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표기식
박준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로 돌아왔습니다. 시집으로는 7년 만입니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는 제목 그대로 어떤 준비도 없이 맞닥뜨리게 된 삶의 사건들이 지나간 빈자리 앞에서 내려쓴 시들로 빼곡한 시집입니다. 박준 시인은 “특별히 아끼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며 많이 슬퍼하면서 이 시집을 썼다”고 말합니다. 혹 슬픔으로 가득한 시집이 될까 봐 시집의 마지막 자리에 산문을 배치했고요. 그것은 “실없는 농담으로 대화를 마친 기분을 느끼게 함”으로써 무거운 대화의 자국이 남지 않도록 배려한 시인의 진심입니다. 삶의 여러 순간을 아름다운 시로 맺는 시인은, 점점 더 고자극을 추구하는 콘텐츠 시대에서도 느리고 고요한 문학의 세계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갑니다. 책을 등한시하고, AI가 글을 대신 써주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시인은 기꺼이 낙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문학의 위기는 새로 만들어진 작품들의 수준이 안 좋을 때를 일컫는 것인데, 그런 차원에서 우리 문학은 한 번도 위기를 겪지 않았다”고 말하죠. “아름다운 호수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강조하면서요. 믿음직하고 든든한 시인의 예언 같은 이 말을 굳게 믿고 싶습니다.
7년 만의 약속
세 번째 시집 출간을 축하합니다. 약속을 지키셨어요. 두 번째 시집 출간 인터뷰에서 “다음 시집은 7년 후에 내겠다”던 그 약속을요.
그때 언급한 ‘7’이라는 숫자는 100억 광년과 같은 감각의 ‘7’이었어요. 아주 멀고 먼 미래요. 다음 시집을 내기는 해야 하는데 “십몇 년 있다가 낼 거예요”라는 답은 너무 성의가 없고, 대개의 시인들이 보통 4~5년에 한 번씩 시집을 내는데 그런 걸음은 못 걷겠고요. ‘7년’이 당시 제게는 가장 먼 수로 느껴져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어요.
누군가 시인님의 인터뷰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 약속 이행이 우연인지 계획인지 궁금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시인님의 MBTI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INFP예요. 계획을 엄청 많이 세우고, 그 계획이 이뤄지지 않을 때 극도의 쾌감을 느껴요.(웃음)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나 많은 계획을 세우는데요. 저녁에 뭐 먹어야지, 언제 거기 가봐야지, 집에 가서 그 책 다 읽어야지……. 계획은 많이 세우지만 잘 지키지는 않아요. 그때의 약속 같았던 ‘7년 후에 내겠다’는 말도 도저히 손에 닿지 않는 미래의 일이었을 뿐 반드시 지켜질 거라 생각한 계획은 아니었어요. 7년처럼 긴 시간이 주어지면 새로운 한 권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고요. 그 예상이 혜안처럼 맞았던 거죠.
아마도 이번 시집에 대한 섣부른 기대라면, 제목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박준 시집의 인장처럼 느껴지는 문장으로 된 제목 말입니다.
저도 그런 제목을 짓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우리는 시간을 어디에 흘리고 온 걸까’라는 문장으로 제목을 지어볼까 했었고, ‘해가 지면 책도 그늘이 됩니다’라는 문장도 후보였어요. 누가 봐도 시인의 문장 같은 것이 제목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그런데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시집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는 염원으로 그런 제목을 붙이고 싶었던 것이어서 시집을 대하는 마음가짐과는 상충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금 고심해 ‘미음’이라는 제목을 지었어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 제목이기도 해요. 다만 이 제목의 경우, 제가 아직 대가가 아닌데(웃음) 이렇게 담백한 제목으로 시집을 내는 건 어렵겠다 하는 생각으로 접었어요. 그 후에는 ‘이 시집을 이루고 있는 시들을 아우르는 제목을 붙여보자’, ‘아직 대가가 되지 못했지만 대가의 담백함을 갖고 싶다’는 두 마음이 발현되어 ‘마중도 배웅도 없이’라는 순박한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사진 : 표기식
“슬픔의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순박한 그 제목을 저는 너무 슬프게 읽어서요.
많이 슬퍼하며 썼습니다. 제가 다 얘기하지 못하는 슬픔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일부러 슬픔을 쓰자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시를 쓰는 동안 저를 지배하는 감정이 쓰여질 수밖에 없는데 그 감정을 억누르고 다른 것에 대해 쓰는 것은, 저는 어렵고요. 그렇다고 그 감정을 그대로 써서는 시가 되지 않아 또 어려웠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쓸 수 있지?’ 혹은 ‘어디서부터 시의 아름다움이 탄생하지?’ 그런 것들을 재정립하며 썼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시를 주로 밤에 쓰면 독자분들이 밤에 읽으시고, 제가 울면서 쓰면 어떤 분들은 울면서 읽으시고…… 쓴 이와 읽는 이는 이렇게 연결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슬퍼하며 읽었나 봅니다. 앞선 두 편의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보다 명확한 감정을 안고 읽었어요.
전작들은 슬픔이든 상실이든, 어떤 빈자리를 기억이나 그 누군가의 말로 불러와서 아름답게 재현해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썼어요. 이번 시집은 ‘빈자리에 뭐가 있나 보자’ 혹은 ‘언제까지 비어 있을 건가 보자’ 하는 태도로 쓴 것 같아요. 그게 어떤 태도든 우리가 슬픔이나 지나간 시간을 대하는 숱한 대응 방식 중 하나일 텐데, 큰 공통점은 빈자리 앞에 있는 것이겠죠. 다시 말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공터에서 과거에는 모래성도 쌓고 물도 뿌리고 나뭇가지로 그림도 그려보면서 다채롭게 재현하려고 했다면, 이번엔 뚫어지게 본 것이에요.
시집의 구성이 감정의 능선을 오르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1부에서 4부에 이르기까지 감정이 치닫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4부의 모든 시마다 빈자리를 떠올리게 되어서였던 것 같아요.
원래 4부가 1부였어요. 제가 쓴 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봐야 한다고 했을 때, 스스로 4부가 제일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만 4부의 시들에는 장례식장이 많이 등장하고,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으니 이 부분을 1부로 놓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대뜸 “나 버림받았어”라고 시작하면 안 되는 것처럼요. 아무리 상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요. 결국 이게 제목으로도 연결되는데요. 마중이나 배웅 같은 것들을 갖추고 나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4부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시집에 수록하지 않은 시들이 많은데, 대부분 4부에 놓일 시들이에요. 장례식장, 죽음이 등장하는 시들이 더 많아서 한 권 분량을 이룰 정도인데, 그렇게 시집을 묶어버리면 불특정 다수의 독자분들께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 그냥 시집 한 권을 골라 읽었는데, 죽음 혹은 슬픔 일색으로 가득 차 있으면 너무 무거워져 버리잖아요. 읽는 분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제가 바라기엔 불가능한 일이라서 시집 말미에 산문을 두었어요. 제 딴엔 그것이 슬픔을 잠재우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배려예요. 이 산문을 읽으면 이곳저곳으로 눈길이 돌려질 테니까요. 그게 제 구성의 묘였습니다. “나 버림받았어” 하고 이야기 한참 해놓고 괜히 농담하면서 헤어지는 그런 구성이었습니다.(웃음)
4부는 저마다 다른 죽음에 대한 시들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마치 하나의 이야기 같기도 해요. 그래서 이 시들을 한달음에 쓰신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4부에는 살면서 ‘이 사람은 왜 날 아껴주지?’ 혹은 ‘이 사람은 왜 내가 이렇게 아끼고 싶지?’ 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들어 있어요. 각각의 죽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쓴 시기의 시차가 있고요. 또 시들 간의 시차도 있어요. 어떤 죽음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하면서, 조금 삐뚤어져서는 “더 말하겠어” 혹은 “말하지 않겠어” 하는 태도로 쓰기도 했어요. 그런 다름이 있지만 거의 하나의 방식으로 쓰이긴 했죠.
사진 : 표기식
시를 쓰는 박준의 산문, 산문을 쓰는 박준의 시
시와 산문의 경계를 두지 않고 이어지는 작품들이 이번 시집에도 있습니다. 시인께서 일부러 가져다두는 장치인가요?
삶이 이어지니까요. 그리고 저는 한 권 단위로 새로운 기획으로 쓰는 사람은 아니에요. 대부분 소설가들이 그러하고, 시인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죠. 그런 시인들을 되게 좋아해요. 하나의 작업으로 결과물을 매듭짓고 또 그다음을 향해 새롭게 시선을 두는 분들을요. 나름 최소한의 기획을 했다고 한다면, 전작에서부터 이번 시집을 각각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다리처럼 놓아가면서 쓴 시들을 두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연작처럼 보이는 「능곡 빌라」 같은 시요. 이 시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하나는 초등학생, 그 동생은 미취학 아동인데 지금은 제가 이 아이들을 못 만나지만, 여전히 삶의 순간순간마다 떠올려요. ‘몇 살이 되었을까, 엄마 없는 하늘 아래서 형이랑 동생이랑 어떻게 지냈을까.’ 제 삶에는 이들을 향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어요. 의도적인 계획으로 쓴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사니까요.
그렇다면 「세상 끝 등대」는요? 기억하기로는 ‘멋 부린 제목’의 시라고 밝히신 적이 있어요.
「세상 끝 등대」는 기획과 의도의 인위적인 산물이 맞습니다.(웃음) 책마다 「세상 끝 등대」라는 제목을 가진 글들을 넣었는데요. 그렇다 보니 이제 이 제목이 제 책의 스타일을 극대화하는 방향이 되었어요. 이번 시집에 실린 「세상 끝 등대 5」는 가장 마지막에 쓴 시고요, 이 한 편만을 완전한 의도를 가지고 쓰고 실었습니다.
요즘 사용되는 언어들은 밈에서 온 것들이 참 많습니다. 최근엔 ‘실력이 남다르다’라는 의미로 ‘보법이 다르다’라는 말을 쓰는데요. ‘보법(걷는 방법)’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생각하니 제법 멋진 표현인 것 같아요. 밈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지만 보법의 원의미를 살려 질문드리면, 산문과 시의 보법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산문은 정직하게 걷는 것, 시는 정신 산만하게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걷는 것이랄까요. 산문이라는 건 문학의 아름다운 장르 중 하나인데, 시나 소설처럼 평가하는 건 불가능해요. 어떤 직업을 가졌든 쓴 이의 사유(思惟)를 그대로 적는 것이니까요. 산문의 형식 자체가 문학적인 변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요. 다만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현재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데 있어 과거의 일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데 있어요. 그래서 ‘그때 만약 이런 말을 했으면 얼마나 근사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사실을 보정하지 않는 것이 산문의 보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했던 얘기인데요. ‘산문은 사실이고, 시는 진실이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쓰는 게 산문이고, 문학적 진실이든 사회적 진실이든 진실을 쓰는 것이 시라고 생각해요. 시는 꼭 사실만으로 쓰지는 않는 거죠.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실제로 독자분들을 대면할 때 이런 경우들이 있다는 건데요. 『계절 산문』을 들고 오셔서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집이에요”라고 하시거든요. 제가 그 앞에서 “이거 산문집인데요”라고 굳이 바로잡지 않아요. 그렇게 받아들이실 수도 있구나 해요. 제 시를 보고 “이 산문 너무 좋아요”라고 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요. 독자분들에게는 시와 산문의 경계가 특별히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서양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많이 흐려져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이번 시집에서 산문을 마지막에 넣은 또 다른 이유가 ‘시처럼 보이지만 산문입니다’라고 하는 것으로 구획을 지어놓으려는 시도인데,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죠.
백지의 무게를 짊어지기
전작의 양적 성취가 대단했습니다.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무겁지는 않았는지요. 무게를 짊어지는 어떤 태도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오히려 사실상 기대라는 무게는 짊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요. 다른 차원에서의 무게는 짊어지고 살고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새로 써야 함으로부터 얻는 무게입니다. ‘백지의 무게’죠. 그 무게가 저를 멀리 던져버리게 하지 않아요. 자중시키고 진중하게 인생을 살게 합니다. 또 다른 차원의 무게는, 이제는 제 시나 산문을 어떤 분들이 읽어주신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 작품이 폐가 되면 안 되는데……’ 하는 그런 무게를 느끼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지난번에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처럼 쓰자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세상은 으레 큰 사랑을 성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지난 영광이라고 이름 붙이고 붙들려 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성적이 잘 나오면 내려갈 일만 남았죠. 그냥 잘 내려가면 됩니다. 천천히 잘 내려가면 돼요. 이를테면 그 성과라는 게 판매 성적이라고 한다면요. 첫 시집과 첫 산문집이 합쳐서 거의 50만 부가 나갔는데, ‘그런 일이 또 일어날 수 있을까? 일어나면 안 되지 않을까? 나에게만 일어나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따라붙어요.
항간에서는 소위 저를 ‘문단의 아이돌’이라는 말로 자주 소개해 주시는데요.(웃음) 얼마 전에 박상영 소설가가 한 라디오 방송에서 “박준이 문단의 아이돌은 맞는데, 그는 1세대다. 나는 3세대다”라는 거예요. 정말 그래야 해요. 다음 세대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해요. 그리고 또 다른 지점에서 이야기해 볼만한 것은 어찌 됐든 성적이 잘 나왔잖아요. 공부한 것에 비해 성적이 잘 나오면 의외로 사람이 풀려요. 마음의 매듭 같은 것이요.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제가 이전보다 조금 좋은 사람이 됐다는 거예요. 과거에는 화가 많이 났거든요. 다만 이것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저를 유순하고 차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제 마음속은 사실 지옥이었어요. 불화살을 마구 쏘아대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게 작가로서도 좋고 사람으로서도 참 좋아요. ‘한 번만 더 이해해 볼까’라는 태도가 제게 자리했어요.
그거 너무 좋네요.
그쵸.
여전히 백지의 무게를 견디며 지금도 쓰고 계시겠고요.
요즘은 조금 즐거워진 것이 세 번째 시집을 어렵게 어렵게 써서 냈잖아요. 지금은 그 숙제를 다 했으니 성적이 어떻든 이제부터는 다시 조금 다채롭게 멋도 부려가면서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그런 시를 써도 되지 않을까 해요. 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끙끙거리면서 내놓았으니 지금부터는 좀 더 자유로워져도 된다고 생각하니 좋아요.
사진 : 표기식
말들이 시든 시간에도 시는 무용하지 않아서
이번 시집이 출간된 창비 서교 사옥 1층 한복판에는 「미아」가 얼굴처럼 걸려 있어요.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한 편을 두어야 한다면 이 시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걸까요?
편집부에서 선택하신 건데, 저도 좋아요. 보통 선언적인 의미가 있는 시를 서시라고 하는데, 「미아」가 그렇거든요. 또 「미아」와 같은 위안은 제가 좋아하는 방식이에요. 이 시에 담긴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많이 하셨던 말이기도 해요. “사람 많은 데 가서 엄마 손 놓치면 그 자리에 서 있어야지 찾겠다고 돌아다니면 점점 멀어진다.” 제게 이 시의 의미는 사실상 이 시집의 첫 번째 시라는 것, 저를 떠난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건네고 싶은 말이라는 데 있어요. ‘우리가 지금 손을 놓쳤지? 어디 가지 말고 있어. 내가 너를 찾을 거야. 걱정하지 마.’ 이런 말을 하고 싶거든요.
실제로 고(故) 허수경 시인이 세상 떠나시기 전 마지막 통화가 그래서 후회가 돼요. 제가 평소에는 끊임없이 허수경 선배한테 농담을 하곤 했어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면 웃어주시고 그랬는데, 너무너무 아프신 걸 아니까 농담이 안 나오고, 제가 걷고 있는 복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얘기하고 있더라고요. 그 일이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어요. 그렇게 쓸데없는 말로 생전 마지막 통화를 했다는 것이요. 그래서 만약에 다시 얘기할 수 있다면, 「미아」 같은 말을 하고 싶어요.
여전히 시는 아름답고 이토록 시가 필요한데, 세상은 책도, 글도 등지려는 것만 같아요. AI가 글을 대신 써주는 시대가 와버렸으니까요. 시인께서도 챗GPT를 써보셨나요?
하루 해봤어요. 하루 동안 열심히 이것저것 해봤어요.
글을 쓰는 것도 시켜보셨어요?
네. 계기가 있었는데요. 제가 지난해 국제도서전에서 송길영 작가님과 ‘문학과 AI를 횡단하다’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눴어요. 이 행사를 준비하는 김에 AI에게 글을 시켜봤는데요. 오히려 저는 안심했어요. 더 많은 사람이 AI에 의존해 글을 쓰는 시대가 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AI라고 하는 것은 선행된 텍스트를 배워서 글을 쓰는데, 문학도 시도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가 예술을 처음 배울 때는, 우리가 합의한 시의 범주와 미학이 무엇인지 등 그 틀을 배우죠. 그 후에는 그때 배웠던 것을 공고히 하는 과정을 지나 얼마나 그로부터 멀어지느냐가 예술의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것인데, 챗GPT 같은 기술들은 정반대 같아요. 예술이 무엇인지 배우고 난 가장 안전한 상태에 놓이죠.
AI 외에도 시를 포함한 문학이나 책을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에는 고자극 쇼트폼 콘텐츠가 있습니다. 일상에서 지치고 피로한 일을 위안하는 유일한 길이 소위 ‘도파민에 절여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시대니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래도 다시 책으로 돌아올 거라는 거예요.
정말요?
세상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사실 텍스트만큼 빠른 게 없거든요. 영상이 쉽고 빠르게 보여서 우리가 빠져 있는 건데, 사실 어떤 장면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활자보다 빠른 건 없어요. 사람의 말보다도 읽는 속도가 빠른 것처럼요. 그리고 전통적으로 힙스터들은 책을 가까이합니다. 이제 30년 후에도 30년 후에 힙스터가 있을 것 아니겠어요? 종이책을 들고 다니는. 물론 그 수가 양적으로는 줄어들겠지만요.
제가 처음 문학에 관심을 가질 때도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생각하는 건, 이런 위기면 괜찮겠다는 거예요. 매체 발달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문학의 위기를 촉발했다는 거니까요. 진정한 의미의 문학의 위기라는 건 새로 만들어진 작품들의 수준이 안 좋을 때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 차원에서 우리 문학은 한 번도 위기를 겪지 않았어요. 여전히 작가들이 좋은 문학 작품들을 계속 쓰고 있거든요. 계속 좋은 걸 쓰고 있으니, 저는 안주하는 마음입니다.
너무 좋은 낙관이네요.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죠. 아름다운 호수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
그러니 시인의 다음 시집도 만나게 될 것이고요.
그다음 시집은 7년까지는 안 걸려요. 재밌게 쓸 거니까요. 다음 시집에서는 멋도 좀 내고 다채롭게 쓰고 싶어요. 다른 시인들처럼요. ‘남들처럼 살아봐야지’ 하는 욕망이 우리를 정말 멀리 데려다 놓거든요. 그곳이 꽃밭일 수도 있고, 들판일 수도 있고, 발 하나 디딜 수 없는 벼랑 같은 곳일 수도 있지만요. 아마도 다음 작품은 5년 후쯤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끝과 동시에 다시 또 시작이네요.
진짜 화가 나요.(웃음) 제가 7년 만에 시집을 냈는데 다시 또 또 또 써야 돼요.
백지의 무게…….(웃음)
그때는 아마 높은 확률로 채널예스와의 인터뷰를 못 할 것 같아요. 지면이 한정되어 있잖아요. 같은 시기에 출간된다는 이유로 다른 작가님들 기사와 함께 제 인터뷰 기사가 실리는 게 저에게 영광인데, 다음번엔 못 할 확률이 높거든요.
그럴 리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럴 확률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쓰면, 진짜 잘 써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잘 쓰고 싶어요. 정말 잘 쓰고 싶어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마중도 배웅도 없이
출판사 | 창비

표기식
사진 작가.

염은영
쓰고 엮고 매만집니다. 더불어 읽습니다.
감성광부
2025.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