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한 시각 예술가의 작가 노트. 표지 아래에는 문장 하나가 숨겨 있었는데 "당신은 당신을 좋아하나요?"라는 물음이었다. 작가 박혜수는 "직선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7쪽) 사람이고 궁금한 것을 못 참는다. 그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묻는다. "너는 네가 좋으니?"(8쪽) 이 책은 예술서이면서 에세이이고 작가 노트이면서 르포르타주다. 알아듣는 예술을 만나고 싶은 독자에게 작가는 묻는다. 그동안 우리가 듣지 못했던 질문을.
미술관의 턱을 낮추려면
시각 예술가의 작가 노트입니다. 북디자이너께서 책을 만들 때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감사하게도 제 그동안의 작업을 아는 분이셨어요. 작품을 재밌게 보셨구나,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져서 신뢰가 갔어요. 책 자체는 조금 쨍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그동안 저는 독립 출판만 해온 사람이라서 기성 출판물을 내는 건 처음이에요. 가급적이면 이쪽 논리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싶었어요.
보라색 컬러가 강렬해요.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컬러를 정해요. <보통의 정의>를 작업할 때는 초록색이었고,
예술가의 작가 노트가 단행본으로 묶이는 일이 아주 흔한 일은 아니에요. 편집자의 제안이었나요?
네, 편집자분이 전시장에 오셔서 제안해 주셨어요. 저는 작품을 만들기 전에 설문이나 취재를 하고 작업하는 스타일이라서 항상 기록을 하는 편이에요. 작가 노트를 먼저 쓰고 작업해요. 안 그러면 생각이 얽혀서 작업이 산만해져요. 10년 전에 비슷한 책을 낸 적이 있어요. 일기 같은 글이었는데 독립 출판으로 만들었죠.
서문을 읽고 조금 당황했어요. 기분 좋은 놀라움이었는데요. 예술가의 작가 노트이니 심오한 작품 세계관이 서술되어 있을 것을 예상했는데 확연하게 다른 글이었어요. 이를 테면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좋은 작업이 아닐진대, 아직도 예술계에선 이해가 쉽다고 여겨지는 작품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미사여구들이 잔뜩 붙은, 몇 번을 봐도 나의 무식만 절감하는 작품들이 관객과 예술의 거리를 멀게 한다.(9쪽)"는 문장이요. 읽는데 되게 통쾌했어요.
원래 이 글은 프롤로그로 썼던 글은 아니었어요. 써놓고 나서 나중에 프롤로그로 갖다 놓은 거예요. 사실 제가 30대, 40대 초반이었으면 이런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20년차고 중견으로 넘어갔으니까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보통 전시장에서 작품을 선보이게 되면 큐레이터분이 작가들에게 작가 노트를 달라고 해요. 어떤 생각으로 만든 작업인지를 보려고 하는 건데, 저는 작가 노트를 꽤 꼼꼼하게 쓰는 편이에요. 작품 설명은 안 해요. 굳이 제가 할 이유는 없어요. 다만 제가 어떤 동기로 이 작업을 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요. 동시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문턱이 높은 것 같아요. 전시회에 가서 작품을 보고 싶지만 작품 설명을 읽으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아요. 꼭 이렇게 추상적으로 표현해야만 할까, 싶기도 하고요.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시각 예술계 쪽의 언어가 좀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쉽게 읽히면 마치 급이 낮은 걸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 영화감독들의 언어를 봐도 어렵지가 않아요. 미학적인 장식이 있어야만 고급스러운 예술이 아니에요. 현대 미술을 보러 온 관객이 "뭔가 뭔지 모르겠다", "내가 무식해서 그래"라는 말을 하는 게, 궁극적으로 작가들에게도 좋을 게 전혀 없어요. 예술가들이 미술관 안에서만 살 게 아니잖아요. 여전히 예술가들은 사회로 나가면 약자이고요. 미술관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지만 우리는 사회 안에서 살죠. 우리나라에 미술관은 몇 개 되지 않고 이 공간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폭이 넓지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의 언어가 좀 쉬워져야죠.
작품과 관객의 틈에 작가는 없다
현재 전시 중인 개인전 <박혜수 : 모노포비아-외로움 공포증>을 서울 독산동에 있는 아트센터 예술의시간에서 열리고 있어요. 원래는 공장 기숙사로 사용됐던 공간이죠? 실제 미술관 옆에는 여전히 공장이 있고요. 이 공간을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마칠 무렵 제안을 받았어요. 그땐 완전 새로운 공간이었죠. 분위기가 너무 세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더라고요. 그런데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공간이었어요. 우리나라 산업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데다 바로 옆에는 공장 노동자분들이 일하고 계시니까요. 어떤 작업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공업사 사장님들을 떠올렸어요. 제가 조각, 설치를 많이 하니까 아는 공업사 사장님들이 있거든요. 작업하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에 대해 사장님께 물어보기도 하고요. 그런데 20년 동안 똑같은 표정으로 일하는 모습을 봐왔는데, 어느 날 새로운 얼굴을 봤어요. 한번도 저런 표정을 지으신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었을까? 궁금해졌어요. 그리고 또 생각했죠. 나도 매일 기계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면 하나의 표정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고요.
그래서 중년 공장 노동자들에게 "첫사랑을 떠올려보라"고 하셨군요.
항상 그분들에게 따라붙었던 '노동자'라는 단어를 빼고, 개인의 삶이 어땠는지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옛 구로 공단 지역인 금천구 일대의 노동자 20여 명을 만나 "첫사랑이 기억나시냐?"고 물었어요. 처음엔 쑥스러워 하셨는데 금세 활짝 웃으셨어요. 그렇게 영상 작품 <기쁜 우리 젊은 날>이 제작됐고요.
「사랑과 실연의 얼굴」 챕터에 소개된 작품이죠? 큰 화면으로 영상을 보는데 먹먹해지는 마음이 들면서 되게 큰 감정이 올라오더라고요. 인터뷰하시는 분들의 표정이 너무 살아 있어서요. 그리고 느껴지더라고요.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건, 이 공간 때문이겠구나, 싶었어요. 작가님은 오래 전부터 시간, 꿈, 인간의 감정 등 보편적인 주제로 작업을 이어 오셨어요. 10년 전만해도 이런 작업을 전시회에서 보긴 힘들었는데요.
실제로 '사랑'이라는 주제로 지원금 심사를 받으러 가면 떨어졌었어요. "왜 우리가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미술관에서 같이 봐야 하냐"는 이야기를 들었죠. 그때가 아마 5년 전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뉴노멀을 말하는 시대가 됐잖아요. 예전에는 보통의 것은 소재가 안 됐지만, 지금은 아니죠. 보통의 이야기가 가치가 있다는 걸, 이제는 사람들이 알아서 다행이에요.
이번 전시에도 '토론 극장'이 열리지요? 작품을 만드실 때 인터뷰, 취재를 중심으로 출발하는 것을 비롯해 관객들의 참여를 많이 이끄시는 듯합니다.
관객과의 대화 같은 행사를 종종 하는 편이라, 관객들을 만나는 기회가 적지 않은 편인데요. 제가 특별한 사건을 다루는 작가가 아니고 굉장히 보편적인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관객들에게 질문을 자주 해요. 물어보면 사람들은 알아들어요. 답하기는 어렵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거든요.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질문을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면 되는데, 그 사이에 작가가 어떤 특정 시각을 보여주거나 답을 내놓으면 관객들은 이것에만 관심을 가져요. 전시장에 가면 관객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작가님은 어떠시냐?"고. 그런데 저와 작품과의 관계는 관객들이 들어올 틈이 없어요. 마찬가지로 작품과 관객의 틈도 제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게 맞고요. 그런데 자꾸 관객들은 작품을 건너뛰고 작가에게 들어가려고 해요. 보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작품과 관객이죠.
책 속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궁금해서 던지는 질문은 기분을 나쁘게 하지도, 사악하지도 않다.(10쪽)" 작가님이 관객들께 하셨던 질문을 드려 볼게요. 10대의 나, 80대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좀 비슷해요. 10대의 나에게는 "내가 옳았다." 제가 만화방에 자주 가서 부모님께는 혼났지만 그때 많은 상상력을 키웠거든요. 그게 아니었으면 어린 시절은 너무 재미가 없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80대의 나에게는 "내 생각만 옳지는 않다." 나이가 들면 고집이 세지니까요.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내려놓을 건 놓아야죠.
*박혜수 조각·설치 미술가이자 기획자, 작가로 활동 중인 시각 예술가. 『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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