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학맥과 학풍』은 한국의 현대 학문들이 해방 이후 어떻게 성장해 왔고, 주요 학자와 학파들의 면모는 어떠했으며, 그 한계와 가능성은 무엇인지 추적하고 탐구한 결과다. 우리의 정신사 형성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동양철학, 서양철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법학 여섯 개 분야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았다. 한국 현대 지성사의 복원은 전통 학문과 서구 근대를 슬기롭게 접목할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며 식민지배와 전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 학문의 토대를 쌓기 위해 묵묵히 노력했던 학자들의 가능성과 한계를 살피는 일이다. 이 책을 쓴 이한우 작가에게 우리 학문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 보았다.
이한우 선생님은 대학원까지는 서양철학을 공부하시고, 학술 문화부 기자를 하시다가 그만두신 이후에는 동양 고전들을 공부하시고 번역하고 계십니다. 인터넷 서점에 검색을 해보니, 번역서를 포함해 저서만 무려 100여 권이 나오더라고요. 이번에 개정판을 내신 『우리의 학맥과 학풍 』이 선생님의 첫 책이시죠?
개정판이라고 했지만 복간본(復刊本)에 가깝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합니다. 진정한 개정판이라면 1995년 이후 한국 학계의 실상을 새롭게 담아야 했는데 그러지는 못했어요. 대신 본문 문장들을 새롭게 다듬어서 가독성을 높였고, 사실관계를 일일이 확인해서 많은 부분을 정확하게 수정했습니다. 현재 우리 학계에 관한 이야기는 청년학자 임명묵 군과의 대담으로 보완했고요, 그러나 처음 책을 낼 때 강조했던 동·서양 학문의 통합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고 학문성의 철저화 또한 약간 개선된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 그런 점에서는 이 책의 현재성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지난 30년 가까이 크게 발전하지 못한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부실함이 이 책에 현재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인 것이죠.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우리 현대 지성사 전반을 다룬 책으로는 여전히 유일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개정한 것이고요. 한편으론 이 책을 디딤돌 삼아 한발 더 나아간 한국 현대 지성사 책이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한우 선생님, 이 책을 쓰신 동기는 무엇이고 출간 당시 학계 반응은 어떠했나요?
부제만 봐도 제 집필 의도가 노골적이었죠. 처음에는 이렇게 여러 학문 분야를 아우를 생각은 못 했어요. 저는 서양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우리 서양철학계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우선 궁금했어요. 저널리스트의 관심 말고도 제 개인적 학문 이력도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제가 철학과 대학원 다닐 때 독일 쪽 방법론, 즉 학문론이라고 하는데 과학적인 것과 함께 인문학적인 것까지 포괄해서 현실을 제대로 포착하는 수단으로서의 방법이 뭔가? 이런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기자가 되고 나서도 이런 척도를 가지고 우리 학계를 한번 짚어보자, 처음에는 소박하게 시작했어요. 그런데 취재를 하면서 기자의 시각으로 우리 학계를 보니까 제가 학생일 때와는 달리 굉장히 실망스러운 거예요. 제가 조금 알고 있는 철학 분야부터 시작했죠. 동양철학, 서양철학부터 신문에 우선 연재하고 다른 학문 분야도 조금씩 공부해가면서 넓혀갔습니다.
이한우 선생님이 『우리의 학맥과 학풍』에서 던진 문제 제기를 한번 요약해보면, 우리 학문의 어떤 전통이 단절된 상태에 따른 결과로 ‘현실성을 상실한 서양 학문, 현재성을 상실한 동양 학문’ 이렇게 압축해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서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우리 학문 전통에서 여전히 계승하거나 더 확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 전통 학문에서요? 사실 제가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다산 정약용을 연구할 겁니다. 다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우리 동양 학문의 큰 치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다산의 가장 위대한 책이 뭐냐면 대개 『목민심서』라고 그래요. 다산이 들으면 뒤로 나자빠져 기절할 겁니다. 뭐 이런 후손들이 다 있나? 하면서. 저도 다산을 전체적으로 다 살핀 건 아니지만 사상과 관련된 책들은 어지간히 읽어봤는데요. 다산의 가장 위대한 점은 주역을 풀이한 『주역사전(周易四箋)』입니다. 여기서 사전은 사전(事典)이 아니고 사전(四箋), 즉 네 개의 에디션을 말합니다. 스스로 계속 바꿔가면서 네 번에 걸쳐 에디션을 냈는데 그 내용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논어고금주』를 집필할 때도 그렇고, 여기서 다산이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우선 엿볼 수 있어요. 전체를 보고자 할 뿐만 아니라 그 뿌리까지 파고들고자 한 철저함, 이 두 가지 태도를 말이죠.
오역에 대해서 기자 시절 이한우 선생님만큼 신랄하게 비판을 하신 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학맥과 학풍』에도 부록으로 당시 <신동아>에 쓰셨던 「번역, 제발 제대로 합시다!」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오역의 당사자들을 이니셜로 표기하셨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알 정도라서 실명 비판에 가까운데요. 쉽지 않으셨을 듯합니다.
그게 다 자신이 없으니까 비판을 못 하는 거죠. 괜히 비판했다가 자기도 욕먹을까 봐. 저는‘다음 세대한테 이런 식으로 지적 문화를 넘겨준다는 것은 무엇보다 책임 회피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영어, 독일어 오역만 비판했는데 제가 한문을 벌써 15년쯤 하다 보니깐 완전히 여기는 오역이 물 반 고기 반이에요. 하나만 예를 들면, '其(기)'라는 한자, 우리가 ‘그 기’라고 흔히 말하는. 그런데 '其'가 문장 끝에 오면 추측하는 문장이 되거든요. 그때 '其'는 전부 다 ‘아마도’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공자가 항상 100% 얘기하지 마라, 100%라는 것은 없다, 조심해라, 그래서 ‘무필(毋必)’이라는 말도 했는데 그 말이 문장으로 드러난 게 바로 '其'예요. 공자가 ‘순임금은 효자다’ 이렇게 말하는 것하고 ‘순임금은 아마 효자이셨을 것이다’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게 추측인지도 모르고 문장을 그냥 단정적으로 번역을 해 놔요. 내가 한 사십 중반까지는 이런 일에 막 분기탱천했지만 이제는 내가 번역 한 것이나 잘해놓으면 다음 세대들이 다 알아볼 것이라는 생각으로 묵묵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 같은 경우 학문 저력의 밑바탕에는 아주 탄탄한 번역이 버티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학맥과 학풍』에서 우리 학계의 번역 실태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비중 있게 다루셨고요. 그러면 번역이 학문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데 왜 중요한지, 학문 토대로서의 번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 문명사에 중요한 기본 텍스트들이 일단 다 번역이 되어야 해요. 예전에 제가 학부 다닐 때 ‘영어 발달사’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아주 재밌게 본 게 뭐냐면 우리한테 한문 같은 게 서구인들한테는 라틴어잖아요. 1천 년 가까운 문명이 다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보면 실제로 영국에서 성서가 영어로 번역되고 나서 셰익스피어가 나오거든요.
독일도 독일어로 성서가 번역되고 나서 괴테가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데 우리 조선도 사실은 선조 때 국가 차원에 서 사서삼경을 언문으로 번역했어요. 언해본이 갖는 의미가 뭐냐면 이제 드디어 한글이 경전의 언어가 된 겁니다. 그러고 나서야 송강이 한글로 가사歌辭라는 새 장르를 개척할 수 있었어요. 그게 창의적인 거예요.
지금 세계는 그 어떤 시대보다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 기후 위기, 4차 산업혁명, NFTnon-fungible tokens 등등 우리 인류에게 놓인 길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감을 잡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이러한 급속한 변화 속에서 한국 사회에서 우리 시대 지식인들이 천착해야 할 주요한 의제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조선 시대를 공부해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우리 고질병 중 하나가 내 안의 국수주의라고 생각해요. 젊은 세대들은 세계적인 환경에서 성장해서 그런지 우리 세대들과는 달리 많이 극복한 것 같아요. 글로벌이라는 게 사실 87년 이후에 막 시작된 거잖아요. 우리 세대는 글로벌이 안 됩니다. 토호들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 내버려 두면 자꾸 내향으로 돌아가요. 그러니까 안에서만 싸우는 거예요. 밖으로 나가면 할 일도 많고 자기 인생을 다양하게 펼칠 기회가 있는데도 전부 안에서 서로 지지고 볶고 이런 거잖아요.
좀 더 도전적으로 바꿔서 내 안의 국수주의를 잘 끄집어내어 건강한 방향으로 가져가야 하는 거죠.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아무리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간다 해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기본이 있는 아닙니까. 그 부분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거고 그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자기편 가리지 않고 비판해주지 않으면 개선되지 않습니다. 그런 게 저는 오히려 요새 걱정스러워요.
앞으로의 학문 또는 고전 연구 계획이 궁금합니다.
최근에 『이한우의 태종 이방원』을 출간했고요. 지금은 한나라 때 유향이 쓴 『설원』이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예전에 제가 그 책을 여러 차례 봤는데도 그냥 재밌는 이야기 모음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논어』 내부 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논어』를 새로 발견한 것처럼 유향의 『설원』도 그 구조에 주목해보니 바로 『논어』 해설서더라고요. 아주 최고의 해설서 같아요. 추상적인 말들이 많은데 『논어』를 교차시키면 좋겠다 싶어서 아마 상반기 중에는 그 작업이 끝날 것 같아요. 그 작업까지 기반으로 해서 제가 15년 동안 『논어』 공부를 해온 최종 버전을 『이한우의 논어 강의』라는 형태로 좀 쉽게 풀어내는 책을 내고, 내년에는 『논어』가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제왕학 실전 리더십 책인지 보여주는 작업도 빨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한우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및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뉴스위크 한국판>과 <문화일보>를 거쳐 1994년부터 <조선일보>기자로 일했고 2002~2003년에는 논설위원, 2014~2015년에는 문화부장을 지냈다. 2001년까지는 주로 영어권과 독일어권 철학책을 번역했고, 이후 『조선왕조실록』을 탐색하며 『이한우의 군주열전』(전 6권)을 비롯해 조선사를 조명한 책들을 쓰는 한편, 2012년부터는 『논어로 논어를 풀다』 등 동양 사상의 고전을 규명하고 번역하는 일을 동시에 진행해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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