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계의 팔방미인
책을 읽어야 마땅한 시기가 있다는, 어려서부터 특히, 젊은 날 책을 읽어야 한다는 독서훈(讀書訓)을 나는 좀 다르게 해석한다.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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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야 마땅한 시기가 있다는, 어려서부터 특히, 젊은 날 책을 읽어야 한다는 독서훈(讀書訓)을 나는 좀 다르게 해석한다. 어떤 책이 유난히 착착 감겨오거나 내용이 쏙쏙 들어오는, 그 책을 읽기에 적당한 때가 있다는 것으로 말이다. 얼마 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김용준 옮김, 지식산업사, 1982)를 꼼꼼하게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판면은 조밀한 데다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시대를 산 과학자들의 이름 표기가 낯설어 약간 거슬리기도 했지만, 슬렁슬렁 책장을 넘겨봤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 지식과 마음가짐이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췄나 보다. 대화 형식의 자서전에서 하이젠베르크와 그가 불러낸 과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20세기 전반, 원자물리학을 개척하여 물리학의 황금기를 활짝 꽃피운 과학자들이다. 과학 천재들이 군웅할거 하여 겨루는 양상은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이론과 상상력으로 무장한 그들은 대화와 토론과 논쟁을 통해 상대를 논박하여 제압하려 든다. 그런 과정에서 도출된 과학 이론은 검증을 받고 새로운 이론으로 성립한다.
물리학의 황금기
하이젠베르크가 비판적 안목으로 간추린 동시대 과학자들의 업적을 다시 요약하여 여러분과 감동을 나누고픈 생각은 굴뚝같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재주가 모자란다. 그래서 때를 맞춰 출간된 이향순의 『과학사 신문』(현암사, 2007) 둘째 권에 실린 ‘20세기 전기’ 기사문의 내용 일부를 빚진다.
“독일 소장파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1900년 12월 14일 독일물리학회에서 플랑크 상수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흑체복사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함으로써 에너지 덩어리가 정수배로 움직인다는 양자론을 선포했다. 과학계는 이를 고전물리학 만능시대를 마감하는 신호탄으로 평가하고 있다.”(제2권 8호 1면 머리기사에서)
“닐스 보어는 아이슈타인의 논리 중 아인슈타인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의 결과인 중력장 아래서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점을 간과하였음을 지적하여 아인슈타인에게 한 방 멋지게 날렸다.”(제2권 9호 5면「논쟁은 보어가 ‘한수 위’」에서)
한정된 지면을 고려하더라도 러시아 출신 천체물리학자 조지 가모브는 『과학사 신문』에서 약간 소외된 느낌이다. 그의 공적이 뚜렷한 우주팽창론(10호 4면)과 빅뱅설(10호 7면) 관련기사와 DNA 특집(13호 5면)에서 가모브를 거명하지 않아서다. 이것은 가모브의 표현을 빌리면 “중요한 발견들이 두 명, 세 명 또는 몇 개의 연구 집단에 의해서 동시에 서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날로 늘어났다”는 과학발견의 추세와 무관하게 아쉽다.
‘지오르기 안토니치 가모프’
조지 가모브(George Anthony Gamow, 1904-1968)는 우크라이나 오데사 태생으로 1940년 미국 국적을 얻는다. 출생지 현지음을 살린 가모브의 퍼스트 네임과 세컨드 네임은 ‘지오르기 안토니치’다. 그는 자서전 『조지 가모브: 창세의 비밀을 알아낸 물리학자』(김동광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0)의 첫 번째 각주를 통해 자신의 성씨 알파벳 표기와 발음에 얽힌 사연을 전한다.
“이 이름의 정확한 발음식 표기는 Gamov이다. 여기에서 a는 mama나 papa의 경우와 같은 a이다. 만약 내가 러시아에서 곧장 영국이나 미국으로 갔다면, 나는 내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w가 아니라 v로 적었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내 이름을 라틴어 알파벳으로 나타낸 것은 독일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어로 v는 영어로 f와 비슷하게 발음되고, w는 영어의 v와 비슷하게 발음된다.”
인터넷상의 서지정보는 ‘가모브’와 ‘가모프’가 섞여 있어 속단하긴 이르나, 가모브의 대중을 위한 과학 교양서가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할 무렵의 우리말 이름 표기는 ‘G. 가모프’였던 것 같다. 1973년 전파과학사의 ‘현대과학신서’로 가모브의 책 네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중력: 고전적 및 현대적 관점』(박승재 옮김), 『우주의 창조 빛과 물질의 역사』(현정준 옮김),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톰킨스 씨의 물리학적 모험』(정문규 옮김), 『물리학을 뒤흔든 30년』(김정흠 옮김)이 그것이다. 대부분 절판되거나 품절 상태라서 구하기 어렵다.
가모브의 자서전은 구소련 초기만 해도 러시아 과학계가 유럽 과학계에 포함되고, 러시아 과학자는 서부 유럽의 과학자와 활발히 교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모브는 그런 대표적 인물이다. 가모브도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처럼 덴마크의 ‘국민적 영웅’ 닐스 보어의 우산 아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보어를 정점으로 한 ‘코펜하겐 그룹’이 아니라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 휘하의 ‘캐번디시 패밀리’에 자신을 위치 짓는다.
위트 넘치는 과학자
“내가 나의 학문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늘어놓아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라는, 레닌그라드 대학에 다니던 시절을 회고하는 대목에 나오는 그의 염려는 군걱정이다. 가모브의 자서전은 명랑 담백하다.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이지만, 유머러스한 일화가 자주 나온다. 그는 위트 넘치는 익살스러운 과학자다.
독일 괴팅겐 대학 유학 시절, 가모브는 포텐셜 벽에 대한 이론을 세우고자 파동역학적 투과확률을 나타내는 간단한 식을 썼다가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 공식으로 값을 구하려면 루트 1 빼기 r분의 a의 적분을 해야 했지만 계산하는 방법을 몰랐다. 하여 가모브는 역시 괴팅겐에서 그해 여름을 보내던 러시아 수학자 코트시친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는 내가 이 적분 계산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어서 그렇게 초보적인 계산을 할 수 없는 학생에게는 학점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관련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가모브는 친구이기도 한 코트시친이 수학 문제의 해결을 도와준 것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 논문이 발표된 후 그는 내게 편지를 써서 가모브에게 어떤 고급 수학을 도와주었느냐는 질문을 받아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러시아에서의 이력과 관련된 일화는 까딱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1940년대 후반, 가모브는 미 당국의 ‘신원조회’에 통과하여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한다. 그런데 미 의회의 악명 높은 매카시 청문회에 불려갈 위기에 놓인다. 미국 원자력위원회(AEC)의 허술한 보안을 문제 삼으려는 매카시 상원의원이 가모브의 이력을 추궁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가모브는 자신의 이력을 스스럼없이 발설한다.
러시아혁명이 낳은 소비에트 공화국 초기, 가모브는 포병학교 교관으로 적위군의 야전포병 대령을 지냈다. 원자력위원회 보안국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은 가모브는 로스앨러모스 과학연구소를 드나드는 보안국 책임자의 신문을 받는다. 가모브는 보안국 책임자의 질문에 가감 없이 분명하게 답한다. 그러자 보안국 책임자는 양쪽 귀를 막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가모브가 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군 복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보안국 책임자는 즉시 워싱턴에 있는 원자력위원회 안전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가 없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나서 가모브와 보안국 책임자, 그리고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은 매카시를 위해 술잔을 든다.
만일, 가모브가 매카시 청문회에 불려갔다면, 그는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 소련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한 로젠버그 부부와 같은 최악의 상황을 맞지는 않더라도 심한 고초를 겪었을 것은 분명하다.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라는 보안국 책임자의 중얼거림은 가모브의 평소 행동거지를 짐작하게 한다.
군 복무 시절, 이런 일이 있었다. 마음이 잘 맞아 따르던 선임병의 관물대에서 C.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비롯한 이념서적 6권이 발견돼 내무반이 발칵 뒤집혔다. 요즘도 가끔 만나는 학생운동권 출신 선배가, ‘남한산성’까진 안 가더라도 적어도 상?부대의 영창 신세를 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6개월간 우리 중대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고, 그에겐 ‘야당’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선배의 심각한 복무규율 위반이 찻잔 속 폭풍에 그친 건 세 가지 이유에서다. 1. 엄청난 일이 별일 아닌 것으로 넘어가고 사소한 일이 엄청 부풀려지는 게 군대의 속성이다. 2. 선임하사에서 중대장 대위까지 우리 중대 지휘관들은 그런 일로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게 싫었다. 3. 군 복무 중인 사병이 이념 문제로 보안대에 끌려가는 것은 입대하기 전 사회생활의 연장선이지, 일개 사병이 자생적으로 조직사건에 엮이는 경우는 없다. 드물다. 당시 한편으론 선배가 무사하리라 낙관했다.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생물학자 제임스 D. 왓슨의 자서전에서 DNA 연구, 여성 편력과 더불어 가모브는 왓슨의 삶의 한 축을 이룬다(『유전자, 여자, 가모브』, 이한음 옮김, 까치, 2004). 책을 안 봐서 두 과학자의 우정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모르지만 가모브가 괴팍한 과학자로 소문난 왓슨과 친하게 지낸 비결이 궁금하다.
울람이 본 가모브
『조지 가모브』의 권말에 수록된 「내 친구 가모브 박사」는 수학자 스타니슬라브 울람의 가모브 인물론이자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바치는 헌사다. 울람은 가모브가 사물을 간결하게 정식화하는 “뛰어난 재주,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 중에서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또 울람은 가모브가 쓴 책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자연스러운 사상(idea)의 흐름, 간결하고 분명한 소재의 표현, 쉽지만 장황하지 않고, 흥미롭지만 결코 불성실하지 않은 문체”를 든다. 그러면서 『조지 가모브』를 통해 가모브의 육필원고가 발산하는 매혹적인 오자(誤字)의 향연을 독자들에게 못 보여주는 것을 아쉬워한다.
“오늘날 이미 고전이 된 물리학사 및 자연과학의 새로운 개념들을 다룬 그의 여러 저서들에는 그가 동료 물리학자들에 대해 갖고 있던 태도가 악의나 혹독한 평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었고, 항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위해 칭찬을 아껴두었다. 그러나 그는 범재에 대해서는 비판하거나 심지어는 지적조차 하지 않았다.”
울람이 꼽은 가모브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다. 과학 대중화에 이바지하고, 현대물리학의 기초를 닦는 데 그의 우주론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생물학 발전에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일반인을 위한 교양과학서를 20여 권이나 펴낸 가모브는 자서전에서 대중과학서 쓰기를 즐기느냐고 스스로 묻고 “그렇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대중과학서 집필이 주된 직업이냐는 자문에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과학 대중화
“나의 주된 관심은 자연의 문제를 공략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이 물리학적인 문제이든 천문학적인 문제이든, 아니면 생물학적인 문제이든 말이다. 그러나 과학 연구를 ‘잘 해나가려면’ 영감, 즉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나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매일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연구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을 때 책을 쓴다. 과학 연구를 위한 생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집필이 느려진다.”
아무튼 톰킨스를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연작은 요즘 경영?처세서 분야에서 유행하는 스토리 텔링 서적을 연상케 한다. 1937년부터 쓰기 시작한 ‘톰킨스 시리즈’에서 가모브는 평범한 인물을 앞세워 과학의 복잡한 개념을 설명한다. 가모브가 내세운 주인공은 호기심 많고 이해력은 풍부하나 과학지식이 없는 은행원이다.
가모브는 그가 미국을 처음 찾았을 때 앤아버에서 만난 수학과 대학원생에게서 톰킨스의 이름을 따왔다. 또한 가모브는 “그 이야기에서 톰킨스가 본 기묘한 사물들을 그에게 설명하기 위해 전통적인 백발의 교수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 번째 톰킨스 이야기 원고를 잡지사 서너 곳에 보냈으나 잡지사는 번번이 게재를 거절한다.
톰킨스 이야기 원고는 할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찰스 다윈의 제안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출판부가 펴내는 잡지 <디스커버리>의 편집자이며 『두 문화』의 저자이기도 한 C.P. 스노우에게 보내져 발표 지면을 잡는다. 『조지 가모브, 물리열차를 타다』(승영조 옮김, 승산, 2001)는 그렇게 시작한 초창기 톰킨스 시리즈 두 권을 한데 묶었다. 물리학자로선 보기 드물게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가모브는 자기 책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보어 연구소의 문장(紋章)을 도안하기도 한다.
다음은 어째서 과학 대중화에 뛰어들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가모브의 ‘부정확한’ 답변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내가 사물을 명료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서 사물을 단순화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이해시키는 방법을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빅뱅이론의 창시자
가모브는 우주의 시원을 밝힌 빅뱅이론을 생각해낸 물리학자다. 스타니슬라브 울람은 “원자의 방사성 붕괴에 대한 설명과 우주의 폭발적인 탄생(bing bang),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기초로 전개된 은하의 형성과정에 대한 선구적인 업적을” 가모브에게 돌린다.
‘과학자들이 들려주는 과학이야기’로 출간된 『가모브가 들려주는 우주론 이야기』(곽영직 지음, 자음과모음, 2006)와 『가모브가 들려주는 원소의 기원 이야기』(김충섭 지음, 자음과모음, 2006)는 물리학자 가모브가 남긴 업적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우주가 수백억 도가 넘는 고온에서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지금도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빅뱅이론의 골자다. 빅뱅의 근거가 되는 우주배경복사는 “우주에 남아 있는 대폭발의 흔적, 대폭발의 메아리”를 말한다.
물리학과 생물학은 동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의 기반을 다진 에르빈 슈뢰딩거처럼 생물학과의 만남을 시도한 물리학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1954년 가모브는 생물과학 영역으로 터무니없는 일탈을 감행한다.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DNA 분자구조를 발견한 후, 가모브는 네 종류의 기호로 이뤄진 세 가지 문자부호가 생명과정의 전개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제창한다. 크릭은 가모브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가모브 연구의 중요성은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암호화의 추상이론이고, 그가 이중나선 DNA가 단백질 합성의 주형(鑄型)이라는 사고를 기반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이 불필요한 수많은 화학적 세부사항들로 어지러운 난장판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명확히 지적한 것은 부분적으로 겹치는 암호가 아미노산의 서열에 제한을 부과하며, 이미 알려진 아미노산 서열을 연구함으로써 여러 가지 중첩 암호들을 증명하거나 최소한 반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스타니슬라브 울람은 가모브가 무엇보다 과학연구에서 작용한 대규모 아마추어리즘의 마지막 사례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울람의 가모브 인물론인 「내 친구 가모브 박사」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지 가모브』는 또 하나의 빼어난 과학자 자서전이다. 여러모로 찰스 다윈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이한중 옮김, 갈라파고스, 2003)에 필적한다.
판면은 조밀한 데다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시대를 산 과학자들의 이름 표기가 낯설어 약간 거슬리기도 했지만, 슬렁슬렁 책장을 넘겨봤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 지식과 마음가짐이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췄나 보다. 대화 형식의 자서전에서 하이젠베르크와 그가 불러낸 과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20세기 전반, 원자물리학을 개척하여 물리학의 황금기를 활짝 꽃피운 과학자들이다. 과학 천재들이 군웅할거 하여 겨루는 양상은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이론과 상상력으로 무장한 그들은 대화와 토론과 논쟁을 통해 상대를 논박하여 제압하려 든다. 그런 과정에서 도출된 과학 이론은 검증을 받고 새로운 이론으로 성립한다.
물리학의 황금기
“독일 소장파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1900년 12월 14일 독일물리학회에서 플랑크 상수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흑체복사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함으로써 에너지 덩어리가 정수배로 움직인다는 양자론을 선포했다. 과학계는 이를 고전물리학 만능시대를 마감하는 신호탄으로 평가하고 있다.”(제2권 8호 1면 머리기사에서)
“닐스 보어는 아이슈타인의 논리 중 아인슈타인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의 결과인 중력장 아래서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점을 간과하였음을 지적하여 아인슈타인에게 한 방 멋지게 날렸다.”(제2권 9호 5면「논쟁은 보어가 ‘한수 위’」에서)
한정된 지면을 고려하더라도 러시아 출신 천체물리학자 조지 가모브는 『과학사 신문』에서 약간 소외된 느낌이다. 그의 공적이 뚜렷한 우주팽창론(10호 4면)과 빅뱅설(10호 7면) 관련기사와 DNA 특집(13호 5면)에서 가모브를 거명하지 않아서다. 이것은 가모브의 표현을 빌리면 “중요한 발견들이 두 명, 세 명 또는 몇 개의 연구 집단에 의해서 동시에 서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날로 늘어났다”는 과학발견의 추세와 무관하게 아쉽다.
‘지오르기 안토니치 가모프’
조지 가모브(George Anthony Gamow, 1904-1968)는 우크라이나 오데사 태생으로 1940년 미국 국적을 얻는다. 출생지 현지음을 살린 가모브의 퍼스트 네임과 세컨드 네임은 ‘지오르기 안토니치’다. 그는 자서전 『조지 가모브: 창세의 비밀을 알아낸 물리학자』(김동광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0)의 첫 번째 각주를 통해 자신의 성씨 알파벳 표기와 발음에 얽힌 사연을 전한다.
“이 이름의 정확한 발음식 표기는 Gamov이다. 여기에서 a는 mama나 papa의 경우와 같은 a이다. 만약 내가 러시아에서 곧장 영국이나 미국으로 갔다면, 나는 내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w가 아니라 v로 적었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내 이름을 라틴어 알파벳으로 나타낸 것은 독일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어로 v는 영어로 f와 비슷하게 발음되고, w는 영어의 v와 비슷하게 발음된다.”
인터넷상의 서지정보는 ‘가모브’와 ‘가모프’가 섞여 있어 속단하긴 이르나, 가모브의 대중을 위한 과학 교양서가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할 무렵의 우리말 이름 표기는 ‘G. 가모프’였던 것 같다. 1973년 전파과학사의 ‘현대과학신서’로 가모브의 책 네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중력: 고전적 및 현대적 관점』(박승재 옮김), 『우주의 창조 빛과 물질의 역사』(현정준 옮김),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톰킨스 씨의 물리학적 모험』(정문규 옮김), 『물리학을 뒤흔든 30년』(김정흠 옮김)이 그것이다. 대부분 절판되거나 품절 상태라서 구하기 어렵다.
가모브의 자서전은 구소련 초기만 해도 러시아 과학계가 유럽 과학계에 포함되고, 러시아 과학자는 서부 유럽의 과학자와 활발히 교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모브는 그런 대표적 인물이다. 가모브도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처럼 덴마크의 ‘국민적 영웅’ 닐스 보어의 우산 아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보어를 정점으로 한 ‘코펜하겐 그룹’이 아니라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 휘하의 ‘캐번디시 패밀리’에 자신을 위치 짓는다.
위트 넘치는 과학자
“내가 나의 학문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늘어놓아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라는, 레닌그라드 대학에 다니던 시절을 회고하는 대목에 나오는 그의 염려는 군걱정이다. 가모브의 자서전은 명랑 담백하다.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이지만, 유머러스한 일화가 자주 나온다. 그는 위트 넘치는 익살스러운 과학자다.
독일 괴팅겐 대학 유학 시절, 가모브는 포텐셜 벽에 대한 이론을 세우고자 파동역학적 투과확률을 나타내는 간단한 식을 썼다가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 공식으로 값을 구하려면 루트 1 빼기 r분의 a의 적분을 해야 했지만 계산하는 방법을 몰랐다. 하여 가모브는 역시 괴팅겐에서 그해 여름을 보내던 러시아 수학자 코트시친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는 내가 이 적분 계산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어서 그렇게 초보적인 계산을 할 수 없는 학생에게는 학점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관련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가모브는 친구이기도 한 코트시친이 수학 문제의 해결을 도와준 것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 논문이 발표된 후 그는 내게 편지를 써서 가모브에게 어떤 고급 수학을 도와주었느냐는 질문을 받아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러시아에서의 이력과 관련된 일화는 까딱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1940년대 후반, 가모브는 미 당국의 ‘신원조회’에 통과하여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한다. 그런데 미 의회의 악명 높은 매카시 청문회에 불려갈 위기에 놓인다. 미국 원자력위원회(AEC)의 허술한 보안을 문제 삼으려는 매카시 상원의원이 가모브의 이력을 추궁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가모브는 자신의 이력을 스스럼없이 발설한다.
러시아혁명이 낳은 소비에트 공화국 초기, 가모브는 포병학교 교관으로 적위군의 야전포병 대령을 지냈다. 원자력위원회 보안국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은 가모브는 로스앨러모스 과학연구소를 드나드는 보안국 책임자의 신문을 받는다. 가모브는 보안국 책임자의 질문에 가감 없이 분명하게 답한다. 그러자 보안국 책임자는 양쪽 귀를 막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가모브가 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군 복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보안국 책임자는 즉시 워싱턴에 있는 원자력위원회 안전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가 없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나서 가모브와 보안국 책임자, 그리고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은 매카시를 위해 술잔을 든다.
만일, 가모브가 매카시 청문회에 불려갔다면, 그는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 소련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한 로젠버그 부부와 같은 최악의 상황을 맞지는 않더라도 심한 고초를 겪었을 것은 분명하다.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라는 보안국 책임자의 중얼거림은 가모브의 평소 행동거지를 짐작하게 한다.
군 복무 시절, 이런 일이 있었다. 마음이 잘 맞아 따르던 선임병의 관물대에서 C.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비롯한 이념서적 6권이 발견돼 내무반이 발칵 뒤집혔다. 요즘도 가끔 만나는 학생운동권 출신 선배가, ‘남한산성’까진 안 가더라도 적어도 상?부대의 영창 신세를 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6개월간 우리 중대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고, 그에겐 ‘야당’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선배의 심각한 복무규율 위반이 찻잔 속 폭풍에 그친 건 세 가지 이유에서다. 1. 엄청난 일이 별일 아닌 것으로 넘어가고 사소한 일이 엄청 부풀려지는 게 군대의 속성이다. 2. 선임하사에서 중대장 대위까지 우리 중대 지휘관들은 그런 일로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게 싫었다. 3. 군 복무 중인 사병이 이념 문제로 보안대에 끌려가는 것은 입대하기 전 사회생활의 연장선이지, 일개 사병이 자생적으로 조직사건에 엮이는 경우는 없다. 드물다. 당시 한편으론 선배가 무사하리라 낙관했다.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생물학자 제임스 D. 왓슨의 자서전에서 DNA 연구, 여성 편력과 더불어 가모브는 왓슨의 삶의 한 축을 이룬다(『유전자, 여자, 가모브』, 이한음 옮김, 까치, 2004). 책을 안 봐서 두 과학자의 우정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모르지만 가모브가 괴팍한 과학자로 소문난 왓슨과 친하게 지낸 비결이 궁금하다.
울람이 본 가모브
『조지 가모브』의 권말에 수록된 「내 친구 가모브 박사」는 수학자 스타니슬라브 울람의 가모브 인물론이자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바치는 헌사다. 울람은 가모브가 사물을 간결하게 정식화하는 “뛰어난 재주,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 중에서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또 울람은 가모브가 쓴 책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자연스러운 사상(idea)의 흐름, 간결하고 분명한 소재의 표현, 쉽지만 장황하지 않고, 흥미롭지만 결코 불성실하지 않은 문체”를 든다. 그러면서 『조지 가모브』를 통해 가모브의 육필원고가 발산하는 매혹적인 오자(誤字)의 향연을 독자들에게 못 보여주는 것을 아쉬워한다.
“오늘날 이미 고전이 된 물리학사 및 자연과학의 새로운 개념들을 다룬 그의 여러 저서들에는 그가 동료 물리학자들에 대해 갖고 있던 태도가 악의나 혹독한 평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었고, 항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위해 칭찬을 아껴두었다. 그러나 그는 범재에 대해서는 비판하거나 심지어는 지적조차 하지 않았다.”
울람이 꼽은 가모브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다. 과학 대중화에 이바지하고, 현대물리학의 기초를 닦는 데 그의 우주론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생물학 발전에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일반인을 위한 교양과학서를 20여 권이나 펴낸 가모브는 자서전에서 대중과학서 쓰기를 즐기느냐고 스스로 묻고 “그렇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대중과학서 집필이 주된 직업이냐는 자문에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과학 대중화
“나의 주된 관심은 자연의 문제를 공략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이 물리학적인 문제이든 천문학적인 문제이든, 아니면 생물학적인 문제이든 말이다. 그러나 과학 연구를 ‘잘 해나가려면’ 영감, 즉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나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매일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연구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을 때 책을 쓴다. 과학 연구를 위한 생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집필이 느려진다.”
아무튼 톰킨스를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연작은 요즘 경영?처세서 분야에서 유행하는 스토리 텔링 서적을 연상케 한다. 1937년부터 쓰기 시작한 ‘톰킨스 시리즈’에서 가모브는 평범한 인물을 앞세워 과학의 복잡한 개념을 설명한다. 가모브가 내세운 주인공은 호기심 많고 이해력은 풍부하나 과학지식이 없는 은행원이다.
가모브는 그가 미국을 처음 찾았을 때 앤아버에서 만난 수학과 대학원생에게서 톰킨스의 이름을 따왔다. 또한 가모브는 “그 이야기에서 톰킨스가 본 기묘한 사물들을 그에게 설명하기 위해 전통적인 백발의 교수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 번째 톰킨스 이야기 원고를 잡지사 서너 곳에 보냈으나 잡지사는 번번이 게재를 거절한다.
톰킨스 이야기 원고는 할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찰스 다윈의 제안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출판부가 펴내는 잡지 <디스커버리>의 편집자이며 『두 문화』의 저자이기도 한 C.P. 스노우에게 보내져 발표 지면을 잡는다. 『조지 가모브, 물리열차를 타다』(승영조 옮김, 승산, 2001)는 그렇게 시작한 초창기 톰킨스 시리즈 두 권을 한데 묶었다. 물리학자로선 보기 드물게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가모브는 자기 책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보어 연구소의 문장(紋章)을 도안하기도 한다.
다음은 어째서 과학 대중화에 뛰어들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가모브의 ‘부정확한’ 답변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내가 사물을 명료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서 사물을 단순화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이해시키는 방법을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빅뱅이론의 창시자
가모브는 우주의 시원을 밝힌 빅뱅이론을 생각해낸 물리학자다. 스타니슬라브 울람은 “원자의 방사성 붕괴에 대한 설명과 우주의 폭발적인 탄생(bing bang),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기초로 전개된 은하의 형성과정에 대한 선구적인 업적을” 가모브에게 돌린다.
‘과학자들이 들려주는 과학이야기’로 출간된 『가모브가 들려주는 우주론 이야기』(곽영직 지음, 자음과모음, 2006)와 『가모브가 들려주는 원소의 기원 이야기』(김충섭 지음, 자음과모음, 2006)는 물리학자 가모브가 남긴 업적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우주가 수백억 도가 넘는 고온에서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지금도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빅뱅이론의 골자다. 빅뱅의 근거가 되는 우주배경복사는 “우주에 남아 있는 대폭발의 흔적, 대폭발의 메아리”를 말한다.
물리학과 생물학은 동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의 기반을 다진 에르빈 슈뢰딩거처럼 생물학과의 만남을 시도한 물리학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1954년 가모브는 생물과학 영역으로 터무니없는 일탈을 감행한다.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DNA 분자구조를 발견한 후, 가모브는 네 종류의 기호로 이뤄진 세 가지 문자부호가 생명과정의 전개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제창한다. 크릭은 가모브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가모브 연구의 중요성은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암호화의 추상이론이고, 그가 이중나선 DNA가 단백질 합성의 주형(鑄型)이라는 사고를 기반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이 불필요한 수많은 화학적 세부사항들로 어지러운 난장판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명확히 지적한 것은 부분적으로 겹치는 암호가 아미노산의 서열에 제한을 부과하며, 이미 알려진 아미노산 서열을 연구함으로써 여러 가지 중첩 암호들을 증명하거나 최소한 반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스타니슬라브 울람은 가모브가 무엇보다 과학연구에서 작용한 대규모 아마추어리즘의 마지막 사례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울람의 가모브 인물론인 「내 친구 가모브 박사」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지 가모브』는 또 하나의 빼어난 과학자 자서전이다. 여러모로 찰스 다윈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이한중 옮김, 갈라파고스, 2003)에 필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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