 확인해보니까 저한테 2,800원이 더 왔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가지고 왔어요." 골칫거리가 해결되어 기쁘다는 듯이 선생님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해 겨울 근처 수련원으로 1박 2일 졸업여행을 갔다. 취침 전까지 자유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딩동!" 초인종 소리와 함께 선생님께서 방으로 들어오셨다. 선생님께서는 이번 학기를 잘 마무리하고 내년에도 열심히 생활하라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아이들을 부르셨다. “얘들아~ 지난번 저축한 돈을 나눠줬을 때 누군가 돈을 가져갔던 것 기억하지? 그거 서윤이가 가져갔다고 자수했다.” 선생님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정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자수라고 했다. 그저 반장이 나눠준 대로 받아왔을 뿐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무릎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겨울이었음에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날 밤 눈물이 콧등을 지나 왼쪽 뺨을 따라서 베개 위로 떨어졌다. 모두가 잠든 어두 컴컴한 방에서 나는 한동안 소리죽여 울었다. 혹시라도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짭짤한 맛에 몸서리쳐졌다.
교과서를 펼치자 ‘정직한 생활’에 대한 학습 문제가 보였다. 30명 남짓한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정직’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그날 밤의 짭짤했던 눈물 맛이 떠올랐다. ‘왜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당당하게 말했어야 했다. 일부러 가져간 것이 아니라고.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어야 했다. 정직했어야 했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나를 지키는 힘이 내게는 정직함이었다. 다시 아이들을 바라본다. 나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정직'의 맛을 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칠판에 '정직'이라는 낱말을 꾹꾹 힘주어 눌러 썼다. 눈부시게 밝은 햇살이 창가로 들어와 나와 아이들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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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서윤(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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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youmi
2021.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