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은 너 몰라’ 혹은 ‘아이돌이 밥 먹여주냐?’ 아이돌 좋아하는 사람을 얕잡아 보려는 의도부터 이미 싹이 노란 말이지만, 더 슬픈 건 이 말이 듣는 사람에게 딱히 큰 타격감을 주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돌은 팬을 모른다, 밥을 먹여주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어차피 팬은 상대가 나를 알거나 밥을 먹여주길 기대해서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일본 마니아 용어인 ‘오타쿠(お宅)’에서 파생된 ‘덕후’ 그리고 ‘덕질’이 보편화한 시대,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많은 아이돌을 이렇게 다양하게 ‘덕질’하고 있음에도 세상은 아이돌과 팬이 만드는 세계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과 기초적인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아이돌과 팬에서 출발하는 대부분의 논의와 가치관이 현실 세계와 번번이 충돌하는 가장 큰 이유다.
관심이 없다고는 했지만, 또 세상이 관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이곳이 ‘비즈니스가 된다’고 발 빠르게 판단한 이들은 아이돌과 팬이 만드는 세상의 특정 부분에 유독 큰 관심을 쏟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 ‘비즈니스’의 냄새를 맡고 이곳에 뛰어든 사람들의 갖가지 발상을 근거로 아이돌과 팬 사이를 왜곡되게 만드는 대부분의 ‘사업’과 ‘산업’이 탄생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은 많게는 앨범 수백 장을 사야 하는 기형적인 팬 사인회 구조를 낳았다. 앨범을 많이 살수록 당첨률이 높아지는 시스템 때문이다. 아이돌과 팬의 소통은 몇 번의 탈피를 거쳐 구독권 형태로 정착했다. 무대와 공식적인 활동 이외에도 팬들과 최대한의 교류를 나누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 이제 소통은 팬 플랫폼이 제공하는 대표 유료 서비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모든 것의 출발은 오직 좋아하는 마음 하나뿐이었지만, 그 마음은 인간의 욕망과 비즈니스 사이 긴 시간을 헤매다 원형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그 새까만 껍질 속,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아니, 아직 있다고 믿고 싶다. 오기 어린 믿음의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에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케이팝 세상의 위아래가 수십 번 뒤집혔지만 아이돌과 팬을 건강하게 연결해주는 다리로서 노래와 퍼포먼스가 가진 근본적인 가치는 여전하다. 짧지 않은 연습생 기간과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비로소 무대 위에 펼쳐지는 3분여간의 종합예술은, 그 자체로 아이돌의 존재 이유이자 팬들을 가장 강렬하게 매혹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의 폭발력은 단지 좋은 노래와 퍼포먼스라는 외부의 호평을 끌어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팬의 숫자를 늘리는 무엇보다 큰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완성도 높은 무대에서 비롯한 감탄과 자부심은 기존 팬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중요하고 부수적인 효과도 발휘한다.
실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이돌이라면 누구나 노래를 하고 퍼포먼스를 한다. 이쯤에서 필요한 건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였다. 아이돌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단어 ‘세계관’의 등장은 이런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바탕에 두고 있다. 2011년 데뷔한 남성 그룹 엑소는 기록적인 인기도 인기지만 무엇보다 아이돌 최초로 팀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관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룹명부터 가상의 태양계 외행성을 뜻하는 ‘엑소 플래닛’에서 유래한 이들은, 멤버 모두를 ‘엑소 플래닛’에서 지구로 온 초능력자들로 설정했다. 멤버들은 캐릭터에 따라 빛, 물, 불, 힘, 치유 등 ‘생명의 나무’를 돌보던 열두 개의 힘을 하나씩 부여받았고, 그 특별한 능력은 엑소가 발표하는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알수록 복잡하고 거대한 세계관은 그룹에 대한 팬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엑소가 데뷔 10년을 넘긴 지금, 아이돌 세계관은 이제 단순한 인식의 방식이나 그룹을 설명하는 기본 틀을 넘어서 ‘아이돌’이라는 커다란 바구니 안에 담을 수 있는 다양한 콘셉트와 스토리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엑소의 직속 후배로는 지구, 중간계, 천상계에서 온 멤버들이 모인 이달의소녀나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멤버들과 그들의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가 가상 세계에 존재한다는 세계관을 가진 에스파를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신선하고 자극적인 소재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고전 영화와 문학, 인기 뮤지컬 등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각종 문화예술 요소는 음악과 비주얼로 새롭게 창작해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케이팝의 새로운 원소가 되었다. ‘아이돌 세계관’으로 큰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방탄소년단이나 여자친구의 사례는 노래나 앨범을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시리즈물로 기획해 더 긴 호흡으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을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열정적인 팬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렇다. 사실 이 모든 노력은 결국 특정한 세계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최근 그러한 노력의 방향이 팬 플랫폼으로 넘어간 건 일견 당연해 보인다. 일정 수준 이상의 노래와 퍼포먼스는 물론, 한 장의 앨범에서 크게는 하나의 그룹을 아우르는 세계관마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렇게 커다랗고 복잡해진 이야기를 하나로 담아낼 커다란 그릇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이돌 그룹의 또 다른 멤버라 해도 과언이 아닌, 멤버를 넘어 때로는 소속사이자 가족의 역할까지 담당하는 ‘팬덤’까지 한 번에 담아내는 데 팬 플랫폼만큼 유용한 장소는 없었다. 하나의 아이돌 이름 아래 모인 노래, 비주얼, 스토리,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본격 장이 열린 것이다.
이것을 요즘 흔히들 이야기하는 ‘메타버스’ 개념으로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곳은 가상의 세계이면서도 그 어디보다 인간적인 세계라는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그 모든 이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 세상이 주는 몰입감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강렬한 경험이다. 좋아하는 것을 온종일 이야기해도 ‘걔가 너 알아주냐’는 포인트를 벗어난 시비를 누구도 걸지 않는 세상, 내가 좋아하는 것을 숨길 필요 없는 세상, 지금 내 옆에 있는 내가 모르고 또 아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것을 좋아하고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는 감각이 전하는 안도감과 충만함. 아이돌과 그를 한마음으로 좋아했던 사람들과 함께 보냈던 한 철은 그를 스스로 선택해 통과한 사람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간다. 그곳이 천국이었든 지옥이었든, 비록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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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