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 및 에세이, 비평 등을 쓴다.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젊은작가상 대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낯선 분야를 즐겁게 탐구할 수 있는 책
제임스 글릭 저/김태훈, 박래선 역/김상욱 감수 | 동아시아
정보라는 말만큼 자주 쓰이고 익숙한 말도 없지만 사실 우리는 정보에 대해서 거의 모르거나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20세기 물리학의 거장 존 아치볼드 휠러는 정보가 우주의 근원이라고 말했습니다. “비트에서 존재로.”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죠. 자주 접하지만 매번 이해를 포기하는 양자역학은 사실 정보에 대한 것입니다. 정보가 양자화 되어있기 때문이죠.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알쏭달쏭하다면, 당신은 정상입니다. 정보의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일은 그만큼 우리의 상식과 떨어져 있으니까요. 『인포메이션 INFORMATION』은 정보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입니다. 다시 말해 우주를 이해하는 가장 흥미로운 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한스 게오로크 묄러, 폴 J. 담브로시오 저/김한슬기 역 | 생각이음
이 책의 주장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사회의 정체성이 1) 전근대의 성실성, 2) 근대의 진정성, 3) 동시대의 프로필성 으로 변했다고 주장합니다. 성실성의 사회는 정체성이 정해져 있는 사회입니다. 아버지로서, 아내로서의 역할 또는 양반, 상인, 백정 등 신분이 정해져 있고 그것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사회를 추동하는 힘이었던 시기입니다. 반면 진정성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 합니다. 사회에서 부과한 역할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를 찾는 것이죠. 프로필 사회에선 진짜 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만들고 드러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SNS나 인플루언서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진정성 사회에 머물러 있는 사회의 반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저자들이 사회 변화를 비판이나 평가 없이 냉정하게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회가 옳고 그르다고 단정하지 않는 거죠.
프란체스카 페란도 저/이지선 역/신상규 감수 | 아카넷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 이른바 비인간, 탈인간과 관련된 사유가 유행입니다. 유행이라고 해봤자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과학기술 영역의 혁신 뒤에는 새롭게 갱신되는 인간에 대한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 중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는 책입니다. 덤으로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요.
범상치 않은 책
스즈키 이즈미 저/최혜수 역 | 문학과지성사
스즈키 이즈미는 일본의 1970년대를 구현한 하나의 아이콘이었다고 합니다. 1969년 도쿄로 상경해 모델, 핑크영화 배우, 연극 배우, 각본가, 소설가로 활동했는데요, 그에 대해선 조금만 검색해 봐도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범상치 않은 건 바로 작년에 국내에 출간된 그의 작품집입니다.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단편 소설 하나만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쓰지? 제가 처음 읽은 단편은 「계약」인데요 2023년 최고의 단편 소설이었습니다.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저/고영범 역 | 알마
뉴저널리즘, 곤조 저널리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저널리스트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의 논픽션 모음집입니다. 국내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다양한 미국 문화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어딘가 슬프고 낭만적으로 다루는 스타일과 놀랍도록 생생한 디테일이 인상적인 책입니다. 질 들뢰즈는 스타일은 새로운 것을 뜻하며 스타일리스트는 곧 발명가라고 말했습니다. 『펄프헤드』의 글들은 논픽션이지만 보도나 재현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발명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스미 시게히코 저/박창학 역 | 이모션북스
우선 안 팔릴 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런 두툼한 영화 책을 낸 출판사에게 감사하다는 말부터 하고 싶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에 대한 연구서가 나와도 안 팔릴 텐데, 존 포드라니. 영화에 관심 없는 분들은 존 포드가 누군지도 모를 것 같아요.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것 같고요. 사실 몰라도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탐구하는 정신과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하나의 극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덤으로 이참에 할리우드 고전영화를 보는 취미를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우리는 너무 동시대의 것만 보고 있으니까요.
기준이 없어서 자유로운 독서
최근에는 생명과학, 유전공학 등과 관련된 책을 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정치와 경제를 새로운 틀로 분석하려는 책들도 흥미롭게 보고 있고요. 후자에 속하는 책으로는 멜린다 쿠퍼의 『잉여로서의 생명』과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임무니타스』, 미셸 페어의 『피투자자의 시간』 등이 있습니다. 이 책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긴 힘들지만, 비약해서 말하면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주체의 형상을 만들어 가야 하는지를 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책을 고르는 데는 기준이 필요 없습니다. 과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래요. 기준을 버려라. 기준은 배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죠. 배제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에게는 한정된 자원 밖에 없기 때문이고요. 기회비용이라고도 하고 선택과 집중이라는 식의 표현도 있고요. 하지만 책을 고를 때 드는 자원은 다른 것들과 비교하면 굉장히 조금입니다. 발품만 팔면 책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준을 통해 배제하기 보단 예상외의 마주침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책 읽는 법은 누가 저한테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습니다. 직업 특성상 많이 읽어야 하는데 요즘 너무 안 읽히네요. 최근에는 궁여지책으로 TTS를 활용합니다. 산책을 하거나 이동할 때, 식사할 때 듣는 거죠. 금정연 작가님에게 말했더니 그게 되냐고 놀라시더라고요. 그게… 됩니다. 급하면 되더라고요.
정지돈(작가)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 및 에세이, 비평 등을 쓴다.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젊은작가상 대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