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 수요일, <채널예스>에서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는 검찰청에서 사람을 부르면 안 됩니다."
상주지청에 발령받은 직후 새로 만난 상주의 어른들은 모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주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이 말부터 했다. 이유인 즉 그 시기가 바로 감을 따고 깎아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래, 어느 지역이나 그 지역만의 특색이 있고 특히 바쁜 시기가 있지. 그런데 아직, 감이 익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새로 부임해온 지청장을 보자마자 이들은 어째서 감 따는 이야기부터 하는 것일까. 무언가 범상치 않은 질서가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게 얼마나 본격적인 것인지 깨닫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상주IC를 통과하자마자 압도적인 규모로 서 있는 상주곶감유통센터 건물과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는 세련된 간판의 곶감 매장들, 농가 지붕 위에서도 모텔 주차장 입구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되는 '곶감 상시 판매', 아무런 설명 없이 '감 박피기'라고만 쓰여 있는 도로변 입간판 같은 것들이 이곳이 곶감의 도시 상주라는 사실을 알려주지만, 그것만으로 이 도시를 설명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다.
곶감의 존재감은 이 도시 사람들의 생활 속 깊숙이 예상하지 못한 곳까지 뻗어 있다. 일례로 우리 청 옆에 있는 아주 큰 유치원의 이름은 상주감꽃유치원이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을 테마로 한 곶감공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집집마다 감나무 한 그루 쯤 있는 것은 물론이고 도시의 가로수조차 감나무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곶감 생산량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명실상부 곶감시티로서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부분 아닌가 하겠지만, 그중에 '가요주점 곶감회관' 앞에 이르면 이들의 곶감 사랑이 이렇게까지 진심이라는 점에 누구라도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간판은 곶감을 연상시키는 주황색의 단아한 글씨체로 무엇이 문제냐는 듯 걸려 있다. 그래 문제될 건 없지. 그런데 어쩐지 곶감이 안주로 나올 것 같은 곶감회관에서는 다소 꾸덕하게 마른 상태로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지 않은가. 홍시처럼 질펀하게 퍼지면 안 될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모르지. 그 반건조의 꾸덕한 유흥 속에서 더욱 찰지게 차오르는 궁극의 스윗함을 상주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일지도...
상주에서 곶감을 만드는데 쓰는 감은 '둥시'라고 불리는 둥근 모양의 떫은 감이다. 곶감은 감을 껍질을 깎아 말리면 수분이 날아가 저장성이 강해지고, 떫은맛은 단맛으로 변하는 원리로 만들어진다. 일교차가 큰 상주의 햇살과 바람이 곶감을 만들기에 적합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곶감을 깎고 말리며 살았다. 떫은 것을 말리면 단 것이 된다는 지혜를 일찍이 알게 된 사람들, 이곳에서는 하얗게 분이 핀 곶감이 꽃이고 돈이고 양식이었다.
상주시 외남면에 가면 감나무의 시초라고 불리는 750년 된 감나무가 있다. 하늘아래 첫 감나무라는 표지석 뒤에 있는 그 할머니 나무는 가지마다 쓰러지지 않게 대어 놓은 부목에 의지하고 간신히 서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찾아가 봤더니 할머니 나무 가지마다 새순이 돋고 있었다. 그렇다면 감도 열릴까? 750년씩이나 한자리에서 서서 잎을 틔우고 꽃을 내고 감 열매를 여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면 절로 꾸벅 고개가 숙여진다. 750살 왕할머니 나무 아래로 펼쳐진 감 농장들에서는 이제 고작 몇 십 년씩 된 애송이 감나무들이 일제히 감을 생산하고 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사람들이 감을 따고 깎아 말릴 것이다. 주렴처럼 빽빽하게 매달린 주황색의 감 건조 장면은 가히 장관이어서, 가을이 되면 전국의 사진사들이 대포 카메라를 들고 몰려든다고 한다. 그 장면을 내내 보고 있었을 할머니 감나무는 흐뭇할까 고단할까.
"10월 말, 감 수확철 동안에는 사람을 부르지 말아주세요. 그 시기 상주에서는 손 달린 사람은 모두 감을 깎아야 합니다. 심지어 양로원에 누워 있던 할머니들까지 모두 나와서 감을 깎습니다."
다시 한 번 상주의 유구한 전통에 대해 알려준다는 듯이 엄숙하면서도 어딘가 자부심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말하는 그에게 외지에서 온 풋내기 검사가 천진하게 묻는다.
"꼭 그때여야 합니까?"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단호하게 말한다.
"네, 그때입니다. 그때가 지나면 감이 물러져 버리거든요."
감이 물러지게 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세계에서는 사람의 어떤 사정도 물러지는 감의 사정보다 중하거나 다급하지 않다. 떫은 둥시가 한 알의 곶감이 되기까지 놓쳐서는 안 될 절묘한 타이밍, 그 시기를 중심으로 상주의 한해는 돌아가고 이 도시의 사람들은 감이 익는 속도에 생활의 속도를 맞춘다.
과장만은 아닌 것이 그 시기에는 아무리 소환장을 보내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상주지청에서 먼저 근무하던 직원들은 말했다. 그래서 어느 해에는 감 수확철에 맞춰 야간 검찰청을 운영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낮에는 감을 깎다가 밤에 검찰청에 와서 조사를 받는 삶은 너무 고단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 시기의 이전과 이후에 일을 모두 해두고, 감 따는 사람들을 최대한 부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감의 시절에는 오로지 감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것이 무릇 곶감 시티에 검사된 자의 도리 아니겠는가.
곶감의 도시에 대해 이제 제법 아는 체를 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감이 곶감이 되어가는 과정 전체를 지켜보지 못했다. 이제 막 새 잎에 돋기 시작한 감나무 아래를 걸어 출퇴근할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 앞으로 함께 할 곶감의 시절이 오롯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제 곧 나무들에 감꽃이 필 것이다. 감꽃유치원 마당 앞에서 감꽃을 주우며 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겠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초록의 열매가 자라고 상주의 햇살 아래 익어가는 것을 매일 조금씩 지켜볼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때가 왔을 때, 감의 시간에 집중하는 상주 사람들의 삶 옆에 조용히 있어야지. 할 수 있다면 서툰 솜씨로 감도 몇 알 깎아 봐야지. 그 다음으로는 차게 식은 가을바람 아래 장엄하게 매달려 말라가는 곶감들을 보게 될 테다. 1년 곶감 농사에 두둑해진 주머니로 가요주점 곶감회관을 방문하는 누군가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곶감의 도시에 와서 한 시절 감과 곶감의 생애 옆에 있다 보면 검사 인간의 몸에 밴 떫은맛도 쫄깃한 단맛으로 변할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문득 군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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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원(대구지방검찰청 상주지청 검사(지청장))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썼다.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가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