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교수
가장 맛있는 식사는 진수성찬이 아니라 배가 고플 때 먹는 음식인 것처럼 인생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작은 일이었지 않은가? 목에 걸리는 것은 큰 소의 뼈가 아니라 작은 생선의 가시인 것처럼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결정하는 것은 큰 무언가가 아니라 작은 무언가였지 않은가? 커다란 바윗돌을 부수는 것은 망치가 아니라 물방울이듯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지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가 펴낸 『마음의 지혜』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관점을, 주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도 몰랐던 나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만든다.
많은 이들이 삶이 힘겨울 때 심리학을 떠올립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의 마음은 아리송합니다. 대체 어디서 불어왔는지 알 수도 없는 욕망의 파도에 휩싸여 허우적거리기 일쑤지요. 심리학자란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입증하고, 연구하고 분석해서 수치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문제를 풀어줄 대단한 해답지는 없을지 모르지만 심리학자들이 정리해 온 무수한 데이터 속에 막막한 고민을 덜어줄 실마리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세상 아래 새로운 고민은 없고, 우리의 고민은 이전 세대의 누군가가 해온 고민의 되풀이일 뿐입니다. 결국, 심리학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마음의 내비게이션 역할이 되어주는 것이지요.
요즘 MBTI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인지 심리학자로서 MBTI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 MBTI는 ISTJ입니다. 앞자리가 I니 내향적이라는 뜻인데, 제가 제 MBTI를 밝히면 십중팔구 '거짓말하지 마라'는 핀잔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MBTI 검사뿐 아니라 학술적으로 사용하는 다른 성격 검사를 해봐도 저는 굉장히 내향적인 사람으로 나옵니다. 심지어 어떤 교수님들은 '김 교수가 내향형으로 나오다니 우리가 성격 검사지를 잘못 만들었구만'라고 농담까지 하시죠. 그런데 저는 그런 반응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회생활을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는 뜻으로 들리니까요. 그래서 저는 MBTI를 이렇게 정의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난 3~4년 간 내가 어떤 사회적 얼굴로 살아왔는지 비추는 거울이라고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동안의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었고, 주변인들도 좋게 평가했다면 나를 표현하는 네 개의 알파벳 카드를 적절히 사용한 것이겠지요. 반대로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카드를 잘못 골라 썼다는 뜻이고요. 그땐 카드를 한번 뒤집어보세요. 다른 사회적 얼굴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면 새로운 삶이 펼쳐질 테니까요.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일상 속에서 행복을 끌어올리기 위한 좋은 실천법이 있을까요?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 읽어보셨나요? <난중일기>를 본 독자들의 솔직한 반응은 '이게 뭐야?'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숭고하고도 장엄한 기록이 페이지마다 가득 차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 안에는 '오늘 날씨가 좋았다', '저녁에 뭘 먹었다', '누구와 농을 주고받았다'와 같은 사소하기 짝이 없는 한두 줄의 기록이 대부분이니까요. 그런데 이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이순신 장군이 어떤 난관이 있을 때 습관처럼 작지만 소소한 기쁨을 주는 행동을 하고 그다음 날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는 패턴이 보입니다.
이처럼 우리 일상도 잘 살펴보면 맛있는 음식, 잠깐의 수다 같은 아주 자그마한 일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난중일기>처럼 기록해두지 않으니 당장 힘들 때 꺼내먹을 행복을 찾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불안과 우울과 고통에서 나를 끌어올린 아주 사소한 행복의 기억을 최대한 많이 기록해두세요. 사소한 식사, 소소한 수다, 기분 좋아지는 장난 같은 아주 작은 행복의 기록이 얽히고설켜 시련을 이겨내는 강인한 근력을 만들어줄 테니까요.
많은 직장인들, 학생, 그리고 주부들까지 번아웃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번아웃이 찾아오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번아웃 증후군은 일을 많이 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그 일만 해서 오는 거죠. 가끔 엉덩이도 들썩여줘야 하고 고개도 돌려줘야 합니다. 소위 딴짓을 해보는 건데요. 가장 저렴하면서도 효과가 큰 딴짓이 바로 공부입니다. 단, 내 직업이나 생계와는 전혀 상관없는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저도 몇 년 전 슬럼프가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시점에 붓글씨와 한자 공부에 도전했습니다. 유튜브를 보며 조금씩 연습하다 보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더라고요. 바로 '성장감'이었는데요. 지금 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번아웃이 찾아오면 바로 이 성장감을 다른 곳에서 꿔와야 하는 거죠. 행복의 한 종류인 성장감이 우리를 번아웃에서 구하는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책 제목이 『마음의 지혜』인데요. 건강한 마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지혜 한가지만 알려주신다면요.
저를 만나러 오신 분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고 물으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이 인간관계예요. 우리는 대부분 어른이 되면서 인간관계를 줄여갑니다.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일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짜 어른이라면 직장과 가정을 살짝 벗어난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을 느슨하게 만나는 게 좋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느슨하다는 거예요. 너무 깊게 만나면 일과 가정에 소홀해지니까요. 이렇게 느슨한 관계를 경험하다 보면 나와 내 관계에 대한 존중감이 생기고 내 사람들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 느슨한 관계를 최대한 다양하게 많이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소통'일 텐데요. 상대를 존중하고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대화법이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대화에서 칭찬을 어려워하는데요. 칭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능과 노력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왜 게임을 좋아하는지 아시나요? 페어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일곱 시간 게임을 한 사람을 한 시간 한 사람이 이기기는 어렵거든요. 과거에는 제일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승리자가 되었지만, 이제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들을 상대로 강의할 때마다 아이에게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최대한 자제하라고 조언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노력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없는 칭찬은 오히려 열심히 한 사람에게 모멸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노력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것이 좋은 소통을 이끄는 첫 번째 대화 습관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교수님은 행복하십니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저 어제도 정말 행복했습니다. 어제 친한 친구 녀석 만나서 오징어회를 먹었거든요. 내친김에 멍게도 먹고 소라도 먹고, 소주도 한 병 했습니다. 행복은 크기보다 빈도가 중요하다는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1년에 100점짜리 커다란 행복 하나를 경험하는 것보다 10점짜리 행복 열 개를 경험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거죠.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걸 먹는 게 나의 행복이야'라고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1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는 게 나의 행복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생존 확률이 높아집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제가 오징어회를 먹고,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학생이 칭찬을 받는 순간. 머릿속 뇌가 '아! 나 지금 행복해'라고 느끼는 순간은 거대한 성취가 아닌 작고 소소한 경험이에요. 그러니 오늘 저녁만큼은 소중한 사람과 맛있는 식사를 나눠 드시길 바랍니다.
*김경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인지 심리학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 심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트 마크먼 교수의 지도하에 인간의 판단, 의사 결정, 문제 해결, 그리고 창의성에 관해 연구했으며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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