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쁜 것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2008년의 겨울은 어떻게 기억될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문장에 그은 밑줄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 “눈물은 우정이라는 한 단어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당신을 미워하는 소년보다 더 나쁜 유일한 것. 당신을 사랑하는 소년.”
200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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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떠나는 계절은 매섭게 한 번 더 추위를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다. 꽃샘추위라는 건 그런 뜻이다. 이제 우리가 한동안은 벌벌 떨면서 지내지 않아도 좋다는 것. 그래서 마지막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인상적이다. 그래서 한겨울의 바람보다 초봄의 차가운 바람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면 늘 잠을 설친다.
어떤 소설을 일러 좋은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소설책이 그처럼 두꺼운 이유도 마지막 페이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가 궁금한 한에는 제 아무리 두꺼운 소설책이라도 다 읽을 수밖에 없다. 내가 좋은 소설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나는 힘겹게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 누구라도 처음 100페이지는 힘들다. 대개는 거기서 판단이 선다. 100페이지가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달라진다. 이야기에 빠지는 순간부터 나는 벌써 마지막 장면을 읽는 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대개 50페이지 정도가 남으면 나는 독서를 그만둔다.
내가 가장 최근에 소설을 읽다가 그만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리젤의 집 지하실에서 숨어 지내던 유대인 막스 판덴부르크가 다하우 수용소로 가는 행렬에 서 있다. 리젤은 그 행렬 속으로 들어간다. 병사들은 리젤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막스를 채찍으로 후려친다. 리젤은 채찍을 맞는 막스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물론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로. 우리가 심장으로 들어야만 하는 언어의 형태로.
눈사람 기억나요, 막스?
눈사람?
지하실에서?
심장이 잿빛인 흰 구름 기억나요?
퓌러는 지금도 가끔 막스를 찾아 내려와요. 당신을 보고 싶어해요. 우리 모두 당신이 보고 싶어요.
찰싹. 찰싹.
좋은 소설의 문장은 마지막 장면을 향해 나아갈수록 시가 된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모든 인생이 담기게 된다. 막스가 쓰러진 뒤에 독일군 병사는 이제 리젤에게 채찍을 휘두른다. 리젤에게도 많은 나날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누군가에게 세게 맞았으면 하고 생각했던 날도 있었다. 채찍을 맞으며 리젤은 그런 날들을 생각한다. 리젤이 쓰러지자, 독일군은 막스를 일으켜 세운다. 다시 행렬은 전진하다. 다하우로. 죽음의 수용소로. 다시 일어난 리젤은 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이웃집 소년 루디 슈타이너는 그런 리젤을 뒤쫓아가 넘어뜨린다. 소녀는 소년에게 주먹질을 한다. 이번에는 소년이 그 주먹을 고스란히 맞는다.
마커스 주삭이 쓴 『책도둑』 제2권의 300페이지를 펼치면 앞뒤로 이런 장면을 읽을 수 있다. 이 장면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유대인과 소년과 소녀. 막스와 루디와 리젤.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왜냐하면 결국 나는 마지막 장면까지 다 읽었으므로. 이제는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시보다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므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죽을까?
『책도둑』을 펼치게 되면 우리가 당연히 읽을 수밖에 없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선 색깔.
그다음에 인간.
나는 보통 그렇게 본다.
적어도 그렇게 보려고 노력한다.
◆ 작은 진실 한 가지 ◆
당신은 죽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문장이 소설의 마지막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문장은 소설의 맨 처음에 나오는 게 옳다.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내가 50페이지를 남겨놓고 책을 덮는 까닭도 이와 유사하다.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당신은 죽을 것이다.” 그런 식이다. 소설은 끝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다시 책을 읽는가? 소설이 끝난다는 것은 알겠지만, 도대체 어떻게 끝난다는 것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야기가 아닐까. 당신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죽는단 말인가?
우리가 어떻게 죽는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달 monologue project’의 의 7번 트랙 ‘신수동 우리집’의 아코디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고. 이 음악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내는 평범한 나날들을 노래한다. 스무 번째 생일도, 처음으로 실연당한 날도, 첫 출근하는 날도 아닌 하루 종일 구름이 떠다녔던 유월의 수요일 같은 날들. 딱히 기억하기도 힘든 날들. 아침에는 조금만 더 자고 싶었고, 저녁에는 바람이 시원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렇게 평범한, 하지만 이제는 지나간 날들.
아마도 우리는 이런 날들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죽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을 향해 돌진하면서 소설의 문장이 시가 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했던 나날들이 얼마나 눈부신 시절들이었는가를 깨닫는 순간,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공들여 닦은 유리잔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기 때문이다. 시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그 대상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테지.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죽는다. 『책도둑』의 마법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죽을 것이다.”로 시작한 소설이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끝난다.
리젤이 나왔다. 그들은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 장면에 이르면 ‘신수동 우리집’에서 흘러나오던 그 아코디언 소리가 머릿속을 맴돌게 되리라.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하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우리가 한때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세상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태우는 별들이 하늘에 떠 있고, 동생의 죽음을 영원히 기억하게 만드는 책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선물이 되는 솔방울과 리본과 단추와 돌멩이와 깃털과 신문지와 사탕 껍질과 구름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죽을까? 그 물음은 곧 ‘우리는 어떻게 살까?’와 마찬가지다.
다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사는 걸까?
다음은 리젤 메밍거가 1943년에 매일 밤 지하실에서 쓴 책 『책도둑』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이 구절들을 읽기 전에 음악을 10번 트랙 ‘나비의 집’으로 바꾸자. 이번에는 반도네온 선율이다. 아코디언과 반도네온은 사촌 사이지만, 반도네온의 눈빛이 더 우울하다. 반도네온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42페이지.
오늘밤에는 아빠가 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 아코디언을 가지고 내려와 막스가 앉곤 하던 자리 가까운 곳에 앉았다. 나는 아빠가 연주할 때면 손가락과 얼굴을 자주 본다. 아코디언은 숨을 쉰다. 뺨에는 주름이 있다. 주름은 잡아당겨놓은 것 같다. 웬일인지 그 주름을 보면 울고 싶어진다. 슬프거나 자랑스러워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주름이 움직이고 바뀌는 모습이 좋다. 가끔 아빠가 아코디언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빠가 나를 보고 웃고 숨을 쉬면 음악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175페이지.
책 한 권이 암페르 강을 따라 둥둥 떠내려갔다. 한 소년이 강물에 뛰어들더니 책을 따라잡아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소년은 싱긋 웃었다. 소년은 허리까지 오는, 얼음처럼 차가운 12월의 물에서 몸을 일으켰다. “뽀뽀 한 번 어때, 자우멘슈?” 소년이 말했다.
우리는 아코디언 소리를 들으며, 혹은 뽀뽀 한 번만 해달라며 조르는 남자애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곧 그 소리들은 기억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비의 집’에서, 현악기들의 선율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반도네온 소리처럼, 그 소리들은 살아가는 동안 문득문득 들려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한 번 더 사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번 살아간다. 한 번 죽고, 여러 번 산다. 1943년의 이야기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마커스 주삭에게 연결돼 긴 소설로 다시 씌어진 것처럼. 그리고 그 소설을 우리가 읽는 것처럼. 이야기는 여러 번 읽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들의 인생은 다시 시작한다.
2008년의 겨울은 어떻게 기억될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문장에 그은 밑줄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 “눈물은 우정이라는 한 단어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당신을 미워하는 소년보다 더 나쁜 유일한 것. 당신을 사랑하는 소년.” 더 나쁜 것들. 나를 울게 만드는 것들. 그게 바로 우정이라는 것. 아무리 바람이 차가워도 이제는 그 사실을 믿겠다.
어떤 소설을 일러 좋은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소설책이 그처럼 두꺼운 이유도 마지막 페이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가 궁금한 한에는 제 아무리 두꺼운 소설책이라도 다 읽을 수밖에 없다. 내가 좋은 소설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나는 힘겹게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 누구라도 처음 100페이지는 힘들다. 대개는 거기서 판단이 선다. 100페이지가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달라진다. 이야기에 빠지는 순간부터 나는 벌써 마지막 장면을 읽는 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대개 50페이지 정도가 남으면 나는 독서를 그만둔다.
내가 가장 최근에 소설을 읽다가 그만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리젤의 집 지하실에서 숨어 지내던 유대인 막스 판덴부르크가 다하우 수용소로 가는 행렬에 서 있다. 리젤은 그 행렬 속으로 들어간다. 병사들은 리젤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막스를 채찍으로 후려친다. 리젤은 채찍을 맞는 막스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물론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로. 우리가 심장으로 들어야만 하는 언어의 형태로.
눈사람 기억나요, 막스?
눈사람?
지하실에서?
심장이 잿빛인 흰 구름 기억나요?
퓌러는 지금도 가끔 막스를 찾아 내려와요. 당신을 보고 싶어해요. 우리 모두 당신이 보고 싶어요.
찰싹. 찰싹.
좋은 소설의 문장은 마지막 장면을 향해 나아갈수록 시가 된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모든 인생이 담기게 된다. 막스가 쓰러진 뒤에 독일군 병사는 이제 리젤에게 채찍을 휘두른다. 리젤에게도 많은 나날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누군가에게 세게 맞았으면 하고 생각했던 날도 있었다. 채찍을 맞으며 리젤은 그런 날들을 생각한다. 리젤이 쓰러지자, 독일군은 막스를 일으켜 세운다. 다시 행렬은 전진하다. 다하우로. 죽음의 수용소로. 다시 일어난 리젤은 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이웃집 소년 루디 슈타이너는 그런 리젤을 뒤쫓아가 넘어뜨린다. 소녀는 소년에게 주먹질을 한다. 이번에는 소년이 그 주먹을 고스란히 맞는다.
마커스 주삭이 쓴 『책도둑』 제2권의 300페이지를 펼치면 앞뒤로 이런 장면을 읽을 수 있다. 이 장면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유대인과 소년과 소녀. 막스와 루디와 리젤.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왜냐하면 결국 나는 마지막 장면까지 다 읽었으므로. 이제는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시보다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므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죽을까?
『책도둑』을 펼치게 되면 우리가 당연히 읽을 수밖에 없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선 색깔.
그다음에 인간.
나는 보통 그렇게 본다.
적어도 그렇게 보려고 노력한다.
◆ 작은 진실 한 가지 ◆
당신은 죽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문장이 소설의 마지막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문장은 소설의 맨 처음에 나오는 게 옳다.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내가 50페이지를 남겨놓고 책을 덮는 까닭도 이와 유사하다.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당신은 죽을 것이다.” 그런 식이다. 소설은 끝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다시 책을 읽는가? 소설이 끝난다는 것은 알겠지만, 도대체 어떻게 끝난다는 것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야기가 아닐까. 당신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죽는단 말인가?
우리가 어떻게 죽는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달 monologue project’의
아마도 우리는 이런 날들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죽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을 향해 돌진하면서 소설의 문장이 시가 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했던 나날들이 얼마나 눈부신 시절들이었는가를 깨닫는 순간,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공들여 닦은 유리잔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기 때문이다. 시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그 대상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테지.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죽는다. 『책도둑』의 마법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죽을 것이다.”로 시작한 소설이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끝난다.
리젤이 나왔다. 그들은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 장면에 이르면 ‘신수동 우리집’에서 흘러나오던 그 아코디언 소리가 머릿속을 맴돌게 되리라.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하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우리가 한때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세상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태우는 별들이 하늘에 떠 있고, 동생의 죽음을 영원히 기억하게 만드는 책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선물이 되는 솔방울과 리본과 단추와 돌멩이와 깃털과 신문지와 사탕 껍질과 구름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죽을까? 그 물음은 곧 ‘우리는 어떻게 살까?’와 마찬가지다.
다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사는 걸까?
다음은 리젤 메밍거가 1943년에 매일 밤 지하실에서 쓴 책 『책도둑』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이 구절들을 읽기 전에 음악을 10번 트랙 ‘나비의 집’으로 바꾸자. 이번에는 반도네온 선율이다. 아코디언과 반도네온은 사촌 사이지만, 반도네온의 눈빛이 더 우울하다. 반도네온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42페이지.
오늘밤에는 아빠가 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 아코디언을 가지고 내려와 막스가 앉곤 하던 자리 가까운 곳에 앉았다. 나는 아빠가 연주할 때면 손가락과 얼굴을 자주 본다. 아코디언은 숨을 쉰다. 뺨에는 주름이 있다. 주름은 잡아당겨놓은 것 같다. 웬일인지 그 주름을 보면 울고 싶어진다. 슬프거나 자랑스러워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주름이 움직이고 바뀌는 모습이 좋다. 가끔 아빠가 아코디언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빠가 나를 보고 웃고 숨을 쉬면 음악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175페이지.
책 한 권이 암페르 강을 따라 둥둥 떠내려갔다. 한 소년이 강물에 뛰어들더니 책을 따라잡아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소년은 싱긋 웃었다. 소년은 허리까지 오는, 얼음처럼 차가운 12월의 물에서 몸을 일으켰다. “뽀뽀 한 번 어때, 자우멘슈?” 소년이 말했다.
우리는 아코디언 소리를 들으며, 혹은 뽀뽀 한 번만 해달라며 조르는 남자애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곧 그 소리들은 기억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비의 집’에서, 현악기들의 선율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반도네온 소리처럼, 그 소리들은 살아가는 동안 문득문득 들려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한 번 더 사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번 살아간다. 한 번 죽고, 여러 번 산다. 1943년의 이야기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마커스 주삭에게 연결돼 긴 소설로 다시 씌어진 것처럼. 그리고 그 소설을 우리가 읽는 것처럼. 이야기는 여러 번 읽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들의 인생은 다시 시작한다.
2008년의 겨울은 어떻게 기억될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문장에 그은 밑줄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 “눈물은 우정이라는 한 단어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당신을 미워하는 소년보다 더 나쁜 유일한 것. 당신을 사랑하는 소년.” 더 나쁜 것들. 나를 울게 만드는 것들. 그게 바로 우정이라는 것. 아무리 바람이 차가워도 이제는 그 사실을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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