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세미나 - 중국 베이징
오늘 베이징 세미나에서 나눈 우리의 상상도 언젠가는 현실이 될지 모른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그게 바로 여행에서 우리가 깨달은 젊음이니까.
200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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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우리의 대장정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LA 국제공항을 나와 캘리포니아의 파란 하늘을 바라본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곳 베이징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1천 킬로미터도 되지 않는다. 귀국하기까지는 약 열흘간의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누구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에서 동고동락했던 모터사이클들은 톈진 항에서 인천으로 실어 보냈다. 남은 임무는 베이징 독도세미나를 통해 대장정을 멋지게 마무리하는 것이다. 사실 아시아를 지나는 동안 너무나도 오래 독도를 잊어 왔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때로는 공식적인 일정이 없고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그저 한 국가 한 국가 무사히 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이제는 다시 ‘독도라이더’로 돌아와 제 역할을 해내야 할 때이다.
한인학생회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의 양대 명문인 칭화대淸?大와 베이징대北京大에서 독도세미나를 추진했다. 칭화대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 내에서 세미나를 하려면 교수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칭화대 교수들이 세미나 주제가 민감하다는 이유로 불허해 버렸다는 것이다. 뒤이어 베이징대에서도 불허 소식이 들려 왔다. 솔직히 많이 실망스러웠다. 일반적인 자유주의 국가라면 이 정도 세미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역시 여기는 개방되었다 해도 공산주의 국가구나 싶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베이징대는 회의실을 유료로 빌릴 경우 교수의 허락 없이도 세미나를 열 수 있었다. 유료라도 그게 어디인가. 밥을 굶어서라도 열 수만 있다면 좋았다. 얼른 베이징대 영걸교류센터의 회의실을 세미나 장소로 예약했다. 그리고 한인학생회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대와 칭화대 곳곳에 세미나 홍보전단을 붙였다. 학생들이 자주 들어오는 인터넷 사이트에도 세미나 홍보 글을 띄웠다.
일단 일을 벌이자 하루하루가 무섭게 빨리 지나갔다. 그동안 금실이는 착실히 세미나 자료를 번역해 주었다. 승일이는 우리의 여행을 담은 동영상 파일을 제작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의 흥미를 끄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을 터였다. 나와 상균 형은 매일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를 뒤적였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먼저 일본 측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살펴보고 그 허구성에 대해서 토론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세미나 하루 전날,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공안에서 우리 세미나를 반대한대요. 회의실 예약도 취소됐어요.”
베이징대 한인학생회 부회장으로부터 온 다급한 전화였다. 그 사연은 이러했다. 칭화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독도세미나 홍보 글을 한 칭화대 교수가 발견한 것이다. 교수는 이 내용을 중국 공안에 알렸고, 공안은 바로 독도 세미나 개최를 금지하고 이 내용을 베이징대에 통보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공안은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 자체를 싫어한단다. 거기다 세미나 주제도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최근에 일본의 신임 아베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여 중-일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있으므로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사는 금지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 전에 이렇게 무산시켜 버리다니. 당황한 정도가 아니라 앞이 캄캄했다. 세미나 다음날 한국에 귀국할 계획으로 항공편까지 이미 구입해 놓은 터였다. 물론 모든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리라고 기대해 본 적은 없다. 지금까지 그러하지도 않았다. 매번 장애물은 어떤 일이 다 이루어졌다 싶은 순간 찾아와 마지막으로 발을 걸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했다. 하루 만에 무산된 세미나를 다시 여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여기까지 얼마나 고생해서 왔는데 세미나도 못 열고 가다니. 우리를 믿어준 사람들은 물론 먼저 인천으로 보낸 우리 애마들 볼 낯조차 없게 생겼다.
막무가내로 세미나를 강행할까 생각해보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건 우리만 걸려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준 한인학생회 친구들이 교수들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무작정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제발, 제발요. 어떻게든 안 될까요? 하지만 상황은 바늘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궁리해도 방도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인터넷에 세미나를 취소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참담했다. 돌아가고 늦어질지언정 포기는 없었는데 마지막에 와서 이렇게…….
해는 어김없이 졌고, 다시 떠올랐다. 드디어 세미나 당일이었다. 우리는 충혈된 눈으로 멍하니 베이징의 일출을 바라보았다.
“형, 우리 내일이면 한국 가는 거지?”
“응.”
“삼겹살에 구운 마늘 먹고 싶다.”
“좋지.”
“아니다. 옥 매트에 허리부터 좀 지져야겠다.”
“그것도 좋지.”
“…… 그런데, 형.”
“응?”
“왜 하나도 신이 안 나지?”
“…….”
우리는 한참이나 그렇게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한산하던 거리에 하나 둘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모두들 갈 곳이 있는 거겠지. 그래서 저렇게 바쁘게 걸어가는 거겠지. 허탈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중국 대륙을 하루도 쉬지 않고 가로질러 왔던 것일까.
하지만 언제까지 넋 놓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혹여 공지를 못보고 세미나 장소로 오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굳게 닫힌 문만이 그들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마지막 인상을 그렇게 남기고 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세미나 시간 동안 베이징대 영걸교류센터 회의실 앞을 지키고 있기로 했다.
아직 예정된 시작 시간은 1시간이나 남았는데 몇 명의 중국인 학생들이 세미나를 듣기 위해 찾아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그들에게 안타깝게도 세미나가 취소되었다며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독도엽서와 한국지도를 나누어 주었지만 그들은 적잖이 섭섭해 했다.
“꼭 듣고 싶어요. 여기서 못한다면 다른 데서 하면 안 되나요?”
우리와 일면식도 없고 한국인도 아닌데도 그들은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문득 이 몇 명을 위한 세미나라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규모 세미나가 아니면 어떤가. 하다못해 나무 그늘에서라도 우리의 얘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면 된 거 아닐까. 우리를 도와주었던 유학생 친구들도 수업이 끝나자 하나 둘씩 세미나실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들 이대로 무산될 수는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실이가 왔다. 아침에 밥도 안 먹고 나서는 우리를 걱정하던 그녀. 사정을 다 알면서도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직 시작 안 했어요?”
그래. 시작해야지. 우리는 결국 ‘우리만의 작은 세미나’를 열기로 결정했다. 아니. 말이 잘못 되었다. 우리 네 명이 연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연 세미나였다. 장소는 근처의 카페로 정해졌다. 주로 학생들만 찾는 곳이라 교수나 공안의 눈에 띌 걱정은 없다고 했다. 물론 아주 좁고 허름하긴 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세미나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는데도 우리를 믿고 찾아준 고마운 이들…….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끊임없는 질문과 답변, 그리고 토론이 이어졌다. 최고의 세미나였다. 미국에서 수백 명의 대학생들 앞에서 세미나를 했을 때보다, 내로라하는 비즈니스 오너들과 언론인들 앞에서 세미나를 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독도 외의 이야기도 오갔다. 바로 아시아 통합에 관한 문제였다. 정확히 말하면 동아시아 통합이다. 한중일 삼국이 EU처럼 거대한 정치-경제 공동체를 이룬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자리에 일본의 젊은이가 없는 게 참 안타까웠다. 물론 우리 세미나의 주제상 매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독도 문제만 해도 알 수 있듯이 한중일 삼국은 역사적으로 감정적인 골이 깊다. 경제 수준과 정치 체제도 다르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 역시 민족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특히 월드컵 기간 동안 서로 라이벌인 국가들은 상대방 국가와 축구팀을 헐뜯고 조롱하기에 바빴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EU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공존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들이 그러한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중국 국경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 모를 친숙함을 느꼈다. 8개월간 여행을 다니면서 처음 갖는 감정이었다. 중국 DVD 가게에 가면 할리우드 영화 다음으로 많이 비치되어 있는 외화가 한국 영화였다. 중국의 트렌디 드라마를 보면 중국어를 몰라도 드라마의 분위기가 한국과 너무나도 흡사하여 대충 스토리가 이해됐다. 이 얼마나 신기한가. 솔직히 나 또한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과 중국의 다른 점만 보였었다. 그런데 한국과 더욱 다른 각국의 나라들을 돌아보고 오니 한국과 중국의 비슷한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실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르냐는 부차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얼마나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어쩌면 독도 문제도 아시아 통합의 관점에서 놓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민감한 부분에서부터 사과할 부분은 사과가 이루어지고, 용서할 부분은 용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일본이 ‘싫은’ 게 아니라 독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옳지 못하다’고 여길 뿐이다.
과연 언제쯤 모터사이클로 아시아의 국경을 자유롭게 넘을 수 있는 때가 올까. 물론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사람과 물자의 교류, 말은 좋지만 자칫하면 한 나라의 경제가 다른 나라의 경제를 잡아먹는 불평등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건 분명히 신중해야 하며 시일이 오래 걸리는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횡단도 1년 전에는 단지 상상 속의 일일 뿐이었다. 오늘 베이징 세미나에서 나눈 우리의 상상도 언젠가는 현실이 될지 모른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그게 바로 여행에서 우리가 깨달은 젊음이니까.
※ 운영자가 알립니다.
<독도 라이더가 간다>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누구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에서 동고동락했던 모터사이클들은 톈진 항에서 인천으로 실어 보냈다. 남은 임무는 베이징 독도세미나를 통해 대장정을 멋지게 마무리하는 것이다. 사실 아시아를 지나는 동안 너무나도 오래 독도를 잊어 왔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때로는 공식적인 일정이 없고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그저 한 국가 한 국가 무사히 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이제는 다시 ‘독도라이더’로 돌아와 제 역할을 해내야 할 때이다.
한인학생회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의 양대 명문인 칭화대淸?大와 베이징대北京大에서 독도세미나를 추진했다. 칭화대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 내에서 세미나를 하려면 교수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칭화대 교수들이 세미나 주제가 민감하다는 이유로 불허해 버렸다는 것이다. 뒤이어 베이징대에서도 불허 소식이 들려 왔다. 솔직히 많이 실망스러웠다. 일반적인 자유주의 국가라면 이 정도 세미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역시 여기는 개방되었다 해도 공산주의 국가구나 싶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베이징대는 회의실을 유료로 빌릴 경우 교수의 허락 없이도 세미나를 열 수 있었다. 유료라도 그게 어디인가. 밥을 굶어서라도 열 수만 있다면 좋았다. 얼른 베이징대 영걸교류센터의 회의실을 세미나 장소로 예약했다. 그리고 한인학생회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대와 칭화대 곳곳에 세미나 홍보전단을 붙였다. 학생들이 자주 들어오는 인터넷 사이트에도 세미나 홍보 글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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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일을 벌이자 하루하루가 무섭게 빨리 지나갔다. 그동안 금실이는 착실히 세미나 자료를 번역해 주었다. 승일이는 우리의 여행을 담은 동영상 파일을 제작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의 흥미를 끄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을 터였다. 나와 상균 형은 매일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를 뒤적였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먼저 일본 측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살펴보고 그 허구성에 대해서 토론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세미나 하루 전날,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공안에서 우리 세미나를 반대한대요. 회의실 예약도 취소됐어요.”
베이징대 한인학생회 부회장으로부터 온 다급한 전화였다. 그 사연은 이러했다. 칭화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독도세미나 홍보 글을 한 칭화대 교수가 발견한 것이다. 교수는 이 내용을 중국 공안에 알렸고, 공안은 바로 독도 세미나 개최를 금지하고 이 내용을 베이징대에 통보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공안은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 자체를 싫어한단다. 거기다 세미나 주제도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최근에 일본의 신임 아베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여 중-일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있으므로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사는 금지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 전에 이렇게 무산시켜 버리다니. 당황한 정도가 아니라 앞이 캄캄했다. 세미나 다음날 한국에 귀국할 계획으로 항공편까지 이미 구입해 놓은 터였다. 물론 모든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리라고 기대해 본 적은 없다. 지금까지 그러하지도 않았다. 매번 장애물은 어떤 일이 다 이루어졌다 싶은 순간 찾아와 마지막으로 발을 걸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했다. 하루 만에 무산된 세미나를 다시 여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여기까지 얼마나 고생해서 왔는데 세미나도 못 열고 가다니. 우리를 믿어준 사람들은 물론 먼저 인천으로 보낸 우리 애마들 볼 낯조차 없게 생겼다.
막무가내로 세미나를 강행할까 생각해보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건 우리만 걸려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준 한인학생회 친구들이 교수들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무작정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제발, 제발요. 어떻게든 안 될까요? 하지만 상황은 바늘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궁리해도 방도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인터넷에 세미나를 취소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참담했다. 돌아가고 늦어질지언정 포기는 없었는데 마지막에 와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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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어김없이 졌고, 다시 떠올랐다. 드디어 세미나 당일이었다. 우리는 충혈된 눈으로 멍하니 베이징의 일출을 바라보았다.
“형, 우리 내일이면 한국 가는 거지?”
“응.”
“삼겹살에 구운 마늘 먹고 싶다.”
“좋지.”
“아니다. 옥 매트에 허리부터 좀 지져야겠다.”
“그것도 좋지.”
“…… 그런데, 형.”
“응?”
“왜 하나도 신이 안 나지?”
“…….”
우리는 한참이나 그렇게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한산하던 거리에 하나 둘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모두들 갈 곳이 있는 거겠지. 그래서 저렇게 바쁘게 걸어가는 거겠지. 허탈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중국 대륙을 하루도 쉬지 않고 가로질러 왔던 것일까.
하지만 언제까지 넋 놓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혹여 공지를 못보고 세미나 장소로 오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굳게 닫힌 문만이 그들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마지막 인상을 그렇게 남기고 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세미나 시간 동안 베이징대 영걸교류센터 회의실 앞을 지키고 있기로 했다.
아직 예정된 시작 시간은 1시간이나 남았는데 몇 명의 중국인 학생들이 세미나를 듣기 위해 찾아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그들에게 안타깝게도 세미나가 취소되었다며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독도엽서와 한국지도를 나누어 주었지만 그들은 적잖이 섭섭해 했다.
“꼭 듣고 싶어요. 여기서 못한다면 다른 데서 하면 안 되나요?”
우리와 일면식도 없고 한국인도 아닌데도 그들은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문득 이 몇 명을 위한 세미나라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규모 세미나가 아니면 어떤가. 하다못해 나무 그늘에서라도 우리의 얘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면 된 거 아닐까. 우리를 도와주었던 유학생 친구들도 수업이 끝나자 하나 둘씩 세미나실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들 이대로 무산될 수는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실이가 왔다. 아침에 밥도 안 먹고 나서는 우리를 걱정하던 그녀. 사정을 다 알면서도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직 시작 안 했어요?”
그래. 시작해야지. 우리는 결국 ‘우리만의 작은 세미나’를 열기로 결정했다. 아니. 말이 잘못 되었다. 우리 네 명이 연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연 세미나였다. 장소는 근처의 카페로 정해졌다. 주로 학생들만 찾는 곳이라 교수나 공안의 눈에 띌 걱정은 없다고 했다. 물론 아주 좁고 허름하긴 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세미나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는데도 우리를 믿고 찾아준 고마운 이들…….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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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끊임없는 질문과 답변, 그리고 토론이 이어졌다. 최고의 세미나였다. 미국에서 수백 명의 대학생들 앞에서 세미나를 했을 때보다, 내로라하는 비즈니스 오너들과 언론인들 앞에서 세미나를 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독도 외의 이야기도 오갔다. 바로 아시아 통합에 관한 문제였다. 정확히 말하면 동아시아 통합이다. 한중일 삼국이 EU처럼 거대한 정치-경제 공동체를 이룬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자리에 일본의 젊은이가 없는 게 참 안타까웠다. 물론 우리 세미나의 주제상 매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독도 문제만 해도 알 수 있듯이 한중일 삼국은 역사적으로 감정적인 골이 깊다. 경제 수준과 정치 체제도 다르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 역시 민족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특히 월드컵 기간 동안 서로 라이벌인 국가들은 상대방 국가와 축구팀을 헐뜯고 조롱하기에 바빴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EU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공존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들이 그러한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중국 국경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 모를 친숙함을 느꼈다. 8개월간 여행을 다니면서 처음 갖는 감정이었다. 중국 DVD 가게에 가면 할리우드 영화 다음으로 많이 비치되어 있는 외화가 한국 영화였다. 중국의 트렌디 드라마를 보면 중국어를 몰라도 드라마의 분위기가 한국과 너무나도 흡사하여 대충 스토리가 이해됐다. 이 얼마나 신기한가. 솔직히 나 또한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과 중국의 다른 점만 보였었다. 그런데 한국과 더욱 다른 각국의 나라들을 돌아보고 오니 한국과 중국의 비슷한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실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르냐는 부차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얼마나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어쩌면 독도 문제도 아시아 통합의 관점에서 놓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민감한 부분에서부터 사과할 부분은 사과가 이루어지고, 용서할 부분은 용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일본이 ‘싫은’ 게 아니라 독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옳지 못하다’고 여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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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언제쯤 모터사이클로 아시아의 국경을 자유롭게 넘을 수 있는 때가 올까. 물론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사람과 물자의 교류, 말은 좋지만 자칫하면 한 나라의 경제가 다른 나라의 경제를 잡아먹는 불평등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건 분명히 신중해야 하며 시일이 오래 걸리는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횡단도 1년 전에는 단지 상상 속의 일일 뿐이었다. 오늘 베이징 세미나에서 나눈 우리의 상상도 언젠가는 현실이 될지 모른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그게 바로 여행에서 우리가 깨달은 젊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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