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생의 인연이 지중하여 지난날 아름다운 그대를 만나 카란에서 언약을 맺고 달 아래 인연을 이루었습니다. 젊은 날의 따뜻한 봄빛, 꿈속에 시들어 버리고 오늘 바람 맞으며 그대를 영결하니 이 몸의 한스러움 끝없기만 합니다. 일찍이 고운 언약 이루지 못하고 일평생 그대를 마음에 품어 파계하는 큰 죄를 짓고 괴로운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늘꽃」에서
약속 시간은 10시 30분.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이화여대 국문과 류철균 교수(`류철균'은 소설가 이인화 씨의 본명이다. 문학평론가로 활동할 때에도 이 이름을 쓴다)의 연구실에 갔지만 작가는 없고, 대신 조교가 반갑게 맞이한다. 일정에 없던 회의가 갑자기 열려 참석했다고 한다. 얼마 후 작가가 들어온다. 1966년 생이니 삼십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인데, 참으로 앳된 동안이다.
몽골을 꿈꾸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영원한 제국』 『인간의 길』. 발표하는 작품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소설가 이인화 씨의 첫번째 소설집 『하늘꽃』에는 모두 다섯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새로 선보이는 작품 「하늘꽃」은 출간 1주일 전에 탈고된 것으로 다섯 달의 집필 기간이 걸린 작품이다.
“실험이면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역사 단편 소설 장르의 어려움”을 계속 생각하며 완성한 『하늘꽃』에 수록된 작품들을 총괄하는 정서는 짙은 허무주의와 낭만주의이다. 시인의 품성을 타고났지만 시인의 운명을 타고나지는 못한 소설 속 인물들. 시대와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그들은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별이 빛나는 벌판”에 묻히고(「시인의 별」) 초원의 들개에게 뜯어 먹히며(「말입술꽃」) “차가운 허공에 덧없이 흩날리는 하늘꽃”처럼 아름답게 사라져간다. 몽골, 그 “비인정(非人情)과 몰인정(沒人情)”의 세계에서.
『하늘꽃』에 실린 전 작품의 배경이 되는 몽골은 개인의 삶의 원형을 드러내는, 그와 함께 역사 로망의 무대가 되는 비현실적 공간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잊고 있는데....... 몽골은 굉장히 미묘한 공간입니다. 역사적으로, 인류학적으로도 우리 민족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그러면서 또 우리와는 너무 다른 유목 문화를 지녔죠. 너무나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겹침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그곳을 탐미적인 공간으로 다가오게 하더군요. 비일상적이고 낭만적인 삶의 동경, 추구 이런 것이 몽골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인화 씨는 자기 또래의 일 많은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며, 아마 그들이 원하는 것은 리얼리즘이 아닐 것이라고 한다. 최근 5년 사이에 업무량이 두 배 이상 늘어난 작가는 아침 9시에 나와서 저녁 9시 정도까지 학교 일을 한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내 글”을 쓸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생활은 아무래도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벅찬 강행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는 것은 “나, 7월에 몽골 간다. 거기 초원에서 말 탈 거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몽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악산 계곡일 수도 있고, 상상 속의 판타지일 수도 있고. 그러한 환상에 기대서 현실을 견디는 거죠. 나한테는 그것이 몽골이었던 거구요.”
이번 소설로 슬럼프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늘꽃』이 저한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이번 소설을 쓰면서 지독한 우울증의 극치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일반 대학보다 더 맹렬한” 여대에서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작가는 “지식을 파는 노점상인”으로 살아가면서 “좋은 작품을 쓰는 것에 대한 한계”를 많이 느꼈다고 말한다. “창작은 굉장히 한가하고, 고요하고, 부드럽고....... 이러한 공간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작업인데 말이다. 열 여섯 살 때부터 문학으로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며 문학만 하며 살아온 작가는 건강에도 자신을 잃고(작가는 지난 1월 뇌혈관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나를 증명하지 못하면 헛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며 『하늘꽃』에 흐르는 허무주의의 저간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번 책을 내면서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난 작가는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고 애착이 간다.
이제는 “내 안에서 기쁨과 명랑을 길어올리고” 싶은 작가는 본격적으로 이야기꾼이 되기 위한 채비에 나섰다. “저는 늘 이야기해요. 난 이야기꾼이지 소설가가 아니다. 이야기꾼은 이야기 뒤로 숨지요. 소설가는 이름을 남기지만 이야기꾼은 이름이 안 남고 이야기만 남아 다음 세대로 전해집니다. 이야기꾼은 지금까지 전해져 온 이야기를 그 시대에 맞게 최고의 형식으로 뽑아내는 장인이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이야기꾼이 되기 위한 계획
지난 4년 동안 장편을 쓰지 않는 대신 발레, 오페라 등의 대본을 쓰며 외도를 한 작가는 “작가로서 소설만큼 자족감을 주는 것이 없었다”며, 앞으로는 “많이 쓸 거라”며 다짐을 굳힌다. 전업작가가 될 것인가 등 진로 문제로 하루에도 열 두 번 씩 마음이 바뀐다고 하는 작가가 요즈음 집필하고 있는 작품은 `서유기'다.
“『서유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 될 겁니다. 삼장법사는 한국의 선불교를 배우려는 미국인 여의사로, 손오공은 한국인 조폭, 저팔계는 홍콩의 펀드매니저, 사오정은 프로그래머로 나옵니다. 이들이 십만 팔천 광년 떨어진 별로 어떤 생명체를 찾아갑니다. 그 가는 길에 많은 모험이 따르는 겁니다.”
『서유기』를 우리 인간의 욕망의 모습이 명백하게 실린 굉장히 입체적이고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는 서유기적인 환상을 현대에 맞게 바꿀 거라 한다. 작가는 동아시아 인간상이 풍요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며, 앞으로 그러한 것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서 『손자병법』과 『삼국지』를 쓸 바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실은 공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공자』라고 책을 내면 아무도 보려 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손자병법'으로 공자를 이야기하려는 거죠. 그 아이러니를요. 『대부』의 주제는 가족애, 부정입니다. 그것을 마피아로 이야기하는 것이죠. 공자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과 예이며 도인데, 그것을 공자로 이야기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나와야 했던 무수한 비의를 통해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거죠.” 작가는 문학을 인간 존재의 근원적 아이러니를 드러내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 문학평론가라는 복합적인 텍스트를 안고 있는 이름 `이인화'가 보여주듯, 소설가로서 그가 성취하고 싶은 바람도 복합적이다.
“두 가지가 있?니다. 하나는 교과서에 실릴 단편, 다른 하나는 생활인들이 많이 읽을 수 있는 장편 하나를 쓰고 싶습니다.”
「하늘꽃」을 두고 최근 대선 구조와 연관시키며 그의 정치적 입장에 관심을 표하는 일부에 대해서는 “정치적 함의는 없어요. 사실 어불성설이지요. 이제는 당대의 문맥과는 다른, 보편적인 문맥으로 평가 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작가가 요즈음 공부하고 있는 것은 천체 물리학. 『서유기』를 쓰기 위해서란다. 소설 쓰기를 이유로 하고 싶은 공부를 원 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작가 이인화. 이야기의 마에스트로로서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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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