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애의 그림책 읽는 시간] 『우리의 길』
비록 범민의 말은 기대와 달랐지만 그래도 나는 믿고 있다. 여행 내내 새롭게 시도해 봤기에 이뤄낸 작은 성취들이 범민이 살아갈 삶의 고비 고비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돼 범민을 일으켜 세워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글ㆍ사진 문지애(작가, 방송인)
20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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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_ 이렌 보나시나

이제 여섯 살이 된 아들 범민은 유독 겁이 많다. 집 안 화장실을 갈 때도 엄마나 아빠가 함께여야 하고 볼일을 다 볼 때까지 옆에 있어줘야 마무리가 된다. 동물원에서 원숭이나 새를 볼 때는 한껏 기분이 좋다가도 사자와 호랑이 같은 맹수류를 보러 가자 하면 겁을 먹고 물러선다. 범민의 이런 성격은 새롭거나 위험한 일에 도전하는 걸 꺼려하는 내 기질을 물려받은 탓도 있을 텐데 혹여나 나이 들어까지 이런 성격이 이어진다면 어쩌나 하는 내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나를 비롯한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일 수도 있겠는데 범민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우리 집이다.

유치원에서 돌아왔을 때 친구들이 함께 놀이터에서 놀자고 꼬드겨도 도통 넘어가는 법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한번 집에 들어오면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를 제안해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다른 집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자. 나가자.” 해서 부모가 힘에 부친다고 하는데 우리 집 범민은 “안 나간다. 안 나간다.”를 반복해 하루하루가 고되다. 힘들다기보다는 이래도 괜찮은 건가라는 근심이 커져간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여름휴가는 다르게 가보리라 결심했다. 아들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이제는 좀 달라져야겠다 싶은 마음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지난겨울의 휴가를 떠올려보니 온통 아늑하고 편안한 호텔뿐이었다.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귀찮은 걸 싫어하는 우리 부부와 호텔을 좋아하는 범민의 취향이 결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정말로 어쩌다가 가족 구성원 중 하나가 “부산까지 왔는데 오늘은 좀 나가볼까?”라고 용기 있게 제안하더라도 다른 두 명에 의해 금세 묵살되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부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럴 거면 그냥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머물렀던 게 나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왜 굳이 멀리 부산까지 내려왔을까? 빠르게 커가는 범민을 생각할 때 이제는 변하고 싶었다. 아니, 우리는 변해야만 했다.

여행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우선 숙소부터 달라야 했다. 호텔을 숙박 후보군에서 제외하고 과거 머물렀던 적이 있는 제주의 전통 가옥을 예약했다. 한 시간 만에 훌쩍 제주에 도착하는 비행기도 피하고 싶었다. 우리는 새벽 한 시에 전남 목포에서 출발해 다음 날 아침에 제주에 도착하는 여객선을 타기로 했다. 우리 가족이 쉽게 경험해 보지 않았던 험난한 여정임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2022년 여름휴가는 호캉스가 아닌 모험이 돼야만 했다. 

여행 시작부터 범민의 불만이 쏟아졌다. 서울을 벗어나기 전부터 “대체 언제 도착하냐?”는 질문은 목포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스무 번 넘는 질문 끝에 범민은 체념한 듯 카시트에 몸을 기대 멍을 때렸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범민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침대가 흔들려 엄마?”, “우리 괜찮은 거야?” 괜찮다고, 괜찮다고 몇 번을 진정시킨 후에야 범민은 간신히 잠이 들었다. 잠든 범민의 얼굴에는 ‘대체 이런 여행을 왜 온 거지?’라는 짜증과 근심이 묻어 있었다.

힘들게만 여겨지던 여행의 흐름이 바뀐 건 우연히 지나치게 된 제주의 한 승마장에서였다. 말을 타보겠느냐고 물었지만, 워낙 낯선 걸 싫어하는 범민인지라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범민은 흔쾌히 말을 타보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별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말을 이끌어주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10분 정도 들판에서 말을 탔을 뿐인데 그 전과 후로 범민은 달라져 있었다. 엄마는 무서워서 타지 못한 말을 탔다는 뿌듯함, 용기 있고 강한 사람이 됐다는 자신감이 범민을 휘감고 있었다. 한번 달라진 범민은 두려움 없이 낯선 경험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빠와 함께 바다로 들어가 난생처음으로 파도와 싸웠고, 강풍 속에 흔들리는 해상 케이블카 안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흔들리는 케이블카에서 울었던 건 나다. 우연히 경험한 승마가 범민의 마음에 자신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림책 『우리의 길』은 아이의 성장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주인공 작은 곰은 할머니 곰과 함께 낯선 세상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게 처음이었고 그래서 두려웠지만, 할머니와 함께였기에 작은 곰은 한 발 한 발 나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온전히 믿고 의지했던 할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작은 곰은 두려움에 떨었고 과연 이 낯설고 무서운 여행을 이어 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때 “어서 네 길을 가라.”는 할머니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린다. 작은 곰은 여행을 이어 가기로 결심한다. 예상대로 여행은 낯설고 거칠었지만, 생전에 할머니가 건네준 조언을 따라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는 몰라볼 만큼 성장해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근심과 자신감 사이를 오가던 우리 아들의 여름휴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범민에게도 자신의 길을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는 날이 찾아올 것이다. 힘들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과거 엄마,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과 이야기들을 기억하며 자신 있게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시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오는 길. 남편이 범민에게 물었다. “범민아, 이번 여행에서 어떤 경험이 제일 좋았어?” 우리는 내심 승마나 수영 혹은 케이블카 탑승 같은 답변을 기대했지만, 범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음… 나는 엄마가 편의점에서 사준 장난감이 제일 좋았어!” 여섯 살 아이다운 답변에 우리 가족은 다 같이 크게 웃었다.

비록 범민의 말은 기대와 달랐지만 그래도 나는 믿고 있다. 여행 내내 새롭게 시도해 봤기에 이뤄낸 작은 성취들이 범민이 살아갈 삶의 고비 고비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돼 범민을 일으켜 세워줄 것이라는 걸 말이다.



우리의 길
우리의 길
이렌 보나시나 글그림 | 박선주 역
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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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작가, 방송인)

방송을 하고 글을 쓰며 애TV그림책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