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함께 『문학의 기쁨』을 썼던 금정연과 정지돈은 언젠가 '영화의 기쁨'을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마침 영화에 대한 글을 쓸 기회가 생겼을 때 두 사람은 '다큐도 아니고 픽션도 아닌, 작가의 에세이적 요소들을 담은 영화의 대본을 쓴다는 느낌으로' 작업을 하게 된다.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는 두 작가가 6년 만에 쓴 공동 작품으로, '오버디터미네이션 에세이 필름'이라는 독특한 양식은 그렇게 탄생했다.
정지돈 작가는 이번 책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보는 책이 아니면 좋겠다. 영화를 경유해 우리의 삶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간 이들이 구사한 농담 안에 결국 삶과 예술을 향한 의문과 피로뿐 아니라 어떤 헌신과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책은 그 오랜 회전과 반복 그리고 사랑의 기록이다."라는 김애란 작가의 추천사처럼 이 책은 영화보다 큰 사랑의 이야기다.
우리만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좋겠다
'오버디터미네이션 에세이 필름'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가 출간됐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연재했던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의 글이 묶였죠. 읽으면서 연재글이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정지돈 : 연재에는 결국 마감과 돈의 문제 같은 게 있겠죠. 그런데 마감을 많이 주고, 돈도 미리 다 받은 뒤 한번에 썼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는데요. 같은 글이 나오진 않았을 것 같아요. 연재는 어쨌든 과정에서 반응을 접하잖아요. 엄청난 반응이 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저희한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틈틈이 반응을 보여주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금정연 : 각각의 글에 작은 마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결정을 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쓸 때는, 혼자 쓰든 같이 쓰든 사실은 엄두가 안 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그런 면에서 연재라는 형식이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1년 10개월이라는 기간 동안에 쓰여진 것이라 그때 그때 있었던 다양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기도 했고요.
말씀처럼 코로나 시대의 시간성이 느껴지기도 하죠. 시간의 흐름이 담긴 부분도 재밌었어요.
정지돈 : '에세이필름' 영화도 그런 요소들이 있는 영화가 많은데요. 저희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일종의 일기 같은 기록이나, 일기의 요소들이 스며들어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시간성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연재를 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금정연 : 재미있는 우연들이 있었어요. 한 번은 이번 주에는 또 뭘 쓰나, 하면서 광역 버스를 타고 작업실로 오는데 어딘가 낯익은 분이 타시는 거예요. 영화 평론가 유운성 선생님이셨어요. 떨어져 있어서 말은 못 걸었는데요. 제가 그 에피소드를 가지고 픽션화 해서, 내가 실은 그의 뒤를 따라갔더니 선생님이 어느 장소들을 가더라, 하는 내용으로 글을 썼거든요. 재미있게도 나중에 유운성 선생님이 다른 작가를 통해서 얘기해 주시기를, 마침 그때 한국 영화의 어떤 장소들에 대한 글을 써야 해서 진짜로 그렇게 돌아다니려고 했다고, 금정연 무당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셨대요. 재미있는 우연이었어요. 무당은 아닙니다.(웃음)
정지돈 작가님은 이 책에 대해 '우리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쓰셨잖아요. 연재 제목이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이었고, 그 제목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 어떤 것이 있을 텐데요. 그에 답하지 않고 싶었다고 하는 말씀처럼 읽혔거든요. 어떤 마음이었던 건가요?
정지돈 :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요. 보통 영화를 얘기할 때 결국 그 영화가 잘 됐느냐 못 됐느냐를 얘기하게 되잖아요. 그걸 얘기한다는 것은 명시적이건 추상적이건 기준이 있다는 거고요. 그런데 저희는 그러한 기준 때문에 탈락되거나 억압받거나 오해되는 작품들과 우리의 활동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기준이 무가치 하다거나 쓸모없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그 기준 밖으로 벗어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 과정을 통해서 결국 기준이 전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각자 우리만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좋겠다고요. 때문에 기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세계나 우리, 또는 영화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기준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시험하려고 했죠. 그게 결국은 우리가 세계를 대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요.
금정연 작가님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구태여 매끈하게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단편들로만 채우는 거죠.'라고 쓰신 부분도 떠오르네요.
금정연 : 영화에 대해 말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죠. 일종의 영화사를 보여주는 방법도 있겠고요. 그런데 프랑코 모레티가 문학사란 결국 문학의 도살장이라고 말한 것처럼, 영화사를 보여주거나 어떤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그 바깥에 탈락되는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는 의미 같아요. 그런 식으로밖에 영화를 이야기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고요. 제가 요나스 메카스를 되게 좋아하는데, 그 분이 남들이 보기에는 영화라고 하지 않는 것들을 찍어서 다이어리 필름이라고 이름 붙였거든요. 거기서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어떤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걸 하지 않는다. 난 다만 인생을 기념할 뿐이다."
기념은 결국 나열하는 거잖아요. 이것도 있고, 이것도 있다고 하면서 그 자체를 그 자체로서 축하하는 개념이 기념이라고 생각하고요. 이 책에서도 영화를 그런 방식으로 접근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은연 중에 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쓰고자 했던 것과 완성한 것에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처음에 의도했던 대로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해지네요.
정지돈 : 저는 정확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문 쓸 때도 그렇고 최근 이 책의 교정지를 보면서도 생각했는데요. 오히려 다 쓰고 난 뒤에 내가 의도했던 게 이런 거였구나, 정연 씨가 의도했던 게 이런 거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쓰기 전에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고요.
금정연 : 정말 그랬어요. 또 제 경우 의도한 건 아닌데요. 끝으로 갈수록 진짜 글로 에세이 필름을 찍는다는 느낌이었거든요. 영화에 관한 에세이 필름이 아니라, 그냥 내 일상적인 것들을 에세이 필름으로 찍는다는 느낌이었어요.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는데 그럴 수 있었던 데는 지돈 씨 영향도 있었죠. 이론적인 이야기들이랄까, 전체를 잡아주는 이야기로 균형을 맞춰 주었거든요. 제 글로만 연재가 끝났다면 보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의문스러운 느낌이 들었을 수 있겠다 싶은데요. 지돈 씨가 딱 잡아줘서, 이것이 공동 작업의 묘미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보이는 것들
책 속에서 끊임없이 한국 영화를 포함해, 영화가 무엇인지 탐구를 하셨잖아요. 그래서 '한국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인터뷰에서 드리고 싶었어요.
금정연 : 너무 어려운데요. 책에도 종종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영화란 모종의 환상을 담지하고 있는 매체일 텐데, 그런 입장에서 자국의 영화라는 것은 굉장히 이중적일 수밖에 없죠. 애증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친숙하고, 그래서 좋은 것들이 있지만 아무리 장르 영화라 해도 너무나 나의 현실을 상기시키는 면이 있기 때문에요.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즐겁다고도, 마냥 싫다고도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정지돈 : 정의 내리기가 지금 시대에는 더더욱 애매해지는 것 같아요. 쉽게 말하면 <옥자> 같은 영화만 봐도 그렇죠. 한국 영화란 한국어가 나오는 영화인 건지, 한국 자본이 들어간 영화인 건지, 스텝이 한국 사람인 영화인 건지 따지게 될 수 있잖아요. 한국 영화를 그런 식으로 정의할 수 없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내가 속한 나라의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중요시하게 되는가, 무엇이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가, 라는 질문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동일한 영토 내에서 동일한 언어를 쓰고, 어떤 체제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 같은 것들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통해 영화에 스며든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그것이 다시 자국 관객한테 영향을 주겠죠. 그런 피드백 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그 무언가, 그리고 그 안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무의식 같은 것들을 한국 영화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제목과 관련해 드리는 질문인데요. 두 분이 본 '아름다움의 섬광'은 무엇인가요?
정지돈 : 저희가 얘기하는 아름다움의 섬광은 한국 영화의 아름다움이라기보다 한국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아름다움인 것 같아요. 단순히 한국 영화뿐 아니라 외국 영화까지 포함해서 그걸 보는 관객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의 섬광을 본 것 같은데요. 그것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한테 영향을 주면서 일종의 스파크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튈 때 저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봤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금정연 : 영화도 그렇고, 책도 갈수록 인스턴트 식으로 소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최신 영화, 신작 소설 위주로요. 예전에는 스테디로 팔리는 책들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게 거의 없어졌죠. 그런데 보면 어떤 작품이 나왔던 그 순간에 봤을 때 느껴지는 것과 몇 년이 지났을 때 느낄 수 있는 게 다른 것 같거든요. 시간이 지나 보면 전혀 다른 지점에서 느껴지는 어떤 것들이 있더라고요. 이 책은 21세기 전반 20년의 영화를 지금 시점에서 되돌아본 거니까요. 구체적인 장면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제목을 얘기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령 <고양이를 부탁해>를 처음 봤을 때는 20대 초중반, 저와 비슷한 또래들이 되게 친했다가 계급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는 청춘 영화로 봤는데요. 지금 다시 보니까 영화의 후반부는 완전히 주거의 문제를 다루더라고요. 정재은 감독님의 최근 작들도 보면 건축이나 주거의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시잖아요. 그러니까 되돌아봤을 때 너무 다른 식의 것들이 보이는 거죠.
그런 발견이 있던 영화가 또 있었나요?
금정연 : <어떤 하루>도 그랬어요. 그 영화의 시작이 "누구 봤어?", "아니 못 봤는데", "그 사람 마석 지구에 투자해서 지금 여기 안 오잖아" 하는 식의 대화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 다음 영화가 시작되거든요. 그런데 이 대사는 본편의 줄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냥 엑스트라들이 다른 엑스트라에 대한 얘기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되죠. 처음 영화가 나왔을 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며 봤는데요. 다시 돌아봤더니 그게 글로벌 금융 위기의 한중간에서 개봉한, 돈에 대한 얘기를 하는 영화였던 거예요. 그런 식으로 다시 보이는 게 정말 많아요.
정지돈 : 한국 영화에서 가장 많이 재현되는 장소 중 하나가 노래방이랑 룸살롱이잖아요. 남성화된 공간으로 굉장히 더럽게 그려지죠.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한국 영화들은 그걸 향유해요. <범죄도시> 같은 영화에서도 보면 거기서 노는 걸 전시하고요. <내부자들> 같은 영화도 그렇죠. 비판적이지만 사실 비판적이지 않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봉준호 같은 감독이 얼마나 뛰어난 감독인지를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분은 전혀 다르게 균열을 내거든요. 이를테면 <마더> 같은 영화에도 그런 노래방이 나오는데 그곳에 김혜자 같은 인물이 갑자기 침투를 해서 그 공간의 느낌, 아저씨들이 여자들 데리고 노는 느낌을 확 깨 버리는 거예요. 새삼 중요하지 않은 장면인데 다시 보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 놀라움을 처음 봤을 당시에는 몰랐었던 것 같아요.
서로의 글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금정연 : 지돈 씨 글은 내가 잘 모르는 이론이라도 적재적소에 소개된 그 이론을 되게 궁금하게 만들어요. 그게 놀랍죠. 무엇보다 지돈 씨 글의 특징은 읽고 있으면 이런 생각을 나도 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한다는 데 있는 것 같거든요. 지돈 씨의 글에 담긴 것처럼 정제된 언어로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막연하게 나도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지돈 씨의 글을 보면서 뒤늦게 알게 되는 거죠.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정지돈 : 앞서 얘기한 유운성 평론가를 만나면서 갑자기 영화 시나리오처럼 바뀌는 글 있잖아요. 저는 그런 부분들이 너무 재미있어요. 정연 씨가 자기 일상에서 있었던 일을 픽션화 하는 것들 말이에요. 정연 씨 글만큼 흐름이 편안한 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독자를 아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래서 계속 읽을 수 있는 글 같아요.
*금정연 서평가. 『난폭한 독서』, 『아무튼, 택시』,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공저) 등 다양한 작품을 출간했다. 그리고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었다. 영화 <나랏말싸미>(2019) 시나리오를 썼으며, '2018년 4월 담배를 (잠시) 끊고 2019년 7월 영화를 (거의) 끊은 실패의 연대기' 『담배와 영화』를 출간했다. *정지돈 소설가. 『내가 싸우듯이』, 『모든 것은 영원했다』, 『...스크롤!』 『인생 연구』 등 유수의 작품을 통해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을 포함한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었다. 영화를 전공했으며, 2020년 『담배와 영화』의 배턴을 이어받아 '프로파간다에서 일기, 비평과 개인적인 감상을 아우르는 (궁극의) 에세이' 『영화와 시』를 출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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