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오늘을 앞서간다. 되풀이된 사건 속에서 익숙한 감정이 되살아난다. 오래된 말들이 다시 불려나와 현실을 독해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되감기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삶이 시험에 든다. 기억이 미래를 복원하고 일상에 마법 같은 감각이 엷게 중첩된다.
성해나의 소설 「혼모노」에는 경력자 박수무당의 비애가 그려진다. 어느 날 신기가 떨어진 주인공은 ‘흉내만 내는 놈’이라 비웃는 젊은 신애기의 조소에 무너진다. 평판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생계마저 흔들리지만, 자존심까지 버려두지는 않는다. 작심한 그는 날 선 작두에 보란 듯이 오른다. 피비린내가 진동하지만 중요치 않다. 아픔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절박하게 치달은 몸부림과 자기증명의 초월 사이에서 열린 결말로 멈춘다. ‘진짜’는 어느 한 곳에 붙어 있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믿음의 축을 견디고 버텨 스스로 입증됨을 역설한다.
‘버티어 증명하기’는 최근 우리 미술의 경향에서도 목격된다. 여기에는 완전히 새로운 화면도, 폐기된 매체로 물러나 뒤처진 것도 없다. 이전의 레퍼토리가 재편집·가공되며, 물질적 재현과 디지털 언어가 서로 인접하여 자리를 지킨다. 2024 광주비엔날레, 2025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같은 주요 미술행사는 각각 ‘판소리’와 ‘영혼의 기술’을 주제로 전통과 정령의 자취를 되짚었다. 그들은 동시대의 신선한 담론이자 예지적 증후로 떠오른다. 한때는 시대착오로 여겨지며 구심점을 갖지 못했던 것들이 재발견이란 이름으로 조명된다.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25)은 근대의 묻힌 시도를 지금 화두로 불러냈다. 잊혔던 감수성을 재배열한 이 전시는 미술사의 복원 가능성을 모색하며, 오래 잠들어 있던 작품들을 거울처럼 비췄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는 민화 ‘호작도(호랑이·까치 그림)’가 있는 박물관의 방문 인파로 이어진다. 한옥이 젊은 세대의 플랫폼으로 부상하며 글로벌 문화 행사의 배경으로 주목받는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경계는 부드럽고 교차는 자유롭다.
그런데 이 같은 낭만은 지난날의 단순한 예찬이나 향수를 더듬는 복고 트렌드로부터가 아니다. 전통은 불확실한 현재를 통과하기 위한 언어로 소환되어 그 또한 실험되는 중이다. 회귀의 무의식 아래에는 지금의 불안과 결핍이 여전히 진동한다.
최수련, 붉은 비단과 종이 조각들, 리넨에 수채와 유채, 117x73cm, 2025
최수련의 그림에는 동북아 신화와 전설 속 등장할 법한 이미지가 들어서 있다. 의도된 흐린 형상과 지워진 얼룩이 시간성을 지각케 하는 이들은 작가의 공부인지 낙서인지 모를 필사노트의 흔적으로 다소간 엉뚱함도 드러낸다. 고서의 한자를 베껴 쓰며 남긴 노력은 치밀한 한편, 그것을 작품으로 올려다 놓은 발상은 보존의 무게를 가벼운 유희로 밀고 당긴다. 전통복장의 여인들과 선녀, 만다라와 연꽃의 도상이 개연성 없이 출연하고, 사극 드라마의 한 컷이나 외화 비디오의 번역된 자막 문구가 화면에 불쑥 뒤섞인다. 이들은 서사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잔상처럼 희뿌옇게 잔존한다. 그리하여 이 회화는 고전의 상징과 대중적 클리셰, 개인이 지닌 정서적 기억이 은근히 침투한 혼성의 장이 된다. 전통은 숭고하게 모셔지는 유산도,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예의 기댓값도 아닌, 조합된 시간의 파편으로 감지된다.
허선정, 00에 잠긴 달, 장지에 분채, 35x28cm, 2024
허선정의 화폭은 내면의 고독이 정신적 수행으로 향하는 빛깔이다. 아픈 가족의 간호와 이별을 겪고, 지치고 쇠잔했던 나날을 통과한 기록이다. 동양철학과 종교, 무속과 사주에 호기심을 갖는 이 젊은 작가는 자연의 신비에 감응하며 세계를 받아들인다. 새벽빛과 달그림자, 물너울과 거기 겹쳐지는 존재의 희미한 얼굴이 분채와 물감으로 재현된다. 묘사된 형상은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하며, 아름다우나 여전한 허무와 비애를 담고 있다. 담아낼수록 무너지고, 무너지지만 담아내야 하는 운명 앞의 정제된 읍소, 끝내 구원에 다가서길 희망하는 관조자의 낮은 선율 같다. 허선정은 현실의 주택가 전경에서부터 몽환의 섬과 바다로 그림의 장소를 옮기며 사유를 이어가고 있다.
박건, 환생회로도, 장지에 괴화염색, 경면주사, 연필, 194x397.5cm, 2024
박건은 괴황지 위에 경면주사로 그림을 그린다. 부적에 쓰이는 재료의 특성상 화면은 주술적 도해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된 도상들의 집합이다. 그는 가짜뉴스와 과학 이론의 경계가 흐려지고 믿음이 오인되는 구조를 비판과 동시에 차용하여 드러낸다. 세기말의 혼란과 공포가 만연했던 시간을 유년의 몸으로 통과한 경험이 작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중국 고대 신화와 한국의 괴물 설화, 인터넷 비화와 환상소설의 구조를 결합한 상상력이 그의 작업을 이루는 중추다.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를 옮겨온 이들의 회화는 불안한 개인들의 사회를 통과하며, 믿음의 힘을 예술의 형식으로 투철히 증명하고 있다. 그렇게 쌓인 흔적이 지금을 새롭게 갱신한다.
│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 ― 성해나, 「혼모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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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출판사 | 창비
오정은
미술비평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전문사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동시대 미술 현장과 작가 작업을 연구하며 글을 쓴다. <경향신문>에 미술 칼럼을 연재했고, <네이버 디자인>, 『월간미술』, 『서울아트가이드』 등 여러 매체에 기고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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