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첫 소설, 응원하고 싶은 한 걸음, 『큔, 아름다운 곡선』은 신인 작가의 첫 책을 소개하는 시리즈 <자이언트 스텝>의 시작을 여는 작품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한 작가의 탄생을 지켜보고, 흥미진진한 여정의 첫 순간을 함께하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1999년 소니(SONY)가 일본에서 판매한 강아지 로봇 '아이보' 이용자들의 이야기로부터 촉발되었다. 그저 기계일 뿐인 아이보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 말이다. 김규림은 "언젠가 인간형 안드로이드가 나온다면 사람들은 아이보 이용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드로이드를 대할까?"(작가의 말)라는 물음을 던지며,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완성해냈다.
눈을 감은 남자의 목 옆선에서 푸른 불빛이 고요하게 깜빡였다.
나는 그의 곁에 모로 누워 깜빡이는 빛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야기는, 작동 시간이 고작 한 시간 남짓 남은 안드로이드 큔과 그를 애타게 바라보는 그의 호스트 제이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문득 작가님께도 그런 대상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생명체로 규정되진 않으나, 함께 시간을 쌓아오며 정이 듬뿍 들었던, 하지만 결국 낡고 닳아버려서 끝을 앞둔 물건이요. 만약 있다면, 어떻게 헤어지셨나요?
김빠지는 대답일 수 있지만 저는 물건을 아주 잘 버리기도 하고, 잘 잃어버리기도 하는 사람이에요.(하하) 물건에 대해서라면 저는 특별한 애착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책 정도가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처분하는 정도랄까요. 그래서 물건을 오래 잘 간직하는 사람들을 보면 약간의 존경심을 느껴요. 물건에 얽힌 추억을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도 들고요. 저한테 없는 면이라 부럽더라고요.
그런데 만약에 의식을 가진 물건이라면 다를 것 같아요.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만의 세계를 엿볼 수 있거나 개성 있는 태도를 취하는 물건이 있다면 조금 다르게 대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챗GPT에 열광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챗GPT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열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인간과 비슷한 사고의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데 놀라는 거거든요. '인간 같다'라는 점에요. 만약에 그런 식으로 사고할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저는 버리지 못할 것 같아요. 특히 그 물건이 저를 기억한다면 더더욱이요.
상처를 받으면 인간의 마음은 한껏 위축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자신만의 영역으로 파고들어요. 제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얼핏 유능하고 당당해 보이지만, 외로운데도 외로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래서 가시 돋친 차가운 말로 주위를 밀어내기 바쁜 사람 같다고요. 그런데 누구도 열지 못한 이 마음의 문을 인간형 안드로이드 큔이 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염두에 두고 소설 속에 마련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을까요?
최근에 극단적인 선택을 SNS로 알리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대부분 유명인들이거든요.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릴 것 같고, 분명 심리 치료도 받았을 것 같은 사람이요. SNS가 발달해 사람들이 매 순간 연결되고 수준 높은 심리 상담을 받아도,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과 우울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이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고 방어적이거든요. 외로움과 고독이 디폴트값인 사람이요. 그런데 어쩌면 '큔'이 사람이 아니라서 말로 털어놓기 불편한 감정도 더 쉽게 털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주 솔직하게요.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시점인, 205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안드로이드 제작 기업인 '샴하트'가 개최한 신제품 발표회나, 인간형 안드로이드 반대 단체인 오비시디(OHBCD: Only Human Beings Can DO)의 테러 장면 등을 보며 SF 소설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바라본다는 것이란 이런 것이구나, 깨달았어요. SF 소설을 즐겨 읽고 또 좋아하시나요? 처음 쓰는 이야기로 SF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마니아 수준은 아니지만 SF영화를 좋아해요. 새로운 SF영화가 나온다고 하면 꼭 챙겨보는 편이고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들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중 <인셉션>을 가장 좋아해요. 꿈이라는 소재를 좋아하는데, <인셉션>은 꿈을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스토리텔링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를 인상 깊게 보고 테드 창이라는 작가를 알게 됐고요. 영화를 통해서 SF라는 장르의 매력에 빠진 것 같아요. SF 소재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넷플릭스의 <블랙미러> 시리즈를 보면서예요. 소재 대부분이 근미래의 일상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다루고 있거든요.
SF가 우주 비행선이나 외계인 등 거창한 소재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SF 소설을 쓰면서 느낀 건, 이야기에 제약이 없다는 거예요. 지금 당장 현실에선 볼 수 없을지라도, SF 장르이기 때문에 허용되는 것들을 상상하는 게 굉장히 신나고 생각의 범위를 증폭시켜요. SF 작가들은 현재의 어떤 현상을 자신만의 배양실에서 최악의 상태로 배양시킨 뒤 미래의 결과로 그려내는데요. 오비시디는 제 배양실의 결과물이에요. 저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혐오'가 만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오비시디를 통해 혐오의 일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소설 안에 활용된 『길가메시 서사시』 덕분에, SF의 세계가 무척 환상적인 색채를 띠며 한층 확장되었다고 생각해요.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제작하는 기업 '샴하트'라는 이름은 야생 짐승에 가까운 존재 엔키두를 인간으로 탈바꿈시켜낸 사제 샴하트로부터 온 것이고, 큔을 깨우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 제이는 영생을 얻으러 길을 떠나는 길가메시와 연결되죠. 여러 신화 중 『길가메시 서사시』를 활용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작가님께 이 신화가 특별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요.
『큔, 아름다운 곡선』의 원형은 원래 A5 15매 정도의 짧은 단편 소설이었어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여자 직장인이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갖기 위해 사전 예약 당일 '광클'하는 얘기로 시작해요. 지금의 주인공과 완전히 다르지만 대략적인 얼개는 현재 작품과 같아요. 그런데 다 쓴 후에도 내내 좌불안석이었어요. 무언가 덜 쓴 이야기처럼 느껴졌거든요. 무엇보다 신화를 추가하고 싶었어요. 의식을 지닌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글을 쓰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그 관계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닮았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그리스 로마 신화』인데 저는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집에 있던 채사장님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를 들춰봤는데 여기에 『길가메시 서사시』가 있었어요. '인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고요. '길가메시'라는 폭군을 통제하기 위해 신들이 '엔키두'라는 야수를 만들어 지상에 내려보냈는데, 둘은 너무나 사랑하는 관계가 된 거예요. 인간의 짝으로서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와 그를 사랑하게 된 인간, 그리고 영생을 얻기 위한 모험. 여러 면에서 제 이야기와 매치되는 측면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길가메시 서사시』의 요소를 넣어서 이야기를 재구성하게 된 거예요. 『길가메시 서사시』가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독자분들에게 너무 어렵지 않을까 걱정은 했지만, 더 풍성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로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큔, 아름다운 곡선』이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사회적인 고독을 깊게 바라보고 너르게 껴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어느 때보다 인간은 고립되어 있으면서, 사랑이나 관계를 편협하게 정의 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게 꼭 인간이 아니어도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두 존재는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해요.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요. 작가님께 사랑은 무엇인가요?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이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는 사랑이에요.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나를 바꿀 수 있는 건 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허황된 거더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나아지려면 자신의 얘기를 듣고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서 관계의 균열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상대를 바꾸려는 자의 집착과 나를 고수하려는 자의 저항이 부딪히면서요. 사랑한다는 건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일 같아요. 물론 저도 그러기가 쉽지 않죠. 궁극적으로는 그런 성숙한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규림 2023년 『큔, 아름다운 곡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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