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잡지를 만들었다. 틈틈이 번역하고 수시로 책을 읽었다. 월간 『럭셔리』 편집장이자 『침묵의 봄』 , 『설득의 심리학 3』 (공저) 등을 번역한 김은령. 사회인으로 자리 잡고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어서 기뻤던 30대를 지나 40대에 당도한 그는 답 없는 고민을 마주하며 불안할 때마다 책을 펼쳤다. 책은 40대를 잘 지나갈 수 있게 도와준 가벼운 예방 주사이자 적절한 영양제(9쪽)가 되어 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당연히 내 차지라고 생각하던 것들과 작별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일할 수 있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여러 가지 고민을 익숙한 친구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녀야 할 것이다. (중략) 그래도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해 딱히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하던 대로 책이나 읽자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길게, 오래 해왔고 그나마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6쪽)
『밥보다 책』 은 김은령 저자가 일, 건강, 가족, 노후 등의 고민으로 가득했던 시기를 통과하면서 읽은 책을 소개한 에세이다. 일도 사랑도 취미도 모두 책으로 배웠다는 그에게 ‘좋은 책’은 따로 없다. 어떤 책이 재미없었다면 그건 책과 나의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 『맥베스』 , 『노인과 바다』 같은 고전부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며느라기』 와 같은 신작까지 다양한 책이 실린 『밥보다 책』 에는 김은령 저자의 편식 없는 취향이 담겼다.
시작도 끝도 ‘잡지’
잡지 만드는 사람들은 9월에 제일 바쁘다고 들었어요.
3, 4월에 S/S 시즌이 시작되고 9, 10월에 F/W 시즌이 시작돼요. 시즌이 시작되는 만큼 새로운 제품이 많다 보니 이슈도 많고 광고나 부록도 많아서 볼륨이 늘어요. 3월호나 9월호가 창간기념호인 잡지가 많거든요. 그래서 9월에 더 바쁘기도 하고요. 일이 많은 만큼 돈을 많이 버는 달이죠.
20년 넘게 한 곳에서 잡지를 만드셨어요. 비결이 뭔가요?
어렸을 때부터 잡지를 좋아했어요. 늘 잡지를 품에 끼고 다녔죠.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오락거리가 많지 않으니까 잡지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소년중앙』이나 『소녀시대』 같은 어린이 잡지를 봤고,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인 고등학교 때는 몰래 들어온 일본 잡지를 보기도 했고요.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 외국 패션 잡지를 보기 시작했죠.
좋아하는 게 일이 되면 오히려 빨리 지치거나 실망하는 경우도 많아요.
다행히 잡지 일이 성격에 맞았어요. 지구력이 없는 스타일인데 잡지는 호흡이 짧아서 지겨울 만하면 한 달이 끝나잖아요.(웃음) 이번 달에 기사를 잘 못 써서 마음에 안 들면 ‘다음 달에 잘하면 돼’라고 할 수 있어서 좋았죠. 잡지에서 다루는 콘텐츠가 재미있기도 했고요.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주네?’ 싶었어요.
틈틈이 번역도 하셨어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번역도 잡지로 시작했어요. NBA 팬이었는데 과거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잖아요. NBA 소식을 빨리 알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NBA 팬인 걸 아는 지인이 “농구 잡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기사 번역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더라고요. 원고료가 적었지만, 농구 소식을 빨리 알 수 있으니까 바로 수락했죠. 짧은 농구 기사만 번역하다가 회사에서 미국 잡지인 『워킹우먼』과 제휴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번역을 하게 됐어요. 외부에 기사 번역을 맡겼는데 담당 기자인 제가 한 번 더 정리해야 하니까 시간도 걸리고 여러모로 불편하더라고요. ‘이럴 거면 내가 하자’ 싶어서 편집장님에게 말씀드리고 시작했죠. 출판사를 차린 동료가 단행본 번역을 제안해서 책 번역까지 하게 됐고요.
활자에 둘러싸여 있는데 지겹지는 않으세요?
가끔은 벌 받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웃음) 전생에 공부를 정말 안 했거나 책이나 문자를 함부로 다룬 게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세 가지 모두 좋아해서 시작했고, 좋아서 지금까지 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볼거리가 많아서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책이 제일 좋은 오락거리였잖아요. 그때 책을 접한 저는 지금까지 책이 재미있는 거고요.
잡지를 안 만들었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요?
수의사요. 동물을 좋아하거든요. ‘왜 수의사를 떠올리지 못했지?’라고 생각한 적 있어요. 다른 하나는 다리 만드는 일이요. 다리를 되게 좋아해서 여행 가면 다리를 많이 찾아다녀요.
‘책에 관한 책’은 무조건 사요
책이 왜 좋은가요?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기본 사양’ 같아요. 어떤 일이든 싫은 이유는 설명할 수 있는데 좋은 이유는 설명 못 하겠더라고요. 다른 재능이 없기도 하고, 읽고 쓰는 게 제일 익숙한 일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책 읽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책에 관한 책을 처음 쓰셨어요.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미 좋은 책들이 많기도 했고요. 동경하는 대상이었죠. 읽은 책을 이야기하는 게 굉장히 민망하더라고요. 속옷 차림을 보여주는 느낌이었어요. 처음 제안을 받고 좋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내가 책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밥 먹는 이야기는 안 되나?’ 싶었죠. 자신 없었고 지금도 사실 자신 없어요.
속옷 차림을 보이는 느낌이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잡지를 만들고 사업을 책임지는 제가 있고 집에서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책 보는 또 다른 제가 있잖아요.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후자의 모습을 알 수 없죠. 책을 쓰면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속옷은 나만 볼 수 있잖아요. 꺼내 놓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꼭 속옷 차림으로 나서는 것처럼 부끄럽더라고요.
책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오잖아요. 사람들이 왜 볼까요?
책이 엄청 많잖아요. 그 책들을 다 읽기에는 시간도 에너지도 부족한데 신뢰하는 누군가가 읽어보고 ‘이 책은 이랬어’라고 말해주면 한 번 정리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책 좋아한다고 하면 고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줄까 봐 쉽게 말 못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하면 안심이 되더라고요. ‘아, 이 사람도 책 사느라고 돈을 이렇게 쓰는구나!’ 하면서 동질감을 느끼면서 안심도 되고 기분도 좋고요.
제목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인데 이 사실을 아는 편집자가 책과 밥을 생각하자마자 제가 떠올랐다고, ‘밥보다 책’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고 싶은데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사실 밥보다는 아니지만, 책을 좋아하긴 하니까 그러자고 했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서민 교수님의 『밥보다 일기』 와 시리즈처럼 기획된 책이기도 하고요. 편집자 말로는 나이가 늘어날수록 기초대사량이 낮아서 군살이 늘어나는데 ‘군살을 만드는 밥보다 익숙함을 벗어나게 해주는 책이 밥보다 더 쓸모 있지 않겠냐’는 의미가 있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먹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소셜미디어에 음식 콘텐츠를 자주 올리는데 『밥보다 책』 이라는 이름의 책을 내니까 창피하더라고요. 남들이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하겠다고 편집자랑 농담하고 그랬어요.
소개하는 책이 다양해요. 밥에 비유하면 한정식 같아요.
일, 건강, 노후, 등의 고민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40대가 되고 여러 고민을 하면서 읽었던 책, 예전에 읽었는데 다시 생각난 책들을 모았죠. 고민을 먼저 떠올렸어요. 그러고 나서 어떤 책이 좋은지 편집자와 이야기하면서 진행했죠. 책을 쓰면서 과거에 했던 고민과 이전에 읽었던 책들을 함께 정리하다 보니 인생을 중간정산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유독 좋아하는 책이 있나요?
특별히 좋아하는 책은 없고요. 책에 관한 책은 나오면 다 사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는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책이 이렇게 많은데 다 읽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일단 책에 관한 책은 다 사서 읽어 보고 거기서 좋다고 하는 책들은 보려고 해요. 이외에는 주로 대형 서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재미있게 보이는 책 있으면 사서 보고, 마감하면서 원고 기다릴 때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사고요.
결혼하고 이사하면서 책을 고르느라 고생하셨다고요. 그때 선택된 책들의 기준이 있나요?
가장 먼저 고른 건 잡지와 책에 관한 책이었어요. 제가 책에서 ‘일도 책으로 배웠다’고 했잖아요. 생각보다 빨리 편집장이 됐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잡지 잘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데가 없었어요. ‘어떻게 해야 잡지를 더 잘 만들 수 있을지’ 하는 고민을 항상 했죠. 아마존에서 잡지, 에디팅 이런 키워드로 검색해서 나오는 책을 다 샀어요. 이때 산 잡지에 관한 책들은 일하면서 참고해야 할 것 같아서 1순위고 골랐고, 다음으로 책에 관한 책을 가져왔죠. 그리고 먹는 걸 좋아해서 요리책도 많이 가지고 왔고요.
추천사를 쓰신 김연수, 서민 작가님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 궁금했어요. 김연수 작가님과는 과거에 동료이셨다고요.
김연수 작가와 아주 오래전에 같이 일했어요. 짧았지만 재미있게 일했죠. 김연수 작가의 책이 나오면 꼭 사서 보고 잡지에 소개하기도 해요.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멀리서 응원하고 있죠. 서민 작가님과는 인연이 없어요. 책을 많이 읽는 분이 써주시면 좋겠다 싶어서 서민 작가님을 떠올렸는데 다짜고짜 추천사를 써달라고 하기 민망하더라고요. 부탁을 못 하는 성격이거든요. 김연수 작가에게도 마찬가지였고요. 평소에 연락도 안 하다가 책 나왔다고 부탁하기가….. (웃음). 다행히 능력 있는 편집자가 나서서 대신 말해줬고 두 분 다 기꺼이 해주셔서 받을 수 있었죠. 서민 작가님은 책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서 흔쾌히 써 주셨다고 하더라고요. 감사하죠. 두 분 다 작가로서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라 추천사를 받고 ‘성덕’이라고 자랑하고 다녔어요.
중요한 건 책과 나의 타이밍
시간이 지나면서 다르게 읽히는 책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책인가요?
『노인과 바다』 가 특히 그랬어요. 학창 시절에 영어 공부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게 『노인과 바다』 였거든요. 그때는 정말 지겹고 이 책이 왜 노벨상 수상작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고는 잊어버리고 살았죠. 그런데 이번에 바다에 관해 쓰고 싶어서 책을 찾다가 다시 읽었는데 ‘그래 이거였어’ 싶더라고요. 정말 좋아서 여섯 번을 읽었어요. 바다를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낚은 건 없고 그냥 돌아가야 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오래 일한 직장인의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어려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죽느냐 사느냐 고민하는 햄릿의 우유부단함도, 거짓말에 넘어가 아내를 제 손으로 죽이고 마는 오델로의 질투도 어느새인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불가능한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을 참아내는 돈키호테의 무모함에도 공감하게 되었다. 좋은 것과 싫은 것, 절대적으로 옮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 경계가 확실히 나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시대에 따라 새로 해석되는 고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145쪽)
다시 읽은 책도 있고 새로 읽은 책도 있다고요.
고전들은 책을 쓰면서 전부 다시 읽었어요. 새로 읽은 책도 많은데 『어른이 되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원래 다른 사람한테 책을 잘 권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많이 추천하고 다녔죠.
‘꼰대가 되기 싫어서 책을 읽는다’는 말도 하셨어요. 구체적으로 어떨 때 이런 생각을 하시나요?
늘 그런 것 같아요. 20, 30대 때는 모든 트렌드와 현상의 중심에 있잖아요.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지위를 얻을 수 있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 그렇지 않아요. 노력해야 가까스로 꼰대를 면할 수 있을까 말까 하고요. (웃음) 그래서 일할 때도 ‘나는 재미있는데 젊은 친구들은 재미있나?’하고 생각해요. 만약 저와 젊은 친구들이 다르게 느끼면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는 걸 선택해요.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요.
고전만큼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나 『며느라기』 , 『걷는 사람 하정우』 등 최근에 출간된 책들도 많아요.
의도적으로 고전과 최근에 출간된 책을 배치한 건 아니고, 고민과 맞닿는 책이면 무엇이든 포함했어요. 현재의 시점에서 마흔 언저리에서 했던 고민을 떠올리면서 쓴 책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이슬아 작가를 예전에 어떤 행사에서 봤는데 너무 충격이었어요. 정말 반짝거리는 젊음을 보는 것 같아서요. 『럭셔리』 에서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인터뷰는 아닌 것 같다’고 거절당했죠. (웃음) 말이 안 되는 거죠. 학자금 대출 갚으려고 글 쓰는 사람인데 『럭셔리』 에서 인터뷰하자고 하니까요.
어떤 분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저처럼 자책하고 고민하고 미래는 안 보이고 이제 주인공은 아닌 것 같은 상황이 낯선 30, 40대분들이요. 요즘은 특히 이런 느낌을 빨리 받는 것 같은데 ‘그게 맞아. 맞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책이나 읽자’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를 보면 사업 계획은 잘 세우는데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40대 중반부터 약간 다운됐었죠. ‘헛살았어’ 하면서요. 이때 책 읽고 메모한 내용을 돌이켜 보면서 책을 썼고 위로받았어요. 글로 쓰니까 부유하던 고민, 생각들이 정리되고 선명해지더라고요.
요즘은 읽는 책은 뭔가요?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 비평집 『경계의 음악』 과 글항아리에서 나온 『힙합의 시학』 을 읽고 있어요. 에드워드 사이드가 음악광이면서 클래식을 사랑했다고 하더라고요. 들어야 아는 음악을 어떻게 글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지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힙합의 시학』 은 랩 가사가 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흥미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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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보다 책김은령 역 | 책밥상
독서를 그야말로 ‘밥 먹듯이’ 해온 다독가의 단단한 생각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낮아지는 기초 대사량으로 군살을 만드는 ‘밥’보다, 익숙한 세상을 자꾸 흔들어 그 속에 나를 세우는 ‘책’의 쓸모가 더 유용함을 온몸으로 절감하게 한다.
최진영
'이야기하면 견딜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lippong
2019.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