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산업화, 혁명을 겪으며 요동친 서구의 19세기에 여성은 ‘당사자’로서 상황에 대응하고 변화를 주도했다. 『19세기 허스토리』는 실재했으나 잊히고 지워져온 그 궤적을 조명한다. 19세기가 서구 여성에게 어떤 시대였는지, 당시 여성은 인간과 시민으로 생존하기 위해 어떻게 분투했는지를 시대의 초상이라 할 인물·집단을 통해 드러낸다.
표지 사진이 멋있네요!
그렇지요! 알아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사진은 볼수록 더 정감이 가요. 비슷한 차림새의 흑백 단체사진이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저마다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거든요. 손에 열쇠를 들고 있는 인물도 있는데, 어떤 열쇠일까? 왜 들고 있을까? 어떤 이는 왼손 중지에 반지를 꼈고, 또 다른 이는 약지에 꼈는데, 어떤 사연이 있을까? 무슨 일을 하느라 앞치마에 잔뜩 기름때가 끼었을까? 보고 있노라면 끝없이 질문이 생겨납니다. 무엇보다 이분들 눈빛이 강렬하면서도 따뜻해서,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것 같습니다. 이 사진 하나로도 소설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가 이런 사진을 찍었나요?
이 사진은 약 백 년 전에 루이스 하인(1874-1940)이라는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사진작가가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공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루이스 하인은 주로 공장이나 건설현장, 도시와 항구를 다니면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업가나 기득권층이 감추고 싶어 했던 산업 사회의 참혹하고 부당한 현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것이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에서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인은 사진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지요. 멋진 작가의 멋진 말입니다. 저는 한 마디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하인의 사진이 당시 미국에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진의 주인공들에게 공명하는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진실이 담긴 글이나 사진도, 그에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들이 있어야 좋은 변화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책은 모두 일곱 개의 각기 다른 상황에 놓였던 여성들을 보여줍니다. 선정에 어떤 기준이 있었습니까?
19세기라는 시간적 배경 외에 특별한 기준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필자들은 모두 서양 근현대사 전공자들인데, 자신들이 잘 아는 영역에서 19세기를 잘 보여줄 수 있고, 우리 사회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인물을 선정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을 배우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런 변화가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잘 알지 못하지요. 구체적인 인물이 주인공인 이 책을 통해 독자는 근대가 시작되는 풍경을 훨씬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책의 주인공들은 꽤 다양합니다. 노예, 노동자, 교사, 혁명가, 언론인, 작가 등 놓여 있던 처지와 배움의 정도도 달랐지요. 생각이나 실천 방식도 꽤 달라서, 기성 질서를 흔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사람도 있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기존 질서와 타협하거나, 기꺼이 순응하는 제스처를 취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성 선구자 하면 지식인 중산층 여성을 많이 떠올리는데,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 책이 보여줍니다. 또 업적을 남긴 이들이라고 해서 늘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것만도 아니지요. 그래도 이 책의 주인공들이 한 가지 공유하는 점이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지배질서가 여성에게 상정한 역할과는 다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관습의 궤도를 넘어서는 삶이었고, 그에 따른 고통도 안고 가는 고달픈 길이었지요. 그래서 이들이 남긴 이야기에는 백년이 지나도 우리를 잡아끌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글마다 끝 부분에 자료를 몇 쪽씩 첨부했던데, 이유가 있나요?
부록처럼 덧붙인 자료는 본문 내용과 연관된 자서전이나 신문, 사전 등에서 발췌한 1차 자료들입니다. 독자들이 인물과 시대를 직접 만나는 경험도 해 봤으면 하는 생각에서 첨부했습니다. 어쩌면 독자는 첨부된 자료들에서 더 큰 영감을 얻고,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이 『19세기 허스토리』입니다. ‘히스토리’라고 하지 않고 ‘허스토리’라고 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허스토리herstory’는 1970년대 미국 여성운동이 발달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허스토리>(2017)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말이지요. 저희가 제목을 ‘허스토리’라고 한 것은 히스토리 즉, 기존의 역사서술이 여성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앞으로의 역사 서술에는 여성의 모습, 여성의 생각, 여성의 경험이 더 많이 실려야 합니다. 여기서 여성은 일반적인 여성 뿐 아니라 기존 히스토리에서 간과했던 모든 집단이나 주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좋은 사회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능한 한 자기 주장을 낼 수 있고, 또 다른 이들의 모습과 소리에 서로 따뜻한 관심을 기울일 줄 아는 예의와 여유가 있는 사회겠지요. 그런 사회를 원한다면, 역사서술도 이에 맞추어야 할 겁니다. ‘허스토리’라는 말에는 기존 역사가 다루지 않았던 영역으로 역사 공부의 지평을 넓혀가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19세기 서구 여성을 다루는 이 책이 21세기 한국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글쎄요. 독자마다 꽂히는 지점, 공감하는 지점이 다를 겁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이 살던 19세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사회가 태동하던 시기입니다. 근대사회는 모든 사람의 보편적 인권을 말하면서도, 현실에서는 남녀와 인종, 계급을 구별하고 차별하면서 여성과 유색인종,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기회를 차단하는 다중적 규범을 제시합니다. 이 책의 여성들은 그런 법과 제도와 현실을 때로는 현명하게 때로는 무모하게 때로는 교활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헤쳐 나가며 ‘인간과 시민’으로 생존해 온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 역시 남녀가 평등하다는 규범은 있지만, 여전히 성별 소득격차는 크고, 재산격차는 더 큽니다. 여성이 확보한 물적 인적 자산이 빈약하고, 여성에게 기회의 문이 여전히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지요. 인생에 리허설은 없기에 누구에게나 삶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길이고 어려운 여정이지만, 특히 자산과 기회가 부족한 이들에게는 더 막막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그런 조건에서도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기필코 지켜낸 서사를 남겼습니다. 이들과 만나며 독자들이 무엇보다 시원하고 통쾌한 기운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지혜와 위로도 덤으로 얻게 될 겁니다.
*최재인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19세기 후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사 전공으로 젠더, 인종, 계급 등의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 『서양 여성들, 근대를 달리다』(2011), 『서양사강좌』(2016), 『평화를 만든 사람들』(2017), 『다민족 다인종 국가의 역사인식』(2009), 『여성의 삶과 문화』(2019) 등이 있다. 『유럽의 자본주의: 자생적 발전인가, 종속적 발전인가』(2009), 『아름다운 외출: 페미니즘, 그 상상과 실천의 역사』(2012),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2014), 『세계사 공부의 기초: 역사가처럼 생각하기』(2015),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네덜란드 여성이 증언하는 일본군 위안소』(2018)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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