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 눈빛은 그가 무언가 숨기는 구석이 있다는 암시일까 아니면 연기나 연출이나 편집에서의 계산 착오일까. 과몰입 해서 드라마를 보다가 아무래도 다 범인 같아서 과부하 걸린 머리를 움켜잡고 마른세수를 한다. 제작자가 의도대로 배치해 제공하는 단서와 함정에,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한 땀 한 땀 세공 해낸 의심이 더해져 상황은 점입가경 헤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꾸준히 학습해온 불안과 의심은 언제나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범인 찾기 미션이 없는 극을 보면서도 부지불식중에 나쁜 사람을 찾는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조금만 시선을 기울여보면 갈등 거리가 숨어있지 않을까 의혹할 거리가 나타나지 않을까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았다. 악의적인 충돌이나 다툼이 없어도,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가 없어도 이야기는 재미있다. 무척이나.
‘빌런’이 없어도 이야기는 흥미롭다. ‘빌런’이 없는 이야기가 좋다. 내 딸을 때린 애가 누구냐고 학교를 찾아간 엄마는 또 다른 사건을 만들 것 같지만, 무턱대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다정하고 배려심 있는 어른일 수도 있다.(문경민, 『훌훌』) 전업투자자가 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혀 적자만 내는 남편은 영영 그 자리에 붙박일 것 같지만, 어떤 때에 달하면 기꺼이 문턱을 넘어 나란히 반걸음을 반의반걸음을 내딛는 동반자일 수도 있다.(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 어디에든 문제적 인물은 있지만 단지 화를 유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황과 사건과 사람에 휘둘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재미요소라고 얼렁뚱땅 넘기기에는 그것 없이도 충분히 즐겁다는 증거가 너무 많으니까. 나는 꽤 많은 시간을 걱정에 할애하는 사람이지만 종종, 특히 최근에는 더 자주, 사실은 만들어진 불안에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드라마나 책 얘기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의도한 그런 장치들을 걷어내면 더 나은 것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불필요한 불안에 잠식되어 공허하게 공연하게 소리를 높이고 충돌을 만드는 일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같이 억지스럽지 않은 제대로 된 논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열 번 중에 한 번이라도 더 나은 방향을, 같은 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그럴듯하게 잘 차려진 불안을 덥석 받아 드는 대신 가만 토닥토닥 잠재워보면 말이다. 그러면 그 뒤에 깨어있는 진실이 보이지 않을까.
나, 가끔 우리의 삶이 추리소설에서 탐정이 하는 가장 긴 추리 같아. 진실이 쉽게 밝혀지지 않아서 절망도 하고 실망도 많이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그 끝엔 답도 있고 진실도 있고 보고 싶은 사람도 있는…… 설사 그게 세상이 정한 답하고는 다를지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 서로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 살아내자.
_한정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360쪽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런 불안은 슬며시 곁에 다가와 있어서 알아채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러니 더욱 경계한다. 청개구리 심보는 이럴 때 쓴다. 의도대로 해주기 싫다. 넘어가주고 싶지 않다. 이것은 나의 의심이, 불안이 맞나. 다년간 학습해온 의심 실력을, 그것을 의심하는 나의 의심을 의심하는 데 사용한다. 내가 불안해하기를 바란다면 불안해하지 않겠다. 의심하고 흔들리기를 원한다면 보란 듯이 곧게 가겠다. 불안이 다 나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 불안은 내가 만들겠다. 라고, 언제나 마음만은 자꾸 다잡는 이 유약한 인간은 갈대같이 흔들리는 심지를 오늘도 살짝 다시 조여 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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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