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소울 디바의 연대기
2000년대에 들어서 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등 영국의 백인 여성 소울 싱어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그 시작은 생각보다 오래됐습니다.
글ㆍ사진 이즘
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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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음악은 미국에서 탄생했지만 그 파급력과 영향력은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그 어느 나라 가수든 흑인 가수처럼 노래하면 훌륭한 가창력을 가진 가수로 인정받으니까요. 하물며 미국과 DNA가 가장 유사한 나라 영국에서 이런 소울 가수들이 많이 탄생한 건 당연합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등 영국의 백인 여성 소울 싱어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그 시작은 생각보다 오래됐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이즘 특집에서는 팝 역사에서 인정받은 영국의 백인여성 소울 싱어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

이 분야에서 단 한 명만 꼽으라면 저는 이 사람을 선택하겠습니다. 그의 메조소프라노 음색은 깊고 푸근하죠. 제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저를 다 이해하고 감싸줄 것 같은 그 엄마 같은 음색은 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안아 줍니다. 우리나라 기성세대는 웅대한 발라드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나 'Windmills of your mind'를 사랑했고요. 1997년에 개봉한 영화 < 접속 >에 삽입된 재즈 스타일의 'The look of love'로 X세대에게도 알려진 그는 1999년에 59세에 눈을 감았습니다. 또 저처럼 1980년대에 팝송을 열심히 들으신 분들에게는 펫 샵 보이스와 함께 부른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로도 유명하죠.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세대에게 사랑받았지만 그 진가는 후배 가수들에 의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아이돌 밴드 베이 시티 롤러스와 닐 영의 백업 싱어 출신의 니콜레트 라슨, 1980년대의 댄스팝 가수 사만사 폭스가 커버한 명곡'I only want to be with you'를 비롯해 모던 포크를 들려준 페미니스트 싱어 송라이터 애니 디 프랑코가 부른 'Wishin' and hopin'', 개러지 리바이벌의 선두주자 화이트 스트라이프스가 부른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가 바로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원곡이거든요. 영국 소울의 여왕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노래는 대중음악의 거룩한 유산입니다.



애니 레녹스(Annie Lennox)

1983년에 컬처 클럽의 보이 조지가 여장을 하고 등장하자 유리드믹스의 보컬리스트 애니 레녹스는 남장을 했습니다. 여기에 중성적인 외모, 낮은 목소리 톤, 무표정한 얼굴은 애니 레녹스를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죠. 사실 이런 휘발성 화제 때문에 그의 가창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애니 레녹스는 분명 뛰어난 보컬리스트입니다. 유리드믹스의 대표곡인 'Sweet dreams'나 'Here comes the rain again'보다는 큰 히트곡이 아닌 'Who's that girl?'과 'There must be an angel'을 들으면 그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아레사 프랭클린이 유리드믹스의 노래 'Sisters are doin' it for themselves'에서 애니 레녹스와 함께 호흡을 맞췄는데요. 천하의 아레사 프랭클린이 아무하고나 듀엣을 부를 리는 없겠죠. 이것만 봐도 그의 가창력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나요?



앨리슨 모이에트(Alison Moyet)

낯선 이름이지만 1980년대 초반에 인기를 얻은 'Don't go', 'Situation', 'Only you'의 주인공 야즈의 보컬리스트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의 낮은 톤에서 느껴지는 힘과 거침없이 질주하는 활화산 같은 보컬은 냉정한 신시사이저 소리와 대비되며 야즈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뉴웨이브/신스팝 그룹들과 차별화하는데 성공했죠. 그는 1984년에 솔로로 독립해서 'Invisible'이라는 멋진 노래를 영국 차트 21위, 빌보드 31위에 안착시켰는데요. 이 곡의 작곡가는 모타운의 포 탑스와 슈프림스의 명곡들을 만든 작곡자 중 한 명인 라몬트 도지어입니다. 이 작곡 명인이 'Invisible'을 선뜻 제공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앨리슨 모이예트의 소울풀한 감성은 이미 증명된 거죠. 또 1985년에 열린 역사적인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는 영국의 또 다른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폴 영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led)

1990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3위, 영국 차트 정상에 오른 'All around the world'로 인기를 얻은 리사 스탠스필드의 첫 인상은 '배우 소피아 로렌과 비슷하네'였습니다. 광대뼈 나온 볼과 두꺼운 입술이 소피아 로렌을 떠올렸거든요. 그의 음악은 댄스팝과 어반 알앤비의 기초 위에 쌓아올린 조화로운 결과물입니다. 돌이켜보면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미국의 블루 아이드 소울 가수 테일러 데인에 대한 영국의 대답이었죠. 데뷔앨범에 수록된 'What did I do to you'는 바로 테일러 데인의 판박이니까요. 리사 스탠스필드의 가창력과 감성은 검정색에 가까웠고 그의 열정은 존경하는 선배 배리 화이트에게 맞닿았습니다. 배리 화이트의 'Never never gonna give you up'을 커버했고 나중에는 그와 함께 자신의 유일한 히트곡 'All around the world'를 함께 부르는 영광까지도 누렸으니까요.



조스 스톤(Joss Stones)

조스 스톤을 처음 알게 된 건 그가 17살이던 2004년이었습니다. 16살에 데뷔한 조스 스톤의 음악은 예상과 달리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같은 댄스팝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님 세대가 좋아할만한 1960, 1970년대의 소울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음반사에서도 10대 소녀 조스 스톤을 보컬 천재로 홍보했었죠. 데뷔앨범 < Soul Sessions >는 실제로 1960, 1970년대의 노래들을 리메이크한 음반인데요. 컨트리 가수 웨일런 제닝스의 'Chockin'kind', 미국의 하드록 밴드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의 'Some kind of wonderful', 개러지 록 밴드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Fell in love with a boy' 같은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가 10대 소녀에 의해 진득한 소울/블루스로 환복했습니다. 2000년대 영국의 네오 소울의 시작은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아델도 아니었습니다. 2019년에 북한에서도 공연했던 용감한 여성 조스 스톤입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조스 스톤과 같은 시기에 등장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인생은 불꽃같았습니다. 영화 < 이유 없는 반항 >의 주인공처럼 무모했고 재니스 조플린처럼 무절제했죠. 술과 약물은 그의 몸과 정신을 좀먹었지만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그 혼돈을 음악에 쏟아 부었습니다. 진한 화장으로 자신을 가린 그의 노래가 처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진 건 바로 가짜가 아니기 때문이죠. 대표곡 'You know I'm no good'과 'Rehab'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일기 같은 곡입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소울 가수로 알려졌지만 그의 음악 바탕은 재즈인데요. 그래서 자유롭게 구애받지 않고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 에이미 >에서 그의 경호원이었던 사람의 마지막 멘트가 생각납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자기 노래를 듣고 그 경호원한테 “나, 노래 꽤 잘하네”라고 말하자 경호원은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이렇게 대답하죠. “그 재능 다 물리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27살에 눈을 감은 영국 소울의 여제가 원했던 것은 음악이 아니라 자유였습니다.



더피(Duffy)

저는 2000년대 등장한 영국의 소울 여가수 중에서 더피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제가 과거로 얘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이후에 발표한 2집이 별로였기 때문이지만 2008년도 데뷔앨범 < Rockferry >는 저에겐 그해 최고의 음반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그 어느 네오 소울 가수의 앨범들보다 < Rockferry >가 제일 복고적이었는데요.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떠오르는 외모의 더피가 1960년대의 월 오브 사운드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고전적인 분위기를 도입한 이 음반에서는 메가 히트곡 'Mercy'가 사랑받았지만 감정을 서서히 이끌어내는 'Rockferry'와 처연한 'Warwick avenue'가 핵심입니다. 이 두 곡만으로도 더피는 인생 곡을 얻었죠. 같은 시기에 경쟁한 아델이 'Chasing pavements'로 2009년도 그래미에서 올해의 신인과 최우수 여성 팝 보컬 부문을 수상할 때 더피는 < Rockferry >로 그래미에서 최우수 팝 보컬 앨범을 수상했습니다.


 

아델(Adele)

19, 21, 25, 30. 간격이 점점 넓어지는 이 숫자의 행렬은 아델이 발표한 앨범의 제목입니다. 이 음반들을 제작할 때 자기 나이를 타이틀로 정한 거죠. 데뷔앨범에서 알 수 있듯이 아델 역시 조스 스톤의 방법처럼 어린 나이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조스 스톤이 처음부터 선배 가수들의 노래를 커버한 것과 달리 아델은 밥 딜런의 'Make you feel my love'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작곡 혹은 공동작곡한 노래들이었습니다. 조스 스톤에겐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터 조스 스톤과 아델의 미래는 결정된 거죠. 덕분에 아델은 처음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싱어 송라이터로서의 위상도 확실히 다지며 201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5곡의 빌보드 넘버원과 영화 < 007 스카이폴 >의 주제가 취입, 15개의 그래미 수상 등 그동안 아델이 얻은 이 훈장들은 그의 음악이 거둔 승리에 따라오는 전리품일 뿐입니다.



 픽시 로트(Pixie Lott)

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더피의 성공에 이은 후발 주자로 낙점된 픽시 로트 역시 2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데뷔한 영국의 네오 소울 가수입니다. 2009년에 공개한 데뷔앨범 에서는 'Mama do'와 'Boys and girls', 'Cry me out'이 연달아 인기를 얻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음반이 발표됐지만 당시 국내에선 영국 네오 소울 3인방의 그림자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죠. 그러다가 이하이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Mama do'를 부르며 뒤늦게 알려졌고 그 여파로 소규모 쇼케이스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진가를 알 수 있는 노래는 알앤비와 댄스팝이 섞인 'Mama do'보다는 복고적인 소울을 재생한 'Cry me out'인 것 같습니다.

 


팔로마 페이스(Paloma Faith)

28살에 첫 음반을 냈으니 위에 언급한 가수들보다 늦었고 세계적인 인지도도 그들에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죠. 보통 사람들은 팔로마 페이스를 알지도 못했고 또 알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완전한 복고를 지향하는 다이안 워렌 작곡의 'Only love can hurt like this'와 소울과 댄스팝이 균형을 이룬 데뷔 싱글 'Stone cold sober'에서 드러나는 팔로마 페이스의 에너지는 범상치 않은데요. 내면의 광기와 키치적인 외면이 독한 매력의 팔로마 페이스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가짜도, 허세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음악이 그 모든 것을 말해주니까요.




미국과 DNA가 유사한 영국은 대중음악의 세포도 비슷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미국 흑인의 음악인 소울 역시 영국 뮤지션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이것을 영국화시켜 전 세계에 수출했죠. 위에 소개해드린 가수들 외에도 조 카커, 폴 영, 샘 스미스 등 수많은 영국의 남성 가수들도 흑인 창법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2000년에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미국 사회는 보수적인 색체를 띄기 시작했고 덩달아 컨트리 뮤지션 캐리 언더우드나 테일러 스위프트, 미란다 램버트, 리앤 라임스, 딕시 칙스, 레이디 안테벨럼 등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과 비슷한 상황이었죠. 이때 영국은 이와 반대로 흑인음악인 알앤비/소울을 구사하는 여성 싱어들을 주목하고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 계를 장악한 영국의 백인 소울 가수들은 흑인음악으로 그 진가를 인정받았죠. 되돌아보면 흑인음악을 하는 백인 가수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백인음악을 하는 흑인 가수는 적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세계 역사에서 흑인은 늘 피해자 입장이었지만 대중음악 분야에서만큼은 흑인과 흑인 문화는 완벽한 승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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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