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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영화적인 순간] 기꺼이, 행복한 우리들의 붕괴의 시간

영화 <해피 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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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자원에 들어가려는 친구를 붙잡아 다짜고짜 이런 말을 했다. “등을 대고, 서로의 기댐만을 이용해서 일어나보자.” (2022.08.05)


이 영화를 처음 본 날, 나는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을 나오면서 친구를 마주쳤다. 당시 내가 하는 일이라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영자원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었으니, 다른 곳에서 친구를 마주칠 일도 없었을뿐더러, 그건 아마 당시의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라서 양쪽 다 서로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인사를 나눈 것으로 기억한다. 짧은 인사 후 나는 (아무래도) 영자원에 들어가려는 친구를 붙잡아 다짜고짜 이런 말을 했다.

“등을 대고, 서로의 기댐만을 이용해서 일어나보자.”

사실 영자원이 아니라면 친구는 나의 이 말에 ‘무슨 소리야?’하고 대꾸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답게 그 친구는 내가 어떤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따라 하려는 걸 눈치챘고, 나 못지않게 영화나 소설을 보면 기억에 남는 장면을 즉시 실행해 보는 녀석이었기에 별다른 질문 없이 순순히 나의 요구에 응했다. 우리는 즉시 메고 있던 백팩을 가지런히 내려두고 영자원 1층 문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등을 맞댔고 “자, 일어날게.” 하고는 곧장 일어섰다. 의외였다. 처음부터 우리는 완벽하게 등을 맞대고 일어섰다. 어라, 영화에서는 안 그러던데. 나의 말에 친구는 그럼 다시 해보자 했고 우리는 다시 땅에 주저앉았다. 자, 그렇다면 나와 내 친구는 그 뒤에도 별다른 잡음 없이 곧장 서로를 기대며 온전히 일어설 수 있었을까.

이 답을 들려주기 전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그 질문을 돌려보려고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삼십 대 후반의 여성들로, 영화 속에서 서로의 등을 지지대 삼아 일어서는 이 장면이 처음 나온 것은 주인공 중 한 명인 후미가 일하는 문화재단에서 우카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3.11 대지진 이후 바다에 쓸려온 의자를 세우는 워크숍 중에서였다. 중심이 잡히면 아주 작은 면적에서도 홀로 서게 되는 의자. 3.11 대지진 이후 붕괴된 사람들의 삶도 이렇게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람은 또 사람이기에 다른 지지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카이는 타인의 등을 지지대 삼기를 요구한다. 이어서 우카이는 타인의 배에 서로의 귀를 대고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타인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권유하기도 한다. 

주인공 네 사람은 친구 후미의 부탁이지만 워크숍에 참가하여 서로의 등을 맞대고 일어서보기도 하고 처음으로 타인의 배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기도 한다. 아마 아주 가까운 가족조차 듣지 못했을 그 소리를 말이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 가까웠기에 들을 수 없는 뱃속 깊은 곳에서 나는 타인의 소리를 그들은 워크숍을 통해 서로 나누고 듣는다. 이런 워크숍의 속성은, 우카이가 이 워크숍에 대한 질문을 받으며 “결혼이나 약혼과 같은 제도 속에 들어갔을 때 안온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론 타인을 너무 배려하게 되기에 자신의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다.”라고 말한 것과 얼추 연결되기도 한다. 온전하게 자기 자신의 균형을 잡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자신의 균형을 찾는 이 워크숍을 기점으로 주인공 네 사람 준과 후미, 사쿠라코와 아키라 이 네 사람의 삶에는 균형이 아닌 균열이 시작된다.

물론 이 균열은 보이지 않았을 뿐 워크숍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었다. 준은 벌써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혼 소송을 하는 중이었고 아카리는 이미 이혼한 후다. 사쿠라코나 후미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듯 보이지만 둘은 표면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깊숙한 곳을 건드리지 않는 방법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결혼을, 혹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속내를 말하지 않는 두 사람과, 이혼을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모든 걸 말하는 준과 아카리.

이들은 말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말하지 못하고 있고, 모든 걸 다 말하지만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 말들이 남아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은 모두 제도에서 벗어나거나 벗어나려고 하거나, 벗어나지 않고 싶어하지만 이미 그 제도가 무너지고 있는 걸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귀를 대고 배 속의 소리를 듣는 타인은 제도 속에 함께 있는 연인이나 가족이 아닌 타인들이거나 타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가령 후미는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의 배에 귀를 기울여보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저 이불을 덮어주고 돌아선다. 그런가 하면 준이 전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채 떠나는 곳에서 자신의 뱃속 소리를 들려주는 사람은 사쿠라코의 어린 아들이다.



이렇듯 상상하지 못할 방식으로 이야기가 사방으로 튀고 제도는 비틀리면서 이 영화가 주목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관계다. 공교롭게도 이 ‘관계’는 영화 속에서 제도가 부서지는 자리에 들어온다. 사실 영화는 네 명의 여성뿐 아니라 삶이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서로를 파고들며 얽혀 있는 걸 보여주기로 하려는 듯 무수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게다가 이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서운치 않게 넉넉한 시간으로 들려준다. 적어도 누구 하나 ‘입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입장’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고 이런 입장을 갖게 되었다 한들 그것이 곧장 깊은 관계로는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관계의 어려움과 입장의 다름은 영화 속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유독 선명했던 장면은 워크숍에서 우카이의 친구로 등장했던 사내와 사쿠라코가 영화 말미에서 다시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부분이다. 표면상으로만 화목한 부부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사쿠라코는 사내와 밤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그 사실을 솔직히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사쿠라코에게 이제 그 남자에게 갈 거냐고 묻는다. 하지만 사쿠라코는 “그 남자의 연락처도 모른다”고 대답하며 ‘관계’는 남편과만 유지될 것임을 피력한다. 

결국 사내와 사쿠라코는 서로의 뱃속 소리를 듣는 타인에서 이젠 연락처도 모르는, 적어도 다신 관계를 맺을 일이 없는 ‘완벽한 타인’이 된다. 그러니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감과 자신에 대한 균형이 유지될 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관계는, 그 거리감과 균형이 사라진 순간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반대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연인으로 거의 한 사람처럼 붙어다녔던 사쿠라코와 그의 남편은 이제 적절한 거리감 속에서 다시금 각자의 입장과 균형을 찾을 것이란 예감을 준다. 후미와 그의 남편도 마찬가지다. 후미의 남편이 어린 소설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 이들을 묶고 있던 제도는 끝나는 듯하지만 이 솔직한 대화 끝에 일어난 남편의 사고는 이들의 관계를 계속 이어지게 만든다. 전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일 년여 동안 소송을 하며 이혼을 요구했던 준과 그의 전남편의 관계도 전남편의 말처럼 그들은 이혼 소송을 통해 비로소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제도를 벗어난 자리에 그들의 관계의 균형이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행복한 시간이란 결국 무엇이었을까. 이 대답을 하기 전, 다시 나와 내 친구의 붕괴로 돌아가 보자. 친구와 나는 그 뒤로 몇 번이나 더 서로의 기댐만을 이용해서 일어서보려고 했다. 신기한 일은 그 뒤엔 한 번도 맨 처음처럼 매끄럽게 성공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한 대여섯 번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 친구는 영화를 보기 전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며 인사를 하고 떠났고 나도 집으로 돌아오며 그 실패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답은 의외로 영화에서 봤던 대사에서 건져 올릴 수가 있었다. 상대를 너무 배려하기 시작하면 나 자신의 균형이 붕괴되기 시작한다는 우카이의 대사. 그러니까 나와 내 친구는 처음 온전히 이 자세와 자신에게만 집중했을 때 오히려 서로를 지탱하며 일어설 수 있었다. 그 뒤부터는 ‘지금 일어서야 하나?’, ‘아까 조금 늦게 일어설 걸 그랬나?’ 마치 ‘상대’를 고려하는 듯 ‘눈치’를 보며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 영화 속 행복한 시간이란 결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균형을 잡는 것. 내 안으로의 붕괴를 이끌어내는 것. 타인의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균형으로 일어서는 것 아니었을까. 그 균형을 찾기 위해 기꺼이 붕괴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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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정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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