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빼앗으려는 남편을 고소한 여인
한 양반이 첩으로 삼은 여인을 다시 돈을 받고 팔아버린 것이다.
2008.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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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남녀 간의 사랑이 돈 때문에 일도양단으로 갈라져버린 일이 발생했었다. 한 양반이 첩으로 삼은 여인을 다시 돈을 받고 팔아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주인공은 바로 경이景伊였다. 그녀는 원래 기생으로, 기명이 탁문아卓文兒였다. 1468년(예종 즉위) 10월 남이南怡의 역모가 발각됐을 때 탁문아도 잡혀갔다. 남이의 첩기가 바로 탁문아였다. 남이는 탁문아의 첫번째 남편이었다. 예종은 남이의 옥사와 관련해 그가 소유하고 있던 처첩과 자녀를 공신에게 노비로 내려주었는데 탁문아는 신운申雲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신운은 예종에게 조심스럽게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탁문아는 임금을 모시던 궁녀였으므로 감히 계집종으로 부릴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예종은 이를 받아들여 의금부와 장례원에 명하기를 “신운에게 하사해준 기생 탁문아는 그대로 진해 관비로 정속하라”고 명했다. 탁문아는 신운에게 거절당해 두번째 남편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이름을 경이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꾸면 팔자가 달라진다고들 보통 말한다. 앞으로 경이는 세상살이가 달라지리라 기대했다. 미인이었던 그녀는 쉽게 혼처를 구했다. 강양군江陽君 이축李潚이 경이의 미색에 홀려 궁녀 출신인 것도 개의치 않고 첩을 삼은 것이다. 사람들은 욕했지만 이축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왕실의 친인척이었다. 이축의 어머니가 바로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언니였다. 그는 글을 잘하고 잡기에 능해서 항상 후원에서 왕을 모시고 활을 쏘는 등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1482년(성종 13) 당시 조정에서 출세를 거듭하던 실세 윤은로가 일을 벌였다. 안하무인격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이축의 첩이 아름다운 것을 알고 빼앗아 자기 소유로 삼았다. 이축은 감히 그와 맞서지 못했다. 게다가 그도 궁녀였던 경이를 간통해 첩으로 삼았기 때문에 도덕성을 논하기도 어려웠다.
윤은로는 본시 가정교육이 형편없는 데다 별다른 학식을 쌓지도 않았다. 오직 이익만을 도모해 승지가 되고, 이조참판이 됐다. 그 자리를 이용해 받은 뇌물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또 방납防納(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공물을 바치는데, 그 지방에서 생산할 수 없는 가공품이나 토산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납공인들의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갑절로 불려 받던 일.)으로 재화를 얻어 집을 사서 경이가 살게 했다. 그런데 경이와 2년쯤 부부로 살자 그만 싫증이 나버렸다. 윤은로의 애정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아니 애정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그 후로 그는 경이를 있는 듯 없는 듯 대했다. 때로는 모질게 구박해서 눈물을 빼게 만드는가 하면 새로운 첩을 구해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도 살을 맞대고 살았는데 정도 없이 경이를 전 주인에게 다시 넘겼던 것이다. 새로 얻은 첩이 기거할 집이 없어 돈을 받고 넘긴다는 게 이유였다. 천첩은 물건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경이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윤은로는 동지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에 있었다. 이렇게 높은 신분의 윤은로를 경이가 사헌부에 고소했다. 내용은 이랬다.
“2년 전에 윤은로가 나를 첩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필요 없어지니 본가에 팔아서 면포 158필을 챙겨갔습니다. 윤은로는 이 돈에다 시장 상인인 문장수文長守와 정막동鄭莫同에게 면포 각각 50필을 빌려 정선방貞善坊에 집을 샀습니다. 새로운 첩을 위해 집을 마련한 것입니다.”
윤은로는 높은 직책을 이용해 재력을 쌓은 걸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그는 반인伴人(공신이나 고급 관료를 따라다니면서 그 몸을 보호하던 병졸로 병조에서 이를 관장했다.) 박영생朴永生으로 하여금 사재감司宰監에 납부할 진주의 대구어大口魚를 가로채 팔아 면포 8동同을 얻었다. 이 가운데 100필은 문장수와 정막동에게 빌린 걸 갚고 일부는 박영생의 대구어 값으로 줬다. 이런 식으로 윤은로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다. 경이의 주장은 자신의 집을 산 자금이 윤은로의 재산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윤은로가 집을 빼앗으려고 갖은 방법을 쓰자 경이는 너무 괴로웠다. 사헌부에 고소해 어떻게든 억울함을 풀어보고자 했으나 노비에 불과한 신분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았다. 사헌부는 사건을 대충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경이는 다시 사건의 핵심 인물이 박영생이라며 이들을 직접 심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성종은 경이의 주장보다 윤은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윤은로는 이조참판 시절 방납으로 비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또다시 방납할 리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성종은 경이를 윤은로의 첩으로 이해했다. 비록 창녀이지만 윤은로와 같이 지낸 지 2년이 넘었다. 성종은 그녀가 첩으로 제대로 처신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질타했다. 하늘 같은 지아비를 사헌부에 고소해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은 풍교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성종은 경이와 윤은로의 고소 사건에 대해 먼저 한성부에서 조사한 후 누구의 죄가 큰 것인지를 정하겠다고 답을 내렸다.
사헌부에서는 성종이 경이를 첩으로 본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사헌부 지평 유인홍柳仁洪은 여러 법 조항을 조사해 경이를 윤은로의 첩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미 윤은로가 경이를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먼저 윤은로의 방납한 일을 심문해 일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러자 임금이 직접 명해 윤은로의 사건을 한성부로 옮기게 했다. 이에 대해 사헌부는 “그 명목이 풍교에 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 사안은 한성부에서 국문할 일이 아닙니다. 또한 방납과 관계된 일도 원래 한성부의 소관이 아닙니다.”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성종은 방납 혐의를 믿지 않았다.
“비록 하루를 동거했더라도 명분이 이미 정해진다. 하물며 집을 사서 여러 해를 동거했으니 당연히 첩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창기는 산닭과 물오리와 같아 비록 아침에 바꾸고 저녁에 변한다고 하나 이미 함께 동거하였다.”
왕은 윤은로의 일을 한성부에 내린 것은 의금부에는 이미 갇힌 자가 많고, 형조에도 추국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박영생의 처가 상언해 허물을 대사헌에게 돌렸다. 따라서 이 일은 한성부에 옮겨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이 같은 성종의 처리에 대해 이견이 많았다. 사간원 정언 이원성李元成은 “경이의 일이 풍교에 관계 있다면 사헌부에서 마땅히 추문해야 하는데 한성부로 옮겼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럼에도 성종은 굽히지 않았다. “풍교에 속한다고 해 한성부에 옮김이 불가하다면, 국가에서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직무를 나눈 것이 어찌 반드시 사헌부에만 적용되고 타사他司에는 적용될 수가 없겠는가?”
성종이 한성부로 옮기라고 명한 지 이틀이 지난 6월 13일 대사헌 정경조鄭敬祖?집의 민사건閔師騫?장령 민이閔??지평 유인홍이 함께 와서 조목조목 문제점을 아뢰었다.
“경이의 일이 풍교에 관계가 있다면 마땅히 본부에서 국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성부로 옮겼습니다. 게다가 사건의 관계자인 박영생 처의 주장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로 사건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경이는 윤은로가 버린 첩입니다. 당연히 법으로 다뤄야 합니다.”
성종은 여전히 윤은로의 편이었다.
“창녀를 첩으로 삼은 것은 잘못이지만 윤은로보다 경이의 죄가 크다. 경이는 버림받은 것에 앙심을 품고 옛 가장을 고소했다. 이 일은 지극히 박정하고 악독하다. 박영생의 처는 대사헌에서 경이와 함께 조사한다면 서로 친인척이라 상피된다고 지적해 부득이 한성부로 옮겼다. 그러나 윤은로가 방납했다는 일을 추문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사헌부에서 사건을 처리하면 대사헌과 상피되지 않는다.”
경이 사건의 논란은 상피제로 옮겨갔다. 정경조가 “상피하는 법이 대전大典에 실려 있으니, 만약 상피하는 게 부당하다면 어찌 피혐避嫌(헌사에서 논핵하는 사건에 관련이 있는 사람이 벼슬에 나가는 것을 피하던 일. 사건에서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함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사헌부에게 조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사헌부 관리들이 법을 집행하는 관원으로 피혐하지 않아야 하는 일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은 더욱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일에 윤은로의 방납한 일을 사헌부에서 추국해 거의 마친 상태였다. 박영생의 아내가 상언해 의금부에 옮기기를 청해 일이 해이해졌다. 박영생이 소장을 올린 것은 사헌부를 꺼려서 다른 부서로 옮기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정경조는 경이가 가장을 고소한 것은 그른 것이나 윤은로의 불법한 일도 풍교에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사헌부에서 추국할 수 없다면 사간원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전례를 봐도 풍교에 관계된 일을 한성부에서 추국한 일이 없었다. 이에 성종은 한발 물러서 윤은로 등을 국문하도록 했다.
이어 사헌부 지평 유인홍은 경이의 고발 사건보다 윤은로의 방납 사건을 먼저 처리할 것을 청했다. 즉 경이는 조사를 끝내고 법적 근거를 찾아 죄를 결정하고자 하는데 버림받은 첩이 가장을 고발한 율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비율比律(죄에 맞는 정조正條가 없을 때 비슷한 조문을 비의比擬하던 일. 조선조의 형사 제도는 원칙적으로 죄형법정주의였으나 법조문에 기재된 내용이 사리를 다하지 못했거나 죄를 결정할 조문이 없을 때는 비슷한 조문에 의거했다. 다만 형량을 가감하는 경우 형조를 통해 임금의 윤허를 받아야 했다.)하면 죄줄 만하나, 방납한 일이 무고誣告 처리되면 그 죄에 등급을 더할 것이므로 먼저 방납의 일을 추국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성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비록 정률正律은 없더라도 비율해 먼저 경이가 지아비인 윤은로를 고소한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유인홍은 자신을 다른 부서로 옮겨주길 청했다. 자신의 뜻과 사헌부의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유인홍의 청에 성종은 대사헌 정경조?민사건?조달생趙達生?민이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모두 유인홍과 같은 대답이었다. 성종은 유인홍의 청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유인홍을 다른 부서로 옮기도록 했다.
유인홍의 부서 이동을 보면서 사헌부 대사헌 황사효黃事孝도 피혐하기를 청했다. 사건의 원고는 고문을 하고, 피고는 탄원에 의해 고문을 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는 게 이유였다.
성종은 사헌부의 관료들이 연이어 피혐하기를 청하자 말렸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모두 경이에게 돌렸다. 성종은 “경이가 일찍이 남이의 첩이 되어 남이의 음사陰事를 고발했다. 그런데 또 지아비인 윤은로를 고발했으니 매우 불초한 사람이다. 경이가 또 박연생과 원척元隻(원고와 피고)을 만들었으니, 경이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며 경이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내비쳤다. 성종은 먼저 경이를 고문한 다음 박연생을 고문하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신들의 피혐 요청을 철회할 것을 명했다.
왕의 직접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6월에 시작된 경이의 논의는 10월이 되어서도 계속 이뤄졌다. 대신들의 시각과 왕의 입장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이때 대사헌 이의李誼가 경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윤은로의 방납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것이고, 박연생이 이미 모든 것을 복초服招(문초를 받고 순순히 죄상을 털어놓음)했습니다. 또한 경이를 고문한 것이 네 차례나 되옵니다. 경이는 자신의 죄가 아닌데도 매질에 죽을 수도 있사옵니다. 윤은로가 사헌부에서 제대로 조사받아야 할 것입니다. 윤은로를 다른 부서로 옮겨 사건을 대충 마무리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성종은 경이의 조사 보고서를 승정원에 보내면서 일렀다. “사헌부에서 이 일을 가지고 내가 윤은로에게 사정을 둔 것이라고 이르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다시 말하지 아니하려고 하였다.”
성종은 이 사건을 경이가 꾸민 이야기라고 보았다. 경이가 다른 계집종인 송이松伊에게 “복초하면 면포 20필을 주겠다.”고 유혹했으니 경이만 처벌하고, 박연생은 신문하지 않기를 바랐다. 성종은 이 처리 방법이 옳은지 의금부에 물었다.
12월 5일 의금부 판사 이극균李克均 등은 경이가 고소한 것을 밝힐 증거가 없다고 보고했다. 박연생과 송이가 경이에게 유혹당했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같이 죄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경이가 윤은로에게 집을 빼앗긴 일이 1488년(성종 19)에 있었고, 여러 번 사면을 받았으며, 당시 모든 것을 용서해 없앤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논의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아뢰었다.
성종은 “지금 만약 폐기한다면 윤은로를 방납으로 논하는 것인가?” 하며 끝까지 윤은로를 보호하고자 다시 물었다. 이극균은 경이가 사건을 꾸민 것으로 아뢰었다. 경이가 “면포 100필로 대구어 3100미尾를 사서 방납했다고 했지만, 100필의 면포로 어떻게 3100미의 대구어를 살 수 있겠습니까?” 하며 경이의 고소를 거짓으로 보았다.
성종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사헌부에서 ‘재상이 방납한 일을 가볍게 폐기할 수 없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추국하게 한 것이다. 이같이 몹시 추운 때에 혹 장을 받다가 죽는다면 옳지 못하니, 아울러 폐기하도록 하라.”
경이의 고소 사건은 6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아이러니하게 원고는 네 차례에 걸쳐 매질을 당했지만 피고는 한 번도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
윤은로에 대한 임금의 애정은 뜨거웠다. 창기로 출발해 네 명의 남자의 첩이 되었던 여자. 그녀의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노비와 첩 사이를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세상의 어떤 남자도 그녀를 한자리에 머물게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주인공은 바로 경이景伊였다. 그녀는 원래 기생으로, 기명이 탁문아卓文兒였다. 1468년(예종 즉위) 10월 남이南怡의 역모가 발각됐을 때 탁문아도 잡혀갔다. 남이의 첩기가 바로 탁문아였다. 남이는 탁문아의 첫번째 남편이었다. 예종은 남이의 옥사와 관련해 그가 소유하고 있던 처첩과 자녀를 공신에게 노비로 내려주었는데 탁문아는 신운申雲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신운은 예종에게 조심스럽게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탁문아는 임금을 모시던 궁녀였으므로 감히 계집종으로 부릴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예종은 이를 받아들여 의금부와 장례원에 명하기를 “신운에게 하사해준 기생 탁문아는 그대로 진해 관비로 정속하라”고 명했다. 탁문아는 신운에게 거절당해 두번째 남편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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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름을 경이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꾸면 팔자가 달라진다고들 보통 말한다. 앞으로 경이는 세상살이가 달라지리라 기대했다. 미인이었던 그녀는 쉽게 혼처를 구했다. 강양군江陽君 이축李潚이 경이의 미색에 홀려 궁녀 출신인 것도 개의치 않고 첩을 삼은 것이다. 사람들은 욕했지만 이축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왕실의 친인척이었다. 이축의 어머니가 바로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언니였다. 그는 글을 잘하고 잡기에 능해서 항상 후원에서 왕을 모시고 활을 쏘는 등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1482년(성종 13) 당시 조정에서 출세를 거듭하던 실세 윤은로가 일을 벌였다. 안하무인격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이축의 첩이 아름다운 것을 알고 빼앗아 자기 소유로 삼았다. 이축은 감히 그와 맞서지 못했다. 게다가 그도 궁녀였던 경이를 간통해 첩으로 삼았기 때문에 도덕성을 논하기도 어려웠다.
윤은로는 본시 가정교육이 형편없는 데다 별다른 학식을 쌓지도 않았다. 오직 이익만을 도모해 승지가 되고, 이조참판이 됐다. 그 자리를 이용해 받은 뇌물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또 방납防納(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공물을 바치는데, 그 지방에서 생산할 수 없는 가공품이나 토산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납공인들의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갑절로 불려 받던 일.)으로 재화를 얻어 집을 사서 경이가 살게 했다. 그런데 경이와 2년쯤 부부로 살자 그만 싫증이 나버렸다. 윤은로의 애정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아니 애정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그 후로 그는 경이를 있는 듯 없는 듯 대했다. 때로는 모질게 구박해서 눈물을 빼게 만드는가 하면 새로운 첩을 구해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도 살을 맞대고 살았는데 정도 없이 경이를 전 주인에게 다시 넘겼던 것이다. 새로 얻은 첩이 기거할 집이 없어 돈을 받고 넘긴다는 게 이유였다. 천첩은 물건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경이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윤은로는 동지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에 있었다. 이렇게 높은 신분의 윤은로를 경이가 사헌부에 고소했다. 내용은 이랬다.
“2년 전에 윤은로가 나를 첩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필요 없어지니 본가에 팔아서 면포 158필을 챙겨갔습니다. 윤은로는 이 돈에다 시장 상인인 문장수文長守와 정막동鄭莫同에게 면포 각각 50필을 빌려 정선방貞善坊에 집을 샀습니다. 새로운 첩을 위해 집을 마련한 것입니다.”
윤은로는 높은 직책을 이용해 재력을 쌓은 걸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그는 반인伴人(공신이나 고급 관료를 따라다니면서 그 몸을 보호하던 병졸로 병조에서 이를 관장했다.) 박영생朴永生으로 하여금 사재감司宰監에 납부할 진주의 대구어大口魚를 가로채 팔아 면포 8동同을 얻었다. 이 가운데 100필은 문장수와 정막동에게 빌린 걸 갚고 일부는 박영생의 대구어 값으로 줬다. 이런 식으로 윤은로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다. 경이의 주장은 자신의 집을 산 자금이 윤은로의 재산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윤은로가 집을 빼앗으려고 갖은 방법을 쓰자 경이는 너무 괴로웠다. 사헌부에 고소해 어떻게든 억울함을 풀어보고자 했으나 노비에 불과한 신분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았다. 사헌부는 사건을 대충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경이는 다시 사건의 핵심 인물이 박영생이라며 이들을 직접 심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성종은 경이의 주장보다 윤은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윤은로는 이조참판 시절 방납으로 비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또다시 방납할 리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성종은 경이를 윤은로의 첩으로 이해했다. 비록 창녀이지만 윤은로와 같이 지낸 지 2년이 넘었다. 성종은 그녀가 첩으로 제대로 처신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질타했다. 하늘 같은 지아비를 사헌부에 고소해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은 풍교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성종은 경이와 윤은로의 고소 사건에 대해 먼저 한성부에서 조사한 후 누구의 죄가 큰 것인지를 정하겠다고 답을 내렸다.
사헌부에서는 성종이 경이를 첩으로 본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사헌부 지평 유인홍柳仁洪은 여러 법 조항을 조사해 경이를 윤은로의 첩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미 윤은로가 경이를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먼저 윤은로의 방납한 일을 심문해 일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러자 임금이 직접 명해 윤은로의 사건을 한성부로 옮기게 했다. 이에 대해 사헌부는 “그 명목이 풍교에 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 사안은 한성부에서 국문할 일이 아닙니다. 또한 방납과 관계된 일도 원래 한성부의 소관이 아닙니다.”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성종은 방납 혐의를 믿지 않았다.
“비록 하루를 동거했더라도 명분이 이미 정해진다. 하물며 집을 사서 여러 해를 동거했으니 당연히 첩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창기는 산닭과 물오리와 같아 비록 아침에 바꾸고 저녁에 변한다고 하나 이미 함께 동거하였다.”
왕은 윤은로의 일을 한성부에 내린 것은 의금부에는 이미 갇힌 자가 많고, 형조에도 추국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박영생의 처가 상언해 허물을 대사헌에게 돌렸다. 따라서 이 일은 한성부에 옮겨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이 같은 성종의 처리에 대해 이견이 많았다. 사간원 정언 이원성李元成은 “경이의 일이 풍교에 관계 있다면 사헌부에서 마땅히 추문해야 하는데 한성부로 옮겼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럼에도 성종은 굽히지 않았다. “풍교에 속한다고 해 한성부에 옮김이 불가하다면, 국가에서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직무를 나눈 것이 어찌 반드시 사헌부에만 적용되고 타사他司에는 적용될 수가 없겠는가?”
성종이 한성부로 옮기라고 명한 지 이틀이 지난 6월 13일 대사헌 정경조鄭敬祖?집의 민사건閔師騫?장령 민이閔??지평 유인홍이 함께 와서 조목조목 문제점을 아뢰었다.
“경이의 일이 풍교에 관계가 있다면 마땅히 본부에서 국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성부로 옮겼습니다. 게다가 사건의 관계자인 박영생 처의 주장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로 사건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경이는 윤은로가 버린 첩입니다. 당연히 법으로 다뤄야 합니다.”
성종은 여전히 윤은로의 편이었다.
“창녀를 첩으로 삼은 것은 잘못이지만 윤은로보다 경이의 죄가 크다. 경이는 버림받은 것에 앙심을 품고 옛 가장을 고소했다. 이 일은 지극히 박정하고 악독하다. 박영생의 처는 대사헌에서 경이와 함께 조사한다면 서로 친인척이라 상피된다고 지적해 부득이 한성부로 옮겼다. 그러나 윤은로가 방납했다는 일을 추문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사헌부에서 사건을 처리하면 대사헌과 상피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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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 사건의 논란은 상피제로 옮겨갔다. 정경조가 “상피하는 법이 대전大典에 실려 있으니, 만약 상피하는 게 부당하다면 어찌 피혐避嫌(헌사에서 논핵하는 사건에 관련이 있는 사람이 벼슬에 나가는 것을 피하던 일. 사건에서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함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사헌부에게 조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사헌부 관리들이 법을 집행하는 관원으로 피혐하지 않아야 하는 일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은 더욱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일에 윤은로의 방납한 일을 사헌부에서 추국해 거의 마친 상태였다. 박영생의 아내가 상언해 의금부에 옮기기를 청해 일이 해이해졌다. 박영생이 소장을 올린 것은 사헌부를 꺼려서 다른 부서로 옮기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정경조는 경이가 가장을 고소한 것은 그른 것이나 윤은로의 불법한 일도 풍교에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사헌부에서 추국할 수 없다면 사간원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전례를 봐도 풍교에 관계된 일을 한성부에서 추국한 일이 없었다. 이에 성종은 한발 물러서 윤은로 등을 국문하도록 했다.
이어 사헌부 지평 유인홍은 경이의 고발 사건보다 윤은로의 방납 사건을 먼저 처리할 것을 청했다. 즉 경이는 조사를 끝내고 법적 근거를 찾아 죄를 결정하고자 하는데 버림받은 첩이 가장을 고발한 율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비율比律(죄에 맞는 정조正條가 없을 때 비슷한 조문을 비의比擬하던 일. 조선조의 형사 제도는 원칙적으로 죄형법정주의였으나 법조문에 기재된 내용이 사리를 다하지 못했거나 죄를 결정할 조문이 없을 때는 비슷한 조문에 의거했다. 다만 형량을 가감하는 경우 형조를 통해 임금의 윤허를 받아야 했다.)하면 죄줄 만하나, 방납한 일이 무고誣告 처리되면 그 죄에 등급을 더할 것이므로 먼저 방납의 일을 추국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성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비록 정률正律은 없더라도 비율해 먼저 경이가 지아비인 윤은로를 고소한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유인홍은 자신을 다른 부서로 옮겨주길 청했다. 자신의 뜻과 사헌부의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유인홍의 청에 성종은 대사헌 정경조?민사건?조달생趙達生?민이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모두 유인홍과 같은 대답이었다. 성종은 유인홍의 청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유인홍을 다른 부서로 옮기도록 했다.
유인홍의 부서 이동을 보면서 사헌부 대사헌 황사효黃事孝도 피혐하기를 청했다. 사건의 원고는 고문을 하고, 피고는 탄원에 의해 고문을 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는 게 이유였다.
성종은 사헌부의 관료들이 연이어 피혐하기를 청하자 말렸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모두 경이에게 돌렸다. 성종은 “경이가 일찍이 남이의 첩이 되어 남이의 음사陰事를 고발했다. 그런데 또 지아비인 윤은로를 고발했으니 매우 불초한 사람이다. 경이가 또 박연생과 원척元隻(원고와 피고)을 만들었으니, 경이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며 경이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내비쳤다. 성종은 먼저 경이를 고문한 다음 박연생을 고문하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신들의 피혐 요청을 철회할 것을 명했다.
왕의 직접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6월에 시작된 경이의 논의는 10월이 되어서도 계속 이뤄졌다. 대신들의 시각과 왕의 입장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이때 대사헌 이의李誼가 경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윤은로의 방납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것이고, 박연생이 이미 모든 것을 복초服招(문초를 받고 순순히 죄상을 털어놓음)했습니다. 또한 경이를 고문한 것이 네 차례나 되옵니다. 경이는 자신의 죄가 아닌데도 매질에 죽을 수도 있사옵니다. 윤은로가 사헌부에서 제대로 조사받아야 할 것입니다. 윤은로를 다른 부서로 옮겨 사건을 대충 마무리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
성종은 경이의 조사 보고서를 승정원에 보내면서 일렀다. “사헌부에서 이 일을 가지고 내가 윤은로에게 사정을 둔 것이라고 이르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다시 말하지 아니하려고 하였다.”
성종은 이 사건을 경이가 꾸민 이야기라고 보았다. 경이가 다른 계집종인 송이松伊에게 “복초하면 면포 20필을 주겠다.”고 유혹했으니 경이만 처벌하고, 박연생은 신문하지 않기를 바랐다. 성종은 이 처리 방법이 옳은지 의금부에 물었다.
12월 5일 의금부 판사 이극균李克均 등은 경이가 고소한 것을 밝힐 증거가 없다고 보고했다. 박연생과 송이가 경이에게 유혹당했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같이 죄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경이가 윤은로에게 집을 빼앗긴 일이 1488년(성종 19)에 있었고, 여러 번 사면을 받았으며, 당시 모든 것을 용서해 없앤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논의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아뢰었다.
성종은 “지금 만약 폐기한다면 윤은로를 방납으로 논하는 것인가?” 하며 끝까지 윤은로를 보호하고자 다시 물었다. 이극균은 경이가 사건을 꾸민 것으로 아뢰었다. 경이가 “면포 100필로 대구어 3100미尾를 사서 방납했다고 했지만, 100필의 면포로 어떻게 3100미의 대구어를 살 수 있겠습니까?” 하며 경이의 고소를 거짓으로 보았다.
성종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사헌부에서 ‘재상이 방납한 일을 가볍게 폐기할 수 없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추국하게 한 것이다. 이같이 몹시 추운 때에 혹 장을 받다가 죽는다면 옳지 못하니, 아울러 폐기하도록 하라.”
경이의 고소 사건은 6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아이러니하게 원고는 네 차례에 걸쳐 매질을 당했지만 피고는 한 번도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
윤은로에 대한 임금의 애정은 뜨거웠다. 창기로 출발해 네 명의 남자의 첩이 되었던 여자. 그녀의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노비와 첩 사이를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세상의 어떤 남자도 그녀를 한자리에 머물게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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