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불안정했던 열여덟 살, 그때 만난 『상실의 시대』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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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고등학생 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공부하는 걸 싫어했을까?’란 의문이 들 만큼 공부와는 완벽하게 담을 쌓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 열심히 세계사를 공부할 때 좋아하는 록 밴드의 계보 외우기에 한창이었고, 친구들이 영어 성적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문법책을 들출 땐 뜻도 모르는 가사와 곡 순서를 외우기 위해 부클릿을 펼쳤으며, 모두가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맨 뒷자리에 앉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보노의 목소리에 심취하곤 술에 취해 무대 위에 오르는 뮤지션처럼 몽롱한 상태로 그림 그린 기억밖에는 없으니까요.

수업이 끝나면, 여학생과 데이트하느라 바빴고, 열여덟 살 나이로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만나던 이성과 안 좋게 헤어지면서 ‘이런 게 가슴이 아프다는 건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상처라 말하는 종류의 감정이라는 게 별것 아니구나.’라고 당시의 청소년은 아주 쉽고 가볍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면서 경험해 볼 수 있었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상처에 대한 아픔이라든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 버렸을 때의 상실감, 타인과의 관계에선 100퍼센트 완벽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에서 밀려오는 서글픔 같은 복잡한 심경의 변화를 책 한 권을 통해 느껴본 적이 있었는데, 그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입니다.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교실 한구석에서 숨기기도 힘든 두꺼운 책을 교묘하게 숨겨 가며 전부 읽고는 심장의 반쪽을 누가 도려낸 것 같은 아픔과 함께, 모두가 컬러로 존재하는 세상에 혼자 흑백인 상태로 살아가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꼈고, 귀에서는 누군가 종이라도 세게 치고 사라진 것 같은 무언의 울림을 들을 수 있었으며, 몸은 커널패닉이라도 걸린 것처럼 경직된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 안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을 때 느껴지는 공허란 이런 것인가?
내 심장은 멀쩡히 뛰고 있는데, 누군가 칼로 상처를 내어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것 같은 이 아픔은 무엇인가?
내 몸 구석구석에 구멍을 뚫고 통과하는 바람처럼, 차갑고 기묘한 스산함과 외로움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불안정했던 열여덟 살. 인격이 완성되어가는 가장 중요한 시기, 주위의 사소한 것에도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그런 인성이었기에 『상실의 시대』 한 권으로 심장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가끔 펼쳐놓고 구석구석 조금씩 읽고 있노라면 내면의 실타래가 무엇 하나 제대로 풀려있지 않던 열여덟 살의 복잡한 나 자신을 돌이켜볼 수 있고. 그때의 봄날 오후와 같은 햇살과, 심장까지 닿을 것만 같았던 깊은 한숨까지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도 좋아하지만, 93년에 한양출판에서 나온 김난주 씨 번역의 『노르웨이의 숲』도 매우 좋아합니다. 물론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겠지만 말이에요.

아 참, ‘상실의 시대’ 하니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데, 제 지인 중 한 사람은 『상실의 시대』를 무척 재밌게 읽은 나머지, 번역본이 아닌 원본을 꼭 읽어보고 싶다며 일본어 공부를 몇 년 열심히 하고는 원서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을 읽으며 매우 흡족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를 좀 더 먹고는 번역 일을 종종 하기도 하면서 말이죠.

지켜보던 저로서도 무언가 의욕이 불끈 생겨서는 ‘나도 일본어 공부해서 하루키 책을 전부 읽겠어!’라며 의욕적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지만, 어느덧 U2의 신보에 귀 기울이며 일본어 교재 위로는 부클릿이 올라와 있고 오른손으론 교재 구석에 낙서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라며 시무룩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들의 방황,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하루키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연 장편 소설 <상실의 시대>는 일본에서 6백만 부의 판매 기록을 세운 빅 베스트셀러이자 국내에서도 스무 살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는 작품이다.
10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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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guerite163

2007.10.17

이 책은 제가 유일하게 원본과 번역본을 모두 읽고 소장중인 책이죠..93년 모음사출판 김난주씨번역본과 1987년상 ,하2권의원본(표지가빨강,초록)인데 개인적으로 현재 상실의시대로나온 개정판보다 원제목과도 같은 김난주씨의 번역본이 훨씬 원본에 가깝게 작가의 글을 옮겨 놓았다고 생각해요.구할수 있으면 김난주씨의 번역본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작년 여름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보았는데 학생이 집에 상실의시대가 있다고 내려 놓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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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글뱅이

2007.09.24

제가 한때 무척 좋아했던 영어선생님께서 무라카미하루키의 팬이셨죠. 그래서 저도 덩달아 <상실의 시대>를 밤새워 읽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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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rbet

2007.09.15

오오오 김난주씨 번역본이 따로 있었군요. 아..그걸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절판이라니 아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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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저/<유유정> 역

출판사 | 문학사상

ノルウェイの森(上)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 |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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