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덕 “서울 정체성, 언제까지 ‘궁궐’에서 찾아야 하나”
서울을 걷다 보니까 점점 화가 나더라고요. 최근 서울에 대한 책을 출간하신 어떤 문화유산 연구자 분께서 서울에 대해 말씀하신 걸 보면, "세계 어디를 가도 5개의 궁궐을 가진 곳은 서울 밖에 없다. '서울이 궁궐의 도시'라는 게 관광의 캐치프레이즈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이 나와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대문 안만 서울이 아니고, 대부분은 사대문 밖에 사는데 왜 우리는 언제까지 서울의 정체성을 사대문 안의, 그것도 이제는 망해버린 지배 집단의 거점인 궁궐에서 찾아야 하나요.
글ㆍ사진 손민규(인문 PD)
201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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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 어색함이 감돈다. 누군가가 먼저 물어본다.


"집이 어디인가요?"
"서울이에요."
"고향도 서울인가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고향은 OO에요."

 

1,000만 명이 살지만 고향을 서울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서울, 하면 예전에는 조선 왕족이 살았던 곳이고 현대는 지방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사는 공간으로 연상하는 게 지금 우리의 사고다. 과연 그럴까.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전쟁의 문헌학』 으로 통념과 다른 시선으로 역사를 해석해온 문헌학자 김시덕은 『서울 선언』 에서 서울의 다채로운 면을 보여준다.

 

저자는 직접 서울 곳곳을 걸으며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공간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썼다. 골목, 동네, 도로 등 일상 공간이라 무심코 지나친 곳에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사대문 밖 서울에 주목하며 그곳의 역사, 건물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바라보는 서울은 그 어떤 곳보다 다채로운 시층을 지닌 곳이다. 아쉬움도 베어난다. 조선 왕조, 식민지 시절의 문화재에만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결과, 해방 이후 건물이 무관심 속에 없어져버리는 세태에 대한 아쉬움이 그러하다. 식민지 시대와 대한민국 시대에 걸쳐 있는 역사 유물들 기억하는 우리의 방식을 향한 따끔한 지적도 우리사회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 이 인터뷰는 『서울 선언』 98~102쪽에서 다룬 지역을 답사하며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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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없을 듯한 장소에서 의미 찾아내기

 

<채널예스> 인터뷰는 3년만입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2015년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를 낸 뒤, 일본에서 2010년에 냈던 연구서 『일본의 대외전쟁』 을 번역했고 그 속편인 『전쟁의 문헌학』 을 썼습니다. 그러다 지난 해 직장에서 인사상의 사건이 있어서 한동안 낙담해 있다가, 이러면 안되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일본 역사학자의 인문학적 걷기인 『고문서 반납 여행』 을 번역하고 저 자신의 인문학적 걷기에 관한 책인 『서울 선언』 을 썼습니다.

 

이전 책이 유라시아에 관한 책이었고, 인터뷰 때도 그 뒤로 연구하는 주제는 유라시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관한 책이 나왔어요.

 

유라시아 가운데 특히 러시아 문제는 손을 놓지 않고 있어요. 5월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 왔고, 장기적으로는 동부 유라시아의 관계사에 관해 쓸 거예요. 하지만 세상이 저를 연구만 하게 내버려두지 않네요. 지난 해에 개인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걷기 시작했죠. 『서울 선언』 에도 적었지만 아예 한국을 떠날 생각을 했고, 떠나기 전에 이제까지 서울에 대해 찍은 사진을 정리해서 책으로 털어내고 가자는 마음이었는데, 걷다보니 직업 정신이 발동해서 이런 책이 나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서울 선언』 이 제 출판 흐름 속에서 일탈적인 책이라고 하지만, 아니에요. 제 방법론을 서울에 적용한 것이고, 외국학을 연구한 사람의 한국 토착화 과정입니다.

 

러시아어는 지금도 공부 중이신가요?


여전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바로 얼마 전 러시아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유라시아주의니 비추린 등을 언급한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한편, 3년 전에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에서 제가 지적했던 일부 한국 사람의 착각은 여전하다 생각해요. 그 착각이란게 어떤 거냐면, 여전히 한국을 세계의 중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거죠. 전 세계 화물 유통이 대부분 배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북한이 변화가 보이면서 철길이 뚫리면 한국이 유라시아 대륙의 핵심적인 물류 거점이 될 것이라든지, 북한에는 세계적 규모의 자원과 가성비 좋은 인력이 있으니까 이를 활용하면 한국이 다시 경제적으로 도약하고 세계적 강국이 될 것이라느니 하는.

 

이번 책의 성격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헌학자처럼 서울 걷기'입니다. 건축가, 역사학자가 아닌 문헌학자의 서울 걷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문헌학이란 이런 겁니다. 제 앞에 책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저는 우선 이 책의 물리적 성격부터 확인합니다. 종이의 재질과 책의 무게가 어떤지, 책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활자는 얼마나 큰지, 본문과 여백의 비율은 어떤지, 이 모든 물질적 요소에 저자와 출판인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책의 본문이 전달하는 내용은 책 전체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렇게 책의 물질적인 측면에서 스타트해서, 이 책이 어떤 사회적 컨텍스트에서 탄생했고 읽혔는지까지를 전부 다 해석해내려는 게 문헌학이에요. 문헌학적으로 접근하면 다른 책보다 특별히 귀한 책, 희귀본, 우월한 책, 이런 게 없습니다. 문헌학적으로 서울을 걸으면, 얼핏 보기에 아무 의미가 없을 듯한 장소, 도로, 골목, 건물에서도 모두 의미를 읽어낼 수 있어요.

 

제가 과문해서 그렇겠습니다만, 건축하는 분들은 건축학적으로 훌륭한 건물을 중심으로 해서 서울을 바라보시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물론 훌륭한 방법이고 그 분들의 작업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그렇게 건물 하나 하나를 포인트 포인트로만 봐서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울에는 훌륭한 건물이 많이 선 구획도 있지만, 건축학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건물들이 흩어져 있는 구획도 넓게 펼쳐져 있거든요. 한편, 조경이라든지 환경 쪽 연구자분들은 도시가 어떠한 방향으로 계획되어야 하는지를 많이 보시는 거 같아요. 도시의 변화를 본인들이 이끌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죠. 한편으로 많은 한국학 연구자 분들은 특히 조선시대 후기의 서울에 주목하거나 식민지 시대의 “아픈” 역사의 흔적을 찾는 경향이 강한 듯 합니다. 이렇다 보니 식민지 시대에서 현대 서울 초기 시기에 걸쳐 만들어진 평범한 공간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일본의 국제 전쟁에 대한 문헌을 연구할 때도, 사료 가치가 높은 문헌들 뿐 아니라 문학과 역사학 사이의 틈새에 놓여 있던 수많은 흥미로운 책을 발굴해서 그들 문헌의 계통을 정리한다는 나름의 연구틀을 만들었습니다. 그 방식을 서울에 적용해 보니, 건축학적 조경학적으로 주목받는 구획이나 건물,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해지는 장소 이외에도 수많은 장소를 제 연구방법론으로 유의미하게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유학 당시부터 일본과 한국의 관계사, 동아시아 속의 한국학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서 제 연구를 한국에 토착화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찾아왔는데요. 그 첫번째 성과를 담은 것이 지난해 출간해서 세종도서 학술부문 추천도서로 선정된 『전쟁의 문헌학』 이었다면, 이 책 『서울선언』 은 두 번째 교두보를 근현대 서울에서 찾았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에 보고하는 것입니다.

 

 

서울은 조선 왕족이 아니라 공화국 시민의 땅

 

'서울 선언'이라는 책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요.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문헌학자처럼 서울 걷기'였죠. 그런데, 서울을 걷다 보니까 점점 화가 나더라고요. 최근 서울에 대한 책을 출간하신 어떤 문화유산 연구자 분께서 서울에 대해 말씀하신 걸 보면, "세계 어디를 가도 5개의 궁궐을 가진 곳은 서울 밖에 없다. '서울이 궁궐의 도시'라는 게 관광의 캐치프레이즈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이 나와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대문 안만 서울이 아니고, 대부분은 사대문 밖에 사는데 왜 우리는 언제까지 서울의 정체성을 사대문 안의, 그것도 이제는 망해버린 지배 집단의 거점인 궁궐에서 찾아야 하나요. 서울은 조선시대 후기 권력층만 살던 도시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내 친구가 사는 공간은 왜 서울 이야기를 할 때 비껴나가고 의미를 부여받지 못할까요?

 

얼마전 대치동 구마을이라는 곳을 걸었어요. 위성사진을 보면 바둑판처럼 구획된 강남 한 켠에 비뚤비뚤한 길이 보입니다. 한창 강남개발중이던 1974년 항공 사진에 찍힌 길하고 똑같아요. 강남이 개발되면서 옛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빌라와 아파트가 강남을 가득 채웠다는 이야기가 있죠. 이 말이 정말인가 확인해보고 싶어 갔죠. 가보니 이 지역은 계곡이어서 개발하기 곤란하다보니 예전 길이 남은 것이더군요. 강남 개발 전의 마을 풍경이 남아 있어요. 이런 곳을 걷다보면, 강남이 역사성이 없다 하지만 역사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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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구마을의 폐쇄된 교회 계단 아래에 새겨진 손글씨 성경구절. 한국경제신문 임락근 기자 

 

 

서울 곳곳을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재개발 예정지에 맞닥뜨립니다. 그곳의 주민들에게서는 불안감이 느껴집니다. 토지주가 아니라 임차인들이, 개발되면 그곳에서 쫓겨나기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거죠. 그런 지역을 걸으면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노라면, 어디서 나오셨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사실대로 말씀드립니다. “한국학”을 다루는 대학 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고, 서울의 뜻깊은 공간인 이 지역에 대한 기록을 남기러 하면, “알았다” 라고들 하시는데,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슬퍼요. 여기 뭐 볼 게 있냐고……. 그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곳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몰라요. 역사와 의미를 뺏긴 거죠.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애착감, 역사감을 잃어버리고, 저기 멀리 사대문안 조선시대 후기 지배 집단이 만든 궁궐과 정자를 자기 도시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은 겁니다. 저는 이걸 일종의 역사 전쟁, 계급 전쟁이라 생각해요. 말하자면 헤게모니를 뺏긴 거죠. 그래서 서울에 관한 담론을 되찾아야겠다, 시민에게 다시 줘야한다, 지금 한국은 조선 왕족과 양반이 지배하는 땅이 아니라 공화국 시민의 땅이라는 선언을 하자. 그래서 『서울 선언』 이라는 제목이 나왔습니다.

 

오늘 답사가 이뤄져야 할 장소에 관해 설명해주시죠.

 

3년 전 채널예스와의 인터뷰가 제게는 전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요. 지난 2017년 12월에 『서울 선언』  원고를 넘긴 후에도 역시나 걸어다니면서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 지역과 수도권 도시들을 많이 걷고 있습니다. 속편의 가제목은 『갈등 도시 ? 무엇이 서울과 경기도를 만드는가』입니다. 서울과 수도권의 랜드스케이프를 만들어내는 핵심 개념 몇 가지를 파고들려 하는데요, 특히 주목하는 것이 종교, 군사, 문중(가문)입니다.

 

오늘은 서울과 경기도 경계에 있는 경계 비석을 볼 거고요. 서울 구로구 항동, 부천 옥길동, 광명 옥길동이 만나는 지역에 가려고 합니다. 이 지역은 세 도시의 경계지점이고 대규모 공장도 있어서 개발이 미뤄졌던 곳인데, 최근들어 본격적으로 개발이 진행중이죠. 개발이 끝나면 서울 서남부의 중심이 될 것으로 봅니다. 여담인데, 『서울 선언』 을 부동산 애널리스트나 이코노미스트 분들께서 많이 보시더라고요. (웃음) 그리고 부천의 개발 예정지인 소사 지역도 들릴 예정입니다. 저는 늘 답사를 할 때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갑니다. 실제로, 다음에 갔을 때 있던 게 없어지고 없던 게 생기는 게 서울과 수도권이니까요.

 

서울 답사책 중에서는 장소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여행서 느낌의 책도 있는데요. 이 책에도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선생님의 역사관이 강하게 담긴 장도 있습니다. 특히나 1, 4장에서 표현이 셉니다.

 

소송 걸릴 각오를 하고 원고를 썼고, 법률가 지인들에게 원고를 미리 보이기도 했어요. 어려운 문제들 피해가면서 편하게 서울 해설하는 책은 많잖아요. 굳이 저까지 그런 책을 쓸 필요는 없겠다싶었고, 한국을 떠날 각오로 쓰면서 제 삶이 서울 시민의 탄생이라는 대표성을 띌 수 있겠다 생각하면서 그간 살아온 이야기도 썼어요. 책이 저자 뜻대로 움직이는 건 아닌 게, 저는 3장과 4장에 힘을 주고 썼는데 많은 독자들은 2장에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아내는 제가 살아온 서울의 각지역을 소개한 2장 부분이 특히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거 같다고 하더군요. 제 책을 읽고는, 나도 여기 살았는데 여기는 어떤 곳이었고 나에게 어떤 기억을 남겨주었다, 하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이제까지 자신의 고향인 서울에 대해 말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육이오 전쟁 체험자,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의 구술만 가치있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시민들의 경험도 훌륭한 구술사의 대상이자 역사의 한 조각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답사서로써 제가 힘을 기울인 건 『서울 선언』 의 3장이에요. 양반과 궁궐의 도시가 아니라 시민의 도시로 서울을 어떻게 걸을 것인지를 실제로 보여드린 부분입니다. 수도권 도시에 사시는 분들은 불편할 수도 있어요. 저는 이 책에서 서울시민이 바라본 서울과 주변 도시와 관계성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수도권의 각 도시들에 관해서는 수원, 인천, 광명, 과천 등의 시민분들께서 각각 본인의 입장에서 자기 도시는 어떤 도시이며, 자신의 도시와 서울과 경기도, 이 3자는 어떤 관계를 맺고있는지를 선언해 주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원 선언』, 『인천 선언』, 『광명 선언』, 『과천 선언』을 기대합니다.

 

『서울 선언』 에서 제 주장을 가장 세게 펼친 건 1장과 4장입니다. 1장에서는 서울은 다양한 시층(時層)을 띈 도시인데도 어떤 관점을 강요받고 어떤 관점을 빼앗겼는가를 말했고, 그러한 강제와 박탈이 일어난 결과 서울 곳곳에서 어떤 역사 왜곡이 발생하고 있는가를 쓴 것이 4장입니다. 4장에서 다룬 서대문 형무소 문제, 특히 예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을 넣은 건, 특정 시기의 특정 집단, 특정 성별을 띤 사람들이 서울 곳곳의 역사 만들기를 주도하면 서울 시민 전체가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식민지 시대에 독립운동한 남성들만 대표하는 곳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일반 남녀 서민 수형자들, 해방 후의 정치범들과 일반 남녀 서민 수형자들이 모두 갇힌 바 있는 공간입니다. 서대문 형무소 이퀄 독립운동의 성지는 아닙니다. 물론 어떤 지역이 정비될 때는 한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질 수밖에 없어요. 그건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독립운동의 거점이라는 중심이 서 있는 상태이니, 이제는 다양한 목소리도 함께 드러나는게 좋지 않을까요? 서대문 형무소의 투어를 안내하는 어떤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공간이 식민지 시대 이상으로 현대 한국 시기에도 형무소로 이용되었고,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정치범과 비정치범도 많이 수용되었던 곳이라고 안내 때 말씀하신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말씀을 드리면 관람객 분들이 싫어 하신대요. 특히 현대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에 대한 이야기 듣는 걸 싫어들 하신다고. 어떤 의미에서 근현대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된 교육의 결과가 시민들에게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저의 지인인 외국인 한국학 연구자도, 2010년대 초에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다가 제가 말씀드린 편향성을 확인하고, 그 뒤로는 서대문형무소에 가지 않고 있다는 말을 저에게 한 바 있습니다. 서울을 걷다보면, 역사전쟁은 중국, 일본과만 하는 게 아니라 한국 내부에서도 여러 진영간에, 세대간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경기도 안산의 청소년 강제수용시설이었던 선감 학원도 식민지 시대에 2, 3년 이용되었고, 나머지 30~40년 간은 현대 한국 시기에 운영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그곳에 세워져 있는 작은 추모비에는 어느 시기 어느 정권이 선감 학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강제 수용했고 야산에 암매장했는지가 애매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안산시 차원에서 세우려던 위령비도 결국 세워지지 않았구요.

 

후기식민주의는 아프리카나 중동 쪽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아직 청산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형적인 후기 식민주의 모습들이죠. 한국 사람들은 자국 역사가 세계적으로 특수하다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깥을 안 보기 때문입니다. 주변 몇 나라의 역사만 살펴 봐도 그런 말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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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역사 의식이 아니라 과잉된 역사가 문제

 

저는 서울에 산 지 15년째인데 영동대교에서 '영동', 상도동에 있는 초등학교 이름이 '강남'인 이유를 이 책을 읽고 알았는데요. 지역사에 관한 교육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현대 한국은 역사 교육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라 생각해요.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신채호 선생이 말하지도 않은 격언을 인용하면서. 여하튼 과잉된 역사를 어깨에서 내려 놓고, 질문처럼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을 찬찬히 살피는 교육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요즘 언론에서 줄기차게 조선시대, 그것도 조선시대 전기가 아니라 조선시대 후기를 이야기들 하는데요, 저는 그 이유가, 현재의 한국 지배층으로 이어지는 핵심 집단과 지배 질서가 조선 후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부분은 저도 지금 한창 생각을 다듬고 있는 중이라 아직 논리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만, 저희 부모님을 포함해서 고도성장기 때 지방에서 서울에 온 분들에게는 사대문 밖 서울이 본인들과 큰 연고가 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듯 합니다. 이분들에게 본인의 고향과 현재 살고 있는 서울을 연결해주는 고리는 현대 한국이 아니라 조선시대이고, 현대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일부인 사대문 밖 대서울이 아니라, 조선시대 한양의 권역인 사대문안과 도성 바깥 십리인 거죠. 지금은 일시적으로 서울에 살고 있지만 정신적 고향은 여전히 지방에 있고, 근현대에 비로소 경성과 서울에 편입된 사대문 밖은 서울사람들의 관심사일 뿐 본인들과는 무관하다고 여기시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그분들의 자식인,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사대문 밖 서울을 객지가 아니라 고향이라 느낀다 말입니다. 저는, 서울은 고향이 될 수 없다, 강남은 고향이 아니다 하는 말을 자라는 동안 내내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서울 답사책인데, 왕릉과 아파트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왕릉에는 원래 관심이 없을 뿐더러, 이미 많은 분들이 쓰셨죠. 글쓰기의 기본은 남이 말하지 않는 걸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아파트는, 시민들의 욕망의 분출구이니 완전하지 못한 거주시설이니 하는 식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 출간된 정헌목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는 기존의 틀을 깬 훌륭한 접근이라 생각하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둔촌주공아파트나 과천주공아파트 1단지 같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고향으로 느끼는 분들께서 좋은 글을 남기고 계십니다. 저도 아파트에서 30여년 살고 있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제가 더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 나름의 아파트 철학과 아파트 답사 방법은 있기 때문에, 『서울선언』 의 속편에서는 이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무튼 왕릉, 왕궁, 아파트를 빼도 서울에는 다른 분들이 말하지 않은 공간이 무궁무진합니다. 저는 이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우선시 했습니다. 왕릉과 왕궁 뿐 아니라 사대문 안에 대한 내용도 얼마 없을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은 저에게 사대문 안을 안 좋아하냐고 묻기도 하시는데 그건 아니고요, 이 책의 2장에도 썼지만 사대문 안도 좋아합니다. 다만, 굳이 저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쳤습니다. 사대문 안에 관해 한 가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현대 한국 초기인 1950~80년대에 사대문 안에 만들어진 공간과 건물들이 안쓰러워요. 사람들은 사대문 안의 조선시대와 식민지 시대 유적 유물에는 관심이 있고, 20세기 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고층빌딩에도 감탄하지만, 그 사이에 낀 것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거든요.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을지로 입구, 2가 같은 곳은 깨끗이 재개발되었죠. 최근에는 3가, 4가가 “힙한” 장소가 되어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숙박시설과 카페 바가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여기도 을지로 입구, 2가처럼 소리소문없이 재개발되지 싶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누군가는 애정 어린 시선을 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입니다. 『서울 선언』 에서 제가 중요하게 이용한 개념인 삼문화광장을 사대문안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공간이 이곳이기도 해서 애착이 큽니다.

 

도심 재개발, 성곽길 복구, 그외에도 서울에서 다양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을 어떻게 만들고 기억해야 할까요.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안 쓰고 안 말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기억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찍고 끄적이자고 말하고 싶네요. 한국인이 스마트폰으로 음식 사진 찍는 게 한때는 외국에서 코미디 소재까지 되었지만, 찍다보면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도 최근 들어 나오고 있죠? 또 조금만 더 이 사진들이 축적되면, 21세기초 한국 음식 문화의 거대한 라이브러리가 만들어질 겁니다. 조선시대 음식만 한식이 아니라, 현대 한국 시민들이 먹는 음식이면 모두 한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한식이 탄생하는 시기에 살고 있고, 그 과정이 사진으로 모두 기록되는 운좋은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민이 무심코 찍은 사진 하나하나가 역사가 됩니다. 아무 의미없다는 생각하지 말고 모두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사진찍고 잘 저장해 두십시다.

 

 

한국에는 문화재가 풍부하지 않아, 그래서 소중히 해야 해

 

이 질문은 선생님이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일 듯합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연구하셨는데, 도쿄와 서울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서울 선언』  1장에도 적었지만 한국 사람은 도쿄하면 도쿄 23구 도회지 지역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23구는 도쿄의 일부일 뿐입니다. 도쿄는 동쪽으로 메트로폴리스 도회지인 23구, 서쪽으로는 농촌과 산촌, 남쪽으로 태평양의 어촌이 있는 복합적인 도시예요. 신주쿠, 하라주쿠, 긴자, 우에노 같은 23구 몇 군데만 보고는 도쿄를 다 봤다고들 생각하지만, 도쿄는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매력이 있는 도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활동 영역이 모두 다 있는 도시이고, 그 다양성은 서울보다 더 큽니다. 서울은 일단 어촌이 없죠. 어촌의 흔적이 마포나 한남동 등지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활동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농촌 흔적도 개화나 내곡동 등 주변 도시들과의 경계 지역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많이 약해졌습니다. 산이 많다보니 산촌으로서의 성격은 어느 정도 활발합니다. 서울 곳곳에서 확인되는 이른바 “빈민촌”에 대해, 저는 이들 공간의 성격을 산촌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도쿄에서 도쿄를 기억하는 방식은 어떤가요.

 

도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쫓겨나면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대문 밖 서울이나 노태우 정부 때 만들어진 분당이나 일산 같은 1기 신도시처럼 접근할 수도 있겠습니다. 계획도시로서 출발점이 명확하죠. 한편으로는 화재, 지진, 미군 폭격 등으로 파괴를 많이 겪으면서 생긴 상실감이 크죠. 그래서 도쿄 시민들은 자기 도시에 대해 필사적으로 기록을 남기려고 해요.

또, 도쿄는 기억하려는 역사의 시기가 서울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현대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가도로가 그렇습니다. 고도성장기 때 고가도로를 많이 지었는데,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에 청계천을 복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쿄에서도 이를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옛 하천과 운하를 복원하자는 거죠. 그게 정치적으로 유리할 거라고 판단한 거죠. 그런데 도쿄 시민 가운데에는 평지가 많은 도쿄에서 고가도로가 렌드스케이프 효과를 주고 있고, 이 자체가 현대 도쿄 시민들의 소중한 기억의 대상이니 철거하면 안된다는 운동을 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고가도로는 슬럼화의 원흉, 철거해야 할 흉물일 뿐인데, 도쿄 시민들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현대에 만들어진 것도 추억의 대상이고, 아낌 받을 가치가 있다 생각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서울선언』 의 앞날개에 실은 제 사진은 2014년 2월에 아현고가도로가 철거되기 직전에 찍은 것입니다.

 

철도도 비슷해요. 도쿄 시민들은 도쿄 한복판에 기차가 다녀도 큰 불만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여기 살기 전부터 철도가 있었고, 철도는 시민들과 함께 하는 존재라 여기니까요. 한국에서는 집값 떨어지니까 없애자, 이런 건데요. 일본은 부동산 값이 안정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도쿄는 타협점을 찾았고, 서울은 부동산 가격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시민들과 서울의 기억을 남기자는 시민들 사이의 투쟁이 여전히 진행중이죠. 서울도 언젠가는 적정한 지점을 찾을 거고, 그러한 적정한 지점들의 최근 사례가 박원순 시장의 도심재생, 서울로 7017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움직임을 큰 틀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도시는 오르락 내리락 굴곡이 있어야죠. 서울 시민들은 서울 곳곳의 산이 굴곡이라 생각하지만, 산은 자연지형입니다. 인간의 손을 거쳐야 도시이고 문명이죠. 고층빌딩도 올라가고 고가도로도 넣이고 중후장대한 다리도 놓인 게 도시 아닌가요. 철도 지하화처럼 시민들 눈에 안 보이게 뭘 자꾸 감추는 방식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에도 여러 번 강조하셨는데, 한반도는 원래 역사 유적이 별로 없으니 소중히 하자고 쓰셨는데요.

 

시흥향교 같은 역사적 건물은 식민지 시절에 파괴된 게 아니라 현대 서울이 확장될 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습니다. 철거된 게 겨우 수 십 년밖에 안되는데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겉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 안 남은 유적 유물이 무수히 많아요. 궁궐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서울 시민들의 평민 노비 조상들과 함께 했던 관청 건물이니 학교 건물이 다 의미가 있는 건데, 이런 걸 소홀히 여기다보니 기록 하나 없이 사라져 버렸죠. 그러고는, 모든 유적 유물은 임진왜란, 식민지 시기, 육이오 때 파괴되었다고들 말하니…… 참 편리한 사고 방식입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유적 유물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에요. 이것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많은 한국인과 충돌하는데, 한국인들은 한국에 남아있는 문화재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시민들의 최고 가치가 부동산이고, 부동산 값을 떨어지게 할 우려가 있는 건 전부 없애자고 하잖아요. 그래서 현대 한국 들어서 많은 유적 유물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도성장기의 개발 광풍을 뚫고 살아남은 유적 유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최대한 지켜야 합니다.

 

나찌는 폴란드 바르샤바를 정복한 뒤에 이 도시를 무참히 파괴했습니다. 나찌로부터 해방된 뒤 바르샤바 시민들은 파괴된 건물을 실측하고, 남은 자재를 하나라도 살려서 복원하고, 그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바르샤바 재건 사무소 기록물(Archive of Warsaw Reconstruction Office)이 바로 그것이죠. 한국 시민들에게도 이런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 생각해요. 사대문 안 같은 특정한 공간에 자리한 왕궁같은 건물 뿐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사 오십년 된 공간과 건물도 조금만 지나면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겁니다. 조상 탓하고 남의 나라 침략 탓 할 시간에, 이것들을 보존하고 기록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부동산 값만 생각하지 말고.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에서는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일반적인 한국인 인식과 맞섰고, 이번 책에서는 한반도에는 문화유산이 풍부하다는 인식과 각을 세우셨습니다.

 

일부러 각을 세운 건 아닌데요. (웃음)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고 한국과 비교하면 즉각 알게 됩니다. 한국이 문화재가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답답한 거죠. 남 탓이 아니에요. 한 예로, 월정사는 육이오 전쟁 때 한국군이 파괴했어요. 전쟁이라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쳐요. 역사 의식이 그렇게 투철하면 육이오를 살아남은 공간이라도 소중히 여겼어야 하는데 아니잖아요. 제가 서울에서 좋아하는 길 가운데 하나가, 식민지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동대문과 뚝섬 광나루 사이를 운행하던 기동차가 다니던 옛 철길입니다. 이 기동차는 동대문의 동남쪽에 있던 역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발역(始發驛)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안 남아 있습니다. 항공사진에 작게 찍힌 게 두 어장 남아있는 게 전부죠. 기동차가 운행하는 모습은 미국인이 찍은 컬러사진 몇 장이 거의 유일합니다. 이게 뭡니까.

 

구와바라 시세이라는 유명한 사진가가 있습니다. 청계천 복개하기 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분인데요, 이런 말씀을 했죠. 필름 사진 시절에는 필름이 귀하니 가족사진같이 본인에게 귀중한 것만 사적인 이벤트와 인물사진만 많이들 찍었고, 정작 모두에게 친숙한 공간과 건물은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이런 것들은 외국인이 찍어서 남겨놓은 경우가 많아요. 이제라도 우리 시민들이 열심히 찍고 기록했으면 좋겠습니다. 2002년 청계천 복개구간 지하를 걸었을 때 찍은, 화질도 별로 안 좋은 사진을 굳이 『서울선언』 에 실은 이유가 그겁니다. 특히 사진 기록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찬란한 역사 반만년이라 말해도 증거가 없으면 다른 나라에서 안 통해요. 중국 고전인 『중용』의 한 구절처럼, 비록 좋은 것이라도 증거가 없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고,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습니다(上焉者, 雖善無徵, 無徵不信, 不信民弗從). 저 같은 평민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 믿습니다.

 

『서울선언』  속편을 쓰고 계신데요. 최근 군산도 다녀오셨던데 혹시 서울 경기도 외 다른 지역을 문헌학자처럼 걸으실 예정은 없는지요. 그리고 쓰고 계신 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서울 선언』 속편에서는 크게 세 방향으로 지리적인 관심을 넓힐 생각입니다. 우선, 대서울의 핵심인 경인지역의 서부인 광명, 부천, 그리고 부평을 포함한 인천. 다음으로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현재의 도시 모습이 형성된 경기 북부 도시들, 마지막으로 성남 분당과 용인 수지 같은 서울-경기 동남부 지역의 신도시들입니다.

 

이 세 지역을 넘어서서는, 말씀하신 군산을 비롯해서 목포, 대구, 부산처럼 식민지 시기와 현대 한국 시대에 걸쳐 크게 확장된 도시들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 도시들이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정체성 뿐 아니라 근현대 시기에 처음으로 각각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지역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구도심에서 조선시대, 식민지 시대, 현대 한국 시대의 삼문화광장이 어떻게 시층(時層)을 이루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주요 도시들은 식민지 시대와 현대 한국 초기의 초라한 시기를 훌쩍 뛰어넘어서 조선시대에서 곧장 오늘날의 화려한 상태로 계승된 게 아닙니다. 불쾌하고 초라한 시기도 모두 한국 역사, 도시 역사의 귀중한 한 컷입니다. 식민지 시대와 현대 한국 초기 시기에 대한 증오 때문에 자꾸만 조선시대로 눈돌리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 합니다.

 

한편으로, 올 하반기에는 시리즈물인 『일본인 이야기』의 제1편을 출간합니다. 출판사는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를 냈던 메디치미디어입니다. 올해 3월에 『고문서 반납여행』 (글항아리), 6월에 이 책 『서울 선언』 (열린책들), 그리고 하반기에 『일본인 이야기』 제1편, 이렇게 세 권을 올해 모두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서울 선언김시덕 저 | 열린책들
경제 대국의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뿐 아니라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도 공존하는 도시다. 이 모든 것을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서울의 진정한 주인, 시민을 존중하는 길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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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규(인문 PD)

티끌 모아 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