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섬별 칼럼]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몽땅 ①
이 삶을 계속 같이 살자 ⑤ : 펫 로스와 게이 베스트 프렌드 로스 사이에서.
글 : 송섬별
20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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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나는 이 모든 글에 ‘트리거 워닝’을 붙일 것이다. 고통을 주는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또는 민감한 이야기를 읽을 가능성을 애초에 피할 수 있는 선택지를 주기 위해서. 


나는 내가 고양이와 친구의 죽음을 소재로 쓰는 글 한 편 한 편에 경고 문구를 넣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나는 나의 어떤 말이 남의 약한 곳을 건드릴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아닌지, 가려낼 수 없다. 

 

 


올리버는 마지막으로 낯선 병원을 찾는다. 수의사는, 친절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했다. 죽어가는 고양이에 대한 ‘공격적 치료’라는 말은 어떤 어휘집에 들어 있는 걸까. 올리버가 마지막 검사를 받는 동안에, 그러니까 내가 고양이가 또 한 번의 공격적 치료를 받게 내버려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 핸드폰 볼륨을 최대로 높여 두고 기다리는 것과,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는 동안에, 어차피 수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카테터를 뗐다 붙였다, 헐어 버린 혈관에 주사 침을 꽂았다 뺐다 하는 것이 전부라는 것을 사실은 알고 있는 동안에, 나는 밤의 동물병원 응급실 대기실에 앉아 있다. 그때, 동물병원에서 기르는 흰 고양이 한 마리가 내게 다가온다. 

 

나한테 방아쇠를 당긴 일을 굳이 꼽자면, 고양이다운 호기심 가득한 말간 얼굴로 내게 다가와 뺨으로 내 발목을 건드린 그 희고 통통하고 건강한 고양이의 있음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지친 나머지 내가 세상 모든 걸 미워하는 사람으로 변한 걸 모르고 있었으나, 흰 고양이는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준다. 고양이가 내게 총을 겨눈 셈이다. 골골 목을 울리며 방아쇠를 당긴다. 강력하게 부정적인 감정들이 솟구친다. 모든 걸 단숨에 끝내 버리는 그런 슬픔이 아니라 사실은 이 모든 게 농담이었다는 듯이, 결정적인 순간 총구에서 총알 대신 쏘아져 나온 컨페티가 쏟아져 눈앞을 온통 반짝거리게 만들고, 아무리 주워내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옷장 밑에, 책장 사이에, 겨울 코트에 붙어 있다가 발견되어 또다시 떠올리게 될 아주 더러운 기분이다. 


멍하니 한 손을 들어 올려 머리카락에 뒤엉킨 길고 가느다란 색종이 조각을 집어낸다. 그건 한동안 내가 미안한 기색도 없이 길을 돌아다니는 건강한 동물들을 볼 때마다 미움에 사로잡히리라는 예감이다. 서로를 잃지 않은 채 성공적으로 함께 늙은 퀴어 친구들의 모임을 볼 때마다 환한 감정 뒤에 분명 그림자가 뒤따를 것이라는 계시다. 


죽음은 곁에 있다가 남겨진 사람에게 총을 쏜다. 그 총을 맞으면 살아 있는 사람들로만 둘러싸인 사람을 이해하기 싫어진다.


색종이 무더기에 뒤덮인 채로 나는 생각한다.


내가 고통스러워해도 되나?


나는 죽지도 않았는데. 

 


 

먼저 부끄러움이 찾아온다.


폴이 죽고 난 직후에 나는 자주 우울하고, 평소만큼 기운이 없고, 돌발적으로 기운이 날 때마다, 돌발적으로 이상한 행동들을 한다. 물건을 사들이고 또 버린다. 나는 아이돌 콘서트 티켓을 한 장 가지고 있다. 표를 구하느라 고생했고, 구한 뒤에는 폴에게 자랑했던 티켓이다. 콘서트가 열리는 당일에 나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버린다. 함께 그곳에 가기로 한 친구가 엎드린 나를 일으켜 택시에 태운다. 왜냐하면 친구는 내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니까.


덕분에 나는 고척스카이돔에 앉아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기다렸던 콘서트는 과연 즐겁다. 기분이 밝아지는 것 같다. 오길 잘했다. 그런데 동시에 부끄럽다. 왜냐하면 내가 누군가를 향해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변명하는 것 같아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죽은 사람은 죽은 채 내버려둔다. 나는 폴의 죽음에 담긴 묘한 세부 사항에 관해 깊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그가 죽기 전 무슨 결심을 했고,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모르기로 한다. 


당연한 수순으로 D와 나는 점점 대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매일, 각자 폴의 죽음으로 뭉친 작은 눈덩이를 서로에게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걔는 왜 그랬을까-우리로는 충분하지 않았나-우리가 폴의 불행을 덜어주지 못했나-걔는 왜 유서에 우리 이름을 안 썼을까-우리가 걔한테 그 정도도 안 되는 사람이었나…


거기까지 이야기한 다음에는 또다시 서로를 독려한다.


아니야, 폴은 네가 있어서 그나마 덜 외로웠을 거야. 


만약 처음부터 네가 없었다면. 


 

 

그러나 우리로는 충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끝끝내 나를 더 외롭게 만든다. 어쩌면 그에게는 친구가 아닌 연인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친구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폴이 원한 건 우리가 아닌 다른 가족이었는지도 모른다. 폴은 이 불만족을 영원히 해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는 게 낫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은 폴만큼이나 살아남은 우리가 걱정된다.


눈덩이는 주고받을 때마다 불어난다. 너무 무거워서, 차가워서, 견딜 수 없는 날도 있다. D의 고통이 계속 커지자, 나는 폴이 죽고 난 뒤 우리도 곧 죽어버린다면 모두가 폴을 미워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너는 그것을 견딜 수 있느냐고, 나는 아니라고. 


나는 눈덩이에 또 한 번 깔려 죽고 싶지 않은 나머지 친구를 협박하는 사람이 됐다. 



 

나는 폴도, D도 없는 곳에 남겨지고, 계속해서 이상한 행동들을 하며 지낸다. 친구들은 나를 이해한다. 곁에 있어 준다. 그러나 이 큰 세상에서 내 친구들은 극소수다. 


내 말과 행동에 겁을 먹은 사람들에게 나는 ‘친구가 죽어서요’라고 변명한다. 그다음에는 ‘매일 만나다시피 할 만큼 친한 친구’라는 정보를 덧붙인다. 그러지 않으면, 친구가 죽고 난 뒤에도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왜 나만 그러지 못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그것조차 통하지 않을 때 나는 다 포기한 심정으로 그가 ‘퀴어 친구’ 였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더 이상 나와 내 상실을 이해받고 싶은 간절함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아예 차단막을 내려버리는 제스처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래, 너희 세계의 사람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친구들 사이에 기대되지 않는 정도의 아주 특수한 공의존 관계가 형성되어 있나 보구나, 그러나 그것은 내가 모르는 문제이지 정중하게 말을 아끼자, 생각하며 한 발 물러서게 만들기 위한 공격이다. 차단막 너머에서 ‘뭘 저렇게까지’ 중얼거리며 눈을 굴리건 말건,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고양이의 죽음에 따라온 나의 기능장애 역시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쪽은 부끄러움을 덜 유발한다. ‘펫로스’라는 단어가 이미 있기 때문이다. 단어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다수가 공유하는 공공연한 감정이고, 그러므로 인정받기 충분하며, 중요하게 취급받을 만하며, 우리 모두 이 감정의 해소를 돕기 위해 애쓴다는 뜻이다. 나는 펫로스 상담을 받으러 간다. 내가 펫로스로 힘들어하는 중임을 공표한다. 펫로스를 겪거나 앞둔 수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는다.


‘게이 베스트 프렌드 로스’ 같은 말이 있었더라면 나는 덜 부끄러웠을까? ‘대안적 가족 후보의 죽음이 불러온 상실감’, ‘자살 직전의 친구와 절교한 죄책감’, ‘마땅히 이 죽음을 공유하고 서로 위로해야 할 공통의 친구들을 향해 느끼는 공격적인 불안감’, 그리고 ‘오로지 이 순간에만 적용할 수 있는 너무 깊은 외로움’을 나타내는 말들이 어휘집에 있었다면 누군가 우리를 도울 수 있었을까? 


 

 

하필이면 폴의 발인 날, 나는 가야 할 공적인 자리가 있다. 떳떳하며 일반적이며 책임감 있는 어른이라면 개인적인 핑계를 대지 않고 참석해야 하는 자리다. 각종 ‘상실감’ 또는 ‘펫로스’가 통하지 않을 것처럼 생긴 곳이지만 나는 친구의 장지에 따라가기를 택한다. 죄 지은 사람처럼 양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드디어 그 말을 한다. 


‘가족도 아닌데.’ (뭘 이렇게까지.)



 

나는 대처하기를 그만둔다. 그냥 울음을 터뜨린다. 어린애처럼 발을 구르고 팔을 휘저으며 아주 버둥버둥 울어버린다. 아, 그건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우는 것, 우리가 가족이 아닌 것, 산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것,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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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섬별

읽고 쓰고 옮긴다. 매일 일기를 쓰고 자주 시를 쓴다. 용감하게 살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다. 물루와 올리버라는 치즈 고양이의 식구다. 옮긴 책으로 <페이지보이>, <자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