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이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해외 사상가의 번역서를 리뷰하는 사람으로서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김성도 교수(고려대 언어학)의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을 접하기 전까진 피에르 레비의 책들이 그렇게 많이 번역된 줄은 미처 몰랐다. 김성도 교수가 세계 지성들과 나눈 직간접의 대화를 묶은 이 책에서 피에르 레비 편은 2003년 2월 중순 다섯 차례에 걸친 이메일 인터뷰에 기초하고 있다. 인터뷰의 첫머리에서 김 교수는 피에르 레비의 대표 저서 여덟 권을 소개했는데 그 중 여섯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그것도 2000년 8월 이후, 3년 남짓한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글ㆍ사진 최성일
200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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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사상가의 번역서를 리뷰하는 사람으로서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김성도 교수(고려대 언어학)의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을 접하기 전까진 피에르 레비의 책들이 그렇게 많이 번역된 줄은 미처 몰랐다. 김성도 교수가 세계 지성들과 나눈 직간접의 대화를 묶은 이 책에서 피에르 레비 편은 2003년 2월 중순 다섯 차례에 걸친 이메일 인터뷰에 기초하고 있다. 인터뷰의 첫머리에서 김 교수는 피에르 레비의 대표 저서 여덟 권을 소개했는데 그 중 여섯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그것도 2000년 8월 이후, 3년 남짓한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에는 움베르토 에코, 자크 데리다, 미셸 세르 같은 당대의 세계적인 석학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제자 뻘이거나 영향을 받았을 피에르 레비가 조연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피에르 레비는 세계적 석학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누는 주인공이다. 왜냐하면 김성도 교수가 책에 실린 대담록들이 "문화적 상대성과 차이, 상충될 소지가 있는 다양한 문화들의 화해 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시작으로, 특히, 디지털과 사이버 미디어 등, 총체적인 뉴미디어로 인해 태동된 새로운 사고방식, 지각 패턴, 인문학의 변형 등에 대한 관련 학자들의 견해와 진술을 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서다. 피에르 레비는 "특히" 이하에 언급된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1956년 튀니지에서 유태계 프랑스인으로 태어난 피에르 레비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문화적?인식론적 영향과 사회적 사용을 연구하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통한다. 미셸 세르의 수제자이면서도 박사학위 논문지도는 카스토리아디에게 받았다. 탈영토화, 유목, 분자 같은 용어의 사용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영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피에르 레비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벤처기업인'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지식 정보 교환과 평가를 총체적으로 디자인하는 시스템인 '지식의 나무'를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막역한 친구 사인인 미셸 오티에와 함께 개발한 피에르 레비는 '지식의 나무'를 확장시키기 위한 소프트웨어 'Gingo'를 개발한다. 또, 이를 판매하기 위한 기업으로 '트리비엄(TriVium)'을 공동 설립해 과학 담당 고문으로 활동했다.

흥미로운 것은 피에르 레비 책의 한글판에 대한 호응도가 썩 높지 않다는 점이다.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의 출간에 즈음해 구입한 피에르 레비의 책들은 모두 초판 1쇄였다. 여기에는 한글판들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탓도 있으나 출간 시기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풀이된다. 1990년대 초중반에 씌어진 피에르 레비의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인터넷과 IT, 그리고 벤처 열풍이 한창일 1990년대 후반에 번역됐더라면 지금보다는 반응이 한결 나았을 것이다. 물론, 학술서적으로 다소 딱딱하게 전개되는 책의 내용도 판매 저조의 한 요소이기는 하다. 그래도 높은 인터넷 보급률을 자랑하고 사이버 문화가 팽창하고 있는 우리에게 피에르 레비의 책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유럽 의회의 주문에 의해 작성한 보고서인 『사이버 문화』(김동윤?조준형 옮김, 문예출판사, 2000) 는 디지털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바라보면서 갖는 일반적인 태도와 정보 통신 분야의 가상 현실화 작업, 그리고 그로 인한 전반적인 문명의 변천 과정을 집중 조명했다.

피에르 레비는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하기에 앞서 '사이버 스페이스'(사이버 공간)와 '사이버 문화'의 개념을 짚고 넘어간다. 일반적으로 전자 통신망이라 불리는 사이버 스페이스는 "컴퓨터를 통해 세계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형성되는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공간"을 가리킨다. 또한, 사이버 공간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물적 인프라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정보의 바다 그리고 그 공간에 자료를 공급하고 항해하는 인간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사이버 문화는 "사이버 공간의 팽창에 따라 발달하고 변화하는 물적?지적 테크닉?실천?태도?사유 방식 등의 총체를 지칭한다."

피에르 레비는 테크놀로지를 '충격'에 견주는 은유는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기술이 사회나 문화를 결정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피에르 레비는 기술 결정론을 따르지 않고 기술 조건론을 지향한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기술에 의해 사회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지워진다는 점이다."

피에르 레비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기본적인 용어의 개념을 재확인하고, 오해받고 있는 용어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의미 파악에 힘쓴다. 소프트웨어와 멀티미디어가 그 단적인 예다. "소프트웨어는 하나 혹은 여러 프로세서가 개별적인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코드화된 명령들로 이루어진 목록이다."

피에르 레비는 CD롬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된 표현인 멀티미디어는 다소 기만적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으로 멀티 방식을 의미하고자 한다면, 이 새로운 매체의 특수성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CD롬과 CD-I는 엄밀하게 디지털 매체에 담긴 쌍방향 대화형 멀티 방식 문서나, 간단하게 하이퍼문서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멀티미디어는 "다양한 미디어들과 관련된 디지털화의 일반적인 움직임과 경향을 가리킨다."

1997년 출간된 이 책에서 피에르 레비가 예측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 사례와 인터넷의 다양한 활용 범위는 오늘의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있는 바다. CD롬은 1997년에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하이퍼 문서의 형태를 갖고 있으나 "30권 분량의 백과사전 텍스트를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CD롬은 기억 용량이 6배나 우수하고 '꽉 찬 화면으로' 비디오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 DVD(Digital Video Disc)로 곧 대체될 것"이라는 예측은 그대로 들어 맞았다. 피에르 레비는 알타비스타 검색 엔진을 이용한 인터넷으로 사람 찾기의 사례를 예로 들고 있으나, 이런 식의 사람 찾기는 이제 우리에게도 흔한 일이 되었다.

본문에서 피에르 레비는 사이버 스페이스와 사이버 문화를 다시금 정의하는 데 사이버 스페이스는 "컴퓨터와 정보 기억 장치들의 전지구적 상호 연결에 의해 펼쳐지는 개방된 커뮤니케이션 공간"이다. 또, 획일적 전체성 없는 보편을 사이버 문화의 본질로 본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보편에 형식을 제공하는 것이 사이버 문화라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피에르는 레비는 사이버 문화와 관련한 FQA(자주 나오는 질문과 답)를 마련했는데 '사이버 문화가 배제와 소외의 원천인가?'라는 우문에 대한 세 가지의 현답은 이렇다. 접속의 절대 수치보다 경향을 주시해야 하고, 접속하는 것이 점점 쉬워지고 접속 비용 또한 저렴해질 것이며, 의사 소통 체계 안에서 모든 발전은 필연적으로 소외를 양산한다.

'사이버 공간의 인류학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집단 지성』(권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은 피에르 레비가 그의 주요 개념인 집단 지성을 다룬 책이다. 그는 집단 지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집단 지성은 단순한 인지적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서 지성이라는 말은 '좋은 이해' 혹은 '공조', 나아가 '공모'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책이 다루는 집단 지성은 기술적 조직의 측면 못지않게 윤리와 미학의 차원이 중시되는 포괄적인 계획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분포하며, 지속적으로 가치 부여되고, 실시간으로 조정되며, 역량의 실제적 동원에 이르는 지성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피에르 레비의 집단 지성 인식틀은, 인간을 유적(類的) 존재로,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본 마르크스의 사고틀과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그런데 피에르 레비는 "무지가 인류에게 쓸모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던 마르크스에게서 한 걸음 나아가 "아무도 무지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의 인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어느 누구도 무지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식의 중요성과 실제는 더 이상 그 지식의 원천이 얼마나 상위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평가되지 않고, 그것의 명철함에 따라, 그리고 속세에 사는 개인들이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생명력 있으면서도 감각적이고 또한 창조적인 한 중심점이다. 우리 안에서 창조하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유일한 세계 그 자신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한 인류의 '의식의 확장'을 다룬 『누스페어』(김동윤?손주경?조준형 옮김, 생각의나무, 2003)의 머릿글은 그런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유전 공학을 찬미하고 근본 생태론을 비하하는 피에르 레비의 태도도 그리 바람직하진 않다.

『디지털 시대의 가상현실』(전재연 옮김, 궁리, 2002)은 가상(화)을 주제로 한 책이다. 피에르 레비는 "가상과 대립되는 개념은 실재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전제한다. 그런 다음 현실화에서 가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실마리를 푼다. 사용 집단이 다소 창의적인 방식으로 현실화시키는 소프트웨어는 변화의 가상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실재는 가능과 닮아 있다. 반면 현실은 가상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현실은 가상에 응답한다." 다시 말해 "현실화는 하나의 문제점에서 하나의 해결책으로 이행하고, 가상화는 주어진 해결책으로부터 또 다른 문제점으로 이행한다." 결국 "가상화는 소비와 위기 속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속도와 변천하는 시간-공간을 창조해낸다."

『지능의 테크놀로지』(강형식?임기대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0)는 맨 먼저 번역된 피에르 레비의 책이다. 그가 "일반적인 의미의 정보 과학이나 컴퓨터의 확고부동한 본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논쟁거리가 있고, 부분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열려진 새로운 지적 테크놀로지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이 책은 디지털 테크로놀로지 개설서로도 손색없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기본 개념 설명에 충실하다. 특히, 하이퍼텍스트와 인지 생태학 관련 논의가 알차다.

미셸 세르의 서문이 들어 있는 『지식의 나무』(강형식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3)는 미셸 오티에와 함께 지은 책으로 '지식의 나무' 시스템의 원리, 개념, 목적, 기대 효과 등을 서술한 책이다. '지식의 나무' 프로젝트를 향한 비판과 이에 대한 답변도 담았다.

#디지털 #테크놀로지 #전도사 #피에르 레비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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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3.19

디지털 시대를 조명한 책들이네요. 기술이 예측하는것 보다 훨씬 앞서고 있는 시대에 이런류의 책들은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지는것 같지만 사이버 공간의 문제와 인간 존재의 본질사이의 철학적 사회적관계를 조명했다면 고차원적인 지식의 문제를 다룬 새로운 영역이 될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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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