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누드 그리려고 식민지에서 여성들과…
고갱은 파리를 떠나 수많은 미지의 도시들을 20년에 걸쳐 떠돌며 그림을 그렸다. 이런 삶을 위해 그는 소중한 것들을 많이 포기해야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떠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막지 못했다. 아마 페루인인 외조모의 피를 통해 흘러든 잉카인의 기질이 그로 하여금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것을 사랑하게 해, 자신만의 세계에서 치열한 삶을 살게 했던 것은 아닐까?
2013.01.28
고갱
타히티
아트 살롱
아를(1888년 2월-1889년 5월)(2/2)
룰랭은 마르세유로 전근되어 방금 여기를 떠났네. 그가 최근 며칠, 아기 마르셀을 웃기고, 자기 무릎 위에서 놀게 한 광경은 감동적이었지. 전근으로 그는 가족과 떨어지게 됐네. 어느 날 밤, 자네와 내가 동시에 ‘통과하는 사람’이라고 이름 붙인 그 사람도 너무 가슴 아파 했다네. 그가 자기 아기를 위해 노래하는 목소리는 이상하게 울려서, 슬픔에 잠긴 침모나 유모의 목소리 그리고 프랑스 나팔과 같은 청동의 음색을 듣는 것 같았지.
2009.07.27
고갱
고흐
아를(1888년 2월-1889년 5월)(1/2)
네가 그루비를 방문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지만, 그곳에 다녀왔다니 안심이야. 너는 무기력(극도의 피로감)이 심장병에서 생길 수 있고, 그 경우 포타슘 옥화물沃化物은 피로와 무관하다는 것을 생각해보았니? 나 자신 지난겨울 너무나 피곤해서 그림 몇 점을 그리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나, 포타슘 옥화물은 복용하지 않았거든. 내가 너였다면 리베Ribet와 상의해서 그루비가 그것을 복용하지 않게 했을 거야. 여하튼 네가 두 사람 모두와 잘 지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2009.07.20
고흐
아를
고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