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광화문 프레스 센터에서 있었던 환갑 잔치의 거나한 술자리의 여파가 녹녹치 않을 법도 한데, 작가 황석영은 생생했다. 청바지를 전혀 무리 없이 소화해 내는 몸매와 구리빛의 탄력 있는 피부는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생동감 만큼 건강한 느낌으로 와 닿았다.
"내가 어제 축사에 대한 답례로 뭐라고 그랬냐면…지금은 황석영 전기 문학을 정리하고 후반기 문학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수십 년 전에 문단에 데뷔할 때처럼 새로운 출발을 하는 거니까 나는 청년작가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실제로 작업량을 봐도 그러하고 또 이렇게 건강한 모습도 그러하니 누가 봐도 청년일 거라고 말을 거드니, "크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는 작가는 이번 소설 『심청』에서 획기적인 변화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여성을 중심으로 소설을 쓴 게 이번이 처음이에요. 제 작품은 굉장히 남성적이죠. 어떻게 보면 마초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남성성, 남성의 용기, 이런 것을 많이 그리던 작가죠. 그런데 여성성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그것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처음이에요. 두 번째는 이렇게 적나라하게 성을 묘사한 것이 처음이고, 세 번째로는 성을 파는 행위인 매춘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제목 『심청』에서 알 수 있듯이 황석영 씨의 이번 소설은 판소리 <심청가>의 주인공 '심청'의 이야기다. 독자들이 으레 알고 있는 <심청가>는 심청이 장님이 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중국 상인들에게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 바다에 빠지지만 결국 나랏님과 혼인을 하여 금의환향하여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줄거리. 그러나 작가는 이를 뒤집어서 심청이 중국 상인들에게 팔려갔다는 모티브에 초점을 맞추었다.
"쌀 1석이라면 쌀 두 가마입니다. 심청이 팔린 공양미 300석은 600가마인데 지금 경제력으로 봐도 꽤 큰 금액이죠. 그 큰 금액으로 산 묘령의 예쁜 여자애를 바다에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부잣집에 여자를 소용으로 하는데다 팔았을 거예요. 부잣집 늙은이의 시첩처럼요. 그 늙은이가 죽으면, 그것과 더불어 인생 유전이 시작되는 거죠. 『심청』은 그렇게 심청이 동아시아의 각 지역을 유전하면서 근대화와 더불어 생겨난 매춘 시장을 한바퀴 돌아오는 얘기입니다. 부제가 '연꽃의 길'인데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한 여성의 몸이 변화하면서 세상에 대한 달관이라든지, 긍정을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일명 매춘의 오디세이아이죠."
『심청』은 2001년 『손님』이후 첫 번째 창작 소설. 원래 작가는 『손님』이후 철도원 삼대 이야기를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작품의 배경이 일제 때부터 6ㆍ25 전쟁까지에 이르는 도시 노동자들의 얘기라 이번에도 또다시 독자들에게 정색을 하고 써야 하는 게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 일산에서 서울로 가는 택시 안에서 오리떼들이 너울너울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심청』이 쓰여지게 된 발단이었다.
"저 오리들이 어디로 가나'하며, 오리떼를 보며 생각에 잠겼죠. 아마 황해로 갈 것이다…. 그런데 황해는 동아시아의 지중해라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서양의 지중해에선 사내들이 전쟁하러 다녔죠. 『오디세이아』가 좋은 예이고. 그렇다면 이 쪽에선 여자들이 몸 팔러 돌아다닐 수 있었겠다…. 뒤집어서 말이에요. 그 때 매춘의 오디세이아를 쓰겠다고 생각했죠. 괜찮은 발상에 내가 깜짝 놀랐어요."
판소리 <심청가>의 '뒤집음'은 비단 스토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심청의 캐릭터에도 큰 변화가 생긴 것. 심청은 조선시대의 여인상에 기대어 으레 짐작할 수 있듯이 순종적이고 수동적이지 않다. 성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자신이 쥐려 한다.
"보드리야르는 그것을 유혹의 힘, 유혹의 권력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상대방을 덫에 가두어서 성에 대한 주도권을 여성이 갖는 그런 적극적인 경우이거든요. 심청 같은 경우도 그러하죠.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하고, 사태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성에 대한 주도권을 자신이 쥐는…. 이를테면 인신매매에게 잡혀가서 그런 참담한 지경을 당하면서도 나중에 상황을 반전시키잖아요. 매춘의 주도권이 자기한테 있다고 말이에요. 그런 노력이야말로 심청이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이죠."
『심청』에 있어서 특이할 만한 것은 소설의 배경을 동아시아의 근대가 싹텄던 19세기로 잡았다는 것. 일본의 한 한국인 정치학자가 19세기 동아시아의 근대를 두고 "독방에 갇힌 수컷"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의 동아시아는 '여성성'이 근간이 되던 사회의 아이덴티티가 외세와 결탁한 봉건 세력에 의해 상실되어가고, 동양의 모성적 세계관이 말살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황석영 씨는 청이가 렌화, 로터스 등 계속 이름이 바뀌어가며 그 정체성이 훼손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당시 동아시아의 시대상을 자연스레 그리고 싶었다고. 아울러 심청이 나중에 인생에 대한 어떤 경지에 도달해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동아시아의 문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했다 한다.
"근대를 스스로 해결해내지 못해 여전히 사회실험 중에 있는" 동아시아에 대한 모색은 사실 『손님』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손님』때엔 "동아시아적 양식이 정해지면 작품의 내용과 세계관이 그 양식에 맞도록 다시 형성이 된다."라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이 소설 또한 작품을 쓴 태도에 있어서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 그리고 다음 작품은 여기에서 훨씬 더 진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한다.
소재가 매춘이니만큼 농도 짙은 성묘사가 작품 전반에 걸쳐 곳곳에 등장하는데, "문장이나 배경에 일정한 품위가 있고 또한 성묘사가 비교적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 작가의 자평. 원래 신문에 연재할 당시에는 책에서보다 수위가 더 높았는데, '너무 야하다'는 출판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연재상의 글과는 달리 삭감을 좀 했다는 후일담도 있다며 작가는 껄껄 웃는다.
작가는 『심청』에서 여성의 시각으로 작품을 전개하다 보니까 문장이나 상황 설정도 대단히 유려해지고 자연묘사도 서정적으로 하게 되며 인간 관계도 역동적이라기 보다는 드라마 가정극을 보는 듯 잔잔하게 그리게 되는 등 여러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여성의 눈으로 여성의 세계관을 그리는 작업이 참 좋았다며 다시 한 번 이런 시도를 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스스로가 자신을 '청년 작가'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근래 작가의 창작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하다. 올해만 해도 『삼국지』에 『심청』이 나왔으며, 12월 중에 『청소년 장길산』이 나올 계획이다.
"『청소년 장길산』 작업은 감옥에서 나온 후 5년 동안 했어요. 거의 날밤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 동안 정말 개미처럼 일을 했는데,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고 보고, 전반기 문학을 마무리하고 후반기 문학을 출발하는 출발점에 섰다. 그래서 중간에 좀 쉴려고 합니다. 1년 정도 쉬면서 영국에서 어학 공부를 하려구요. 또 밖에 나가서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작가는 작품을 "궁둥이가 60%가 쓰고 나머지 40% 중 20%는 손이, 10%는 우연이, 10%는 상상력이나 영감 같은 재능이 쓴다"고 믿는다. 해서 매일매일 일정량의 노동을 하도록 자신의 일상을 재단하는 능력이 대단히 중요하단다.
"사람들은 농담 삼아 한국 교도행정의 일대승리라고 말하곤 하는데, 감옥에서의 시간 동안 일상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내공이 생겼다라고나 할까? 천직으로서의 전업작가로서의 기량을 갖춘 거지." 말하고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아끼지 않는 작가 황석영. 이러한 작가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어쩌면 큰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게 하는 그런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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