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하루] 잔뜩 비웃은 올림픽이었는데 말이죠 - 이윤서
비록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한 해는 아니었을지언정 작지만, 보석 같은 취미를 찾은 한 해로 기록하고자 한다. 때로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법이기도 하니까.
글ㆍ사진 이윤서(나도, 에세이스트)
20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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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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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별다를 게 없는 한 해일 뻔했다. 1년이면 되지 않을까 싶었던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여전히 답답한 마스크를 온종일 쓴 채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남도 번번이 취소되고, 올해부터 시작한 일도 만족스럽지 않으니 외려 우울한 한 해일 뻔했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나이는 점점 드는데 이룬 게 딱히 없는 것 같아 불안한 날들이 유독 많던 해이기도 했다. 원하는 직무에서 만족스러운 연봉을 받으며 주어진 몫을 온전히 해내는 친구들,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일찌감치 정해 해외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후배들, 하루 세끼 챙겨 먹기도 벅차하는 나와 달리 한 생명을 낳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과정을 매일 해내고 있는 선배들까지.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이 찝찝한 기분은 낮에는 잠잠하다가 어둠을 먹고 몸을 부풀려 심기를 건드린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보면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결말도, 정답도, 해결도 없는 생각들로 가득한 무력한 일상에 선물같이 찾아온 건 뜬금없게도 올림픽이다. 2021년 7월, 말 많고 탈 많던 제32회 도쿄 올림픽이 개최됐다. ‘감염병 때문에 연기된 최초의 올림픽’, ‘최초의 무관중 올림픽’ 등 달갑지 않은 타이틀이 시작도 전에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붙었다. 선수촌 식단에는 후쿠시마산 식자재가 납품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선수 보호 차원에서 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움직임도 일었다. 언론은 최악의 올림픽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을 담은 기사를 이미 일어난 일인 것처럼 쏟아냈고, 나 역시 ‘망한 올림픽, 누가 보겠느냐‘며 조소를 날렸더랬다.

문제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고 생각한 도쿄올림픽에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단 한 차례도 정상을 내주지 않은 양궁 여자 단체전만 보겠다며 TV 앞에 앉은 게 화근이었다. 이제 갓 20세가 된 안산 선수가 내리 텐, 텐, 텐을 꽂아 넣은 곳은 70m 떨어진 과녁이 아니라 바다 건너 내 마음이었다. 서로에게 전염병을 옮기지 말자는 미명 하에 수개월째 각자 자리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상황 또한 본의 아니게 올림픽 ‘덕질’에 최적화된 환경을 조성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컴퓨터 큰 화면으로 올림픽 생중계 화면을 띄워놓고 밥을 먹는 게 올해 여름의 일상이었다. 안 챙겨본 경기가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종목을 섭렵했다. 유도, 탁구, 배드민턴, 태권도, 도마, 수영, 핸드볼 등 한 번쯤 봤던 종목은 물론이고, 생전 처음 보는 다이빙과 스포츠클라이밍마저 어찌나 재밌던지 실시간으로 룰을 익히며 나름대로 분석하기 바빴다.

회색빛이던 삶에 생기가 돌았다. 주말이 아닌데도 다음날이 기다려지고, 또 어떤 새로운 종목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하며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뛰게 한 종목은 단연 배구다. 가끔 스포츠 뉴스에서 자료 화면으로 나오는 장면만 몇 번 봤을 뿐, 경기를 본 적도 없고, 규칙도 전혀 몰랐다. 예능에 얼굴을 비춘 김연경 선수를 제하고는 아는 선수도 없었다. 관심 없는 종목이었던 만큼 처음은 동정심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챙겨봤다. 비슷한 시간대에 하는 다른 인기 종목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데도 공중파에서 방송해 주지 않아 괜히 내가 다 서러웠다. 그렇게 챙겨보기 시작했다. 한두 세트 보다 보니, 손으로 공을 패스하여 세 번 안에 상대편 코트로 넘겨 보내야 하는 대략적인 규칙이 눈에 들어오면서 재미가 붙었다. 진행도 빠르고 막강한 파워로 공을 때려내는 선수들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며 동정심 대신 진심 어린 애정이 자리 잡았다.

반짝 좋아하고 말 이 마음이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한 이유는 한일전 덕이다. 퉁퉁 부은 다리를 끌고 기어코 상대편 코트로 공을 넘길 때, 넘어지는 것 따윈 상관없다는 듯 끈질기게 공을 따라갈 때, 멋지게 점수를 획득하고 포효할 때, 이기고 싶은 간절함이 화면을 뚫고 전해지자 앉아서 응원하는 내 가슴도 요동쳤다. 결국 일본을 꺾고 8강행을 확정 지었을 때 펑펑 울던 기억이 난다. 눈물 흘리는 게 싫어서 영화도 ‘새드 엔딩’은 되도록 피해 보는 내가, 요즘도 심심하면 한일전 명장면을 틀어놓고 눈물을 훔치곤 한다. 배구 리그를 챙겨보는 취미도 생겼다. 모든 선수들이 좋아서 아직도 ‘팀 돌잡이’를 끝내지 못했지만, 빨리 지나갔으면 했던 평일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올해를 기억할 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그 무엇보다도 ‘올림픽’이다. 비록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한 해는 아니었을지언정 작지만, 보석 같은 취미를 찾은 한 해로 기록하고자 한다. 때로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법이기도 하니까.




*이윤서


게으름을 다스리며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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