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서재
어딘(김현아)은 양다솔, 이길보라, 이다울, 이슬아, 하미나 등 출판계에 신선하고 활활발발한 바람을 불어넣은 90년대생 여성 작가들의 스승이자 동료 작가다. ‘어딘 글방’은 글쓰기 수련의 장이자 글쓰기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배우는 곳이었다.
그는 시민단체 ‘나와우리’를 설립해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를 풀기 위한 활동을 했고 청계피복 노동조합의 문화학교 일을 하기도 했다. 어린이 글쓰기교실, 입시논술, ‘고정희청소년문학상’ 등 글쓰기와 관련한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동안 학교 안과 밖의 청소년들이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할 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이후 공교육과 대안교육, 로드스쿨러, 홈스쿨러 등 다양한 영역에 속해 있는 이들과 다양한 문화작업을 기획 진행해왔다. 현재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대표 교사이며, 여성의 눈으로 전쟁을 말하는 『그녀에게 전쟁』을 비롯해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박영숙을 만나다』 등의 책을 썼다.
책의 재미를 느꼈던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호박이 마차가 되는 순간 아마도. 언제 한글을 깨쳤는지 기억에 없지만 ‘재투성이 소녀’라는 글자는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난다. 그 단어는 밥 먹어라, 라든지 현아야 노올자, 라든지 가게에 가서 두부 한 모 사오라는 말과는 온전히 다른, 낯선 이질적인 새로운 말이었다. 비일상의 세계로 입문하는 순간이자 ‘작은 동물’ 한 마리가 사피엔스의 세계로 편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책의 재미는 계몽사 50권 전집과 함께였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 엄마는 컬러학습대백과 세트와 한국의 위인전 시리즈와 더불어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내 방에 들여놓았다. 주황색 하드커버 전집의 1권은 그리스 신화였고 50번째 권은 한국현대동화였다. ‘작은아씨들’을 일곱 번쯤 읽었다. 성홍열 천로역정 같은 말은 어려우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어디서 띄워 읽어야 좋을지 모를 엉클톰스캐빈을 읽으면서는 어린 해리를 안고 오하이오강을 건너 도망치는 흑인 노예 일라이저를 따라 함께 뛰느라 손에 땀이 났다. 켄터키주 미시시피강 흑인영가 같은 말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읽을 때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클라라가 멋져보여 나도 휠체어에 앉아서 다니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까지 나는 휠체어를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북유럽동화집을 읽으면서는 산딸기를 설탕에 절이는 장면에서 책을 덮고 설탕통을 가져와 한숟갈 입에 퍼 넣고 마저 보았다. 인어공주를 읽던 날은 지금도 선연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눈을 드니 마당 가아득 빛이 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마루 끝에 오도마니, 오래 앉아있었다. 햇빛은 뜨거운데 어쩐지 추워서 오도도 소름이 돋았다. 생의 본질, 같은 걸 얼핏 보았던가. 모오든 걸 바쳐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있나니 그때는 홀연 물방울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식번역이라 우습기 그지없는 제목 십오소년표류기 소공녀 등을 비롯해 아라비안 나이트, 셰익스피어 이야기, 왕자와 거지, 플란더스의 개, 피이터 팬, 순서없이 두서없이 50권을 읽는 동안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선덕여왕, 김마리아, 백선행, 남자현, 유관순, 남자 위인들 틈에 가까스로 자리잡았던 이 여자들 덕분에 지혜롭고 총명하면 여자도 왕이 될 수 있고 의로운 일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줄 아는 생을 사는 것은 종종 고통스럽지만 근사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딸기의 단면도, 확대된 개미 사진, 눈의 결정 사진 등은 인간 아닌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를 불러일으켰다.
‘어깨동무’와 ‘소년중앙’은 만화잡지였는데 우리 집은 ‘소년중앙’을 이모집은 ‘어깨동무’를 구독해 서로 바꿔보았다. 그 잡지에 연재되던 밀림의 북소리(어쩌면 정글의 북소리)를 통해 나이로비를 알게 되었는데 아득하고 생경하기 그지 없는 아프리카의 도시이름을 몇 번이고 발음해보곤 했다. 20대 말에 나이로비에 가게 된 게 그 만화와 아주 연관 없지는 않으리라. 어쨌거나 아이들에게 전집을 사주는 것은 매우 유용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점에 가서라면 사지 않았을 책도 전집에 있었기 때문에 읽었다. 러시아동화집 독일동화집 미국동화집 일본동화집 중국동화집, 지금 생각해도 참 다채롭고 풍요로운 콜렉션이었다.
아, 이모집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전집이 있었는데 ‘라스트 모히칸’이나 ‘춘희’는 거기에서 읽었다. 오델로 이아고 데스데모나 세헤라자드 라푼젤 웬디 샤일록 포샤, 이 치명적이고도 기품 있는 인물들이 생의 복잡한 지형도를 보여주고 방향성을 일러주었다. 켜켜이 층층이 인류의 경험이 내 속에 쌓여가고 있었다. 사랑, 이 순수한 순결한 고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질투 불안 열정 충동 연민 정의 따위 아흔아홉 가지 말이 버무려져 비로서 사랑, 이란 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은연 중에 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책 읽는 시간은 작가님께 왜 소중한가요?
접속하는 일이므로 부모미생전의 기억과
주유하는 일이므로 고금과 동서
막힘없이 경계없이
유영하는 일이므로 성간우주
그 속에서 나는
파동이며 입자이고
떨림이며 울림이고
태극이며 무극이므로
마음껏
마음껏 불확정적이므로
요즘 작가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관심사와 관계하여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사진신부 글을 써야 해서 그와 관련된 책을 읽고 있다. 『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알로하, 나의 엄마들』, 『외로운 여정-육성으로 듣는 미주한인 초기이민사 하와이에서 유카탄 쿠바까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태평양을 건너간 사진신부』, 『사진신부 진이』, 『하와이 원주민의 딸』, 『지구과학 교사들의 하와이 지질 여행』, 『하와이 한인사회의 성장사 1903-1940』, 『하와이 훌라』 같은 책들을 뒤적이고 있다. 하와이 사진신부, 두 글자의 조합에 불과하지만 이 말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놀랍도록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이다. 하와이 왕국의 흥망성쇠, 미국의 독립과 탄생, 사탕수수 이민자들, 19세기 말 조선의 상황, 독립운동, 진주만 폭격, 2차대전 등의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로 엮어지다 보면 그녀들의 얼굴과 표정이 드러날 것이다. 용감하고 총명했던 소녀들, 가꾸고 돌보고 배우며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뭇생명을 살려낸, 오, 놀라운 여자들.
최근작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활활발발』 출간을 즈음해 글방을 다시 열었다. 두 가지가 놀랍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열망과 의지를 가진 젊은 여성들이 이렇게 많다니, 글을 읽어내는 솜씨가 이렇게 빼어나다니. 하여 합평회 시간은 몹시 뜨겁고도 차갑다. 글에 관한 공감으로 시작해 그 글이 가지는 한계와 아쉬움에 대한 비평,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제언까지, 두근거림과 탄식과 아하 아하 자각과 종종 눈물까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다. 지난 주엔 글방을 하러 가는 버스에서 그 날 합평할 글을 읽는데 눈가가 뜨듯해져왔다. ‘화성이주에 선정되셨습니다. 30킬로그램의 짐을 꾸려 다음 주 수요일 2시까지 이 장소로 와 주십시오. 한 명의 동행이 가능합니다’ 라는 글감으로 쓴 글이었다. 지구를 떠나는 마음이 이런 것이겠구나, 정말 오감을 열고 쓴 글이구나, 놀라웠다. 그런 날이면 글방을 하는 동료 작가들에게 전화를 건다.
너무 훌륭해,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는 거야.
말도 마세요 어딘,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라는 글감을 내보냈는데요, 이 세상에는 샤워를 하면서 욕을 내뱉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다, 를 첫문장으로 써온 거예요.
와우 끝났는데.
우리는 신이 나서 글방 이야기로 한 시간쯤 수다를 떤다.
7시에 시작해 새벽 한 시에 끝난 적이 있다니까요.
오, 미친 글방이구나.
활활발발하다. 제 2의 ‘파친코’ 가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n개의 글방이 포와 접으로 연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