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무덤덤해지는 그날, 생일 - 된장 미역죽
200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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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서 재미가 없어진 것은 발렌타인 데이뿐만이 아니다. 생일날도 무척 재미가 없다. 자랑할 일도 못되지만, 최근의 내 생일만 하더라도 무엇 하나 재미있는 일이 없다.
그래서 올해의 생일은 슬그머니 넘어가 버리려고 했다. 긴자에서 레코드 한 장을 산 뒤(내가 직접 샀다), 니혼바시에 있는 다카시마야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것으로 끝내기로 했다.
그 정도라면 분수에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니혼바시까지 걸어갔는데 다카시마야는 정기 휴일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다카시마야에 가면 나름대로 은밀하게 생일 축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니혼바시까지 걸어왔던 것이다. 결국 그날은 버럭버럭 화를 내며 맥주를 마시고 배가 터지도록 회를 먹어 돈을 잔뜩 쓰고 말았다. 그 이튿날, 나는 출판 담당 여자 편집자와 만나 식사를 했다.
“생일이라 해 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어요.”라고 그녀도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이런 식으로 생일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너나 할 것 없이 좋은 일이라곤 없군요.” 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실컷 먹고 마시는 게 생일을 보내는 가장 타당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2008년이 끝나고 2009년이 시작하는 연말과 연초 사이, 묵은해를 시원하게 날려 보내고 정말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으라고 액땜을 하느라 그런지, 병원 신세를 졌다. 새해를 병원에서 골골대며 시작하는 마음이란 뭐라 표현할 수 없이 뒤숭숭했는데 일상생활로 돌아오니 일은 더더욱 꼬이고 일년 내내 의욕 상실이 걸릴 만한 일들까지 겹쳐 있었다. 설마 이 기운이 올 나의 한 해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새해 첫 연재를 위해 잔뜩 메모해 놓은 책들은 들여다보지도 못했는데 마감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나이 먹어서 좋은 일은 아무것도 없구나. 생일이 갈수록 재미없어지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곰곰이 해봤다. ‘어서 나이 먹고, 연륜이 쌓였으면 좋겠는데.’ 라고 초조하게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초조함을 살짝 숨긴 무덤덤함이 마음의 대부분이다. 아프기나 하고,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충돌하는 것을 보면 나이 먹어가며 이런 일들을 더 겪어야 하는 건지, 두려움을 무덤덤함으로 가려 보고 싶기도 하다.
나의 생일날, 과연 무엇이 가장 먹고 싶을까 생각하며(물론 맥주는 기본 사양) 생일날 먹는 음식에 대해 생각해 봤다.
생일날 먹는 상징적인 음식은 역시 케이크 아닐까? 우리나라는 미역국에, 어린아이들은 다치지 말고 건강 하라고 수수팥떡도 해주지만 전세계적으로 생일날 먹는 음식은 케이크이고, 나머지 음식들은 ‘생일 주인공이 먹고 싶은 것’으로 폭이 넓다.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는 생일보다 세례명을 붙이는 영명축일을 더 큰 잔치로 여기기도 하는데, 그때도 케이크가 나오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잔치를 벌이는 것은 똑같다. 빵을 나눠 먹는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종교적인 상징이기도 할뿐더러 나눠먹을 수 있는 달콤한 음식처럼 사람들을 둥글게 묶어주는 먹거리도 드물 테니까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미역국을 생일 음식으로 많이 생각하는데, 실은 생일자보다 산모를 위한 음식이 아닌가 싶다. 산모를 위한 미역은 제일 좋은 것으로 절대 값을 흥정하지 않고 제값을 주고 사야 한단다. 매년 챙겨드리진 못하지만 한겨울에 나를 낳고, 한 여름에 동생을 낳느라(그것도 노산으로!!) 골병 드셨다는 어?니께 가끔은 미역국, 또는 미역죽을 끓여드리려고 노력한다. 요즈음은 드시면서 언제 결혼해서 애 낳아서 네가 미역국 먹냐고 구박을 하셔서 티격태격하는 통에 좀 피곤하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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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날은 케이크 말고도 술을 작정하고 마시는 날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공부하며 종종 18세 생일파티에 초대받곤 했는데 성인이 되는 나이가 18세라서 부모님들은 차를 사주기도 하고, DJ와 케이터링도 부르는 제법 큰 파티를 연다. 장난기가 발동하면 나이 많은 친구들과 돈을 모아 소방관 아저씨를 불러주기도 했다. (소방관 아저씨는 불을 끄러 오시는 분이 아님). 무엇보다 다들 집에서 술을 두어 병씩 가지고 와 부어라 마셔라 하는데 간에 구멍이 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마신다. 하긴 부모님의 보호아래 있다가 일도 하고, 독립도 하고, 연애도 하며 괴로울 앞날을 생각한다면 늘 취해있어도 모자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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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 무덤덤해진 요즈음 말고 꿈과 희망에 가득 차, 매년 돌아오는 생일을 기다렸던 어린시절 읽은 책 중에 멋진 생일파티 모습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애써봤다. 그런데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연인이자 후원자라는, 말도 안 되는 이상형을 어린시절 확 심어준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는 고아라서 생일이 없는데다가 『소공녀』의 사라는 생일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악질 교장 선생님에 의해 한순간에 학교의 VIP학생에서 하녀의 신분으로 떨어진다. 우울하고 슬프다. 생일은 언제나 행복한 날이어야 하는데.
하지만, 생일날 새벽에 이렇게 글을 쓰며 마감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어느새 서른 중반이라니. 이런저런 답답한 일들이 어떻게 풀려나갈지, 앞이 제대로 캄캄하긴 한데, 뭐 이렇게 힘든 일이 닥쳐오면 주변 인간관계 정리 좀 하고 잠수 한번 하고 나면 또 숨 쉴 만 해질 거라는 낙천적인 생각으로 서른다섯 살 생일을 맞이해야 할 것 같다. 엄마를 위한 미역죽은 벌써 끓여놓았고, 나를 위해서 만화책 한 권 사주고, 저녁엔 글 쓰는 동생들이랑 책 이야기 하면서 맥주 한잔 하면 또 금방 즐거워지겠지. 새해 첫날 결심한 일들이 잘 안 지켜져도 걱정할 ?? 없지 않을까? 우리 인생의 기본 세팅은 생일부터니까. 모두들 생일만큼은 행복하게 재충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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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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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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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니
2009.02.01
대학생이 되면서, 자연스레 혼자살게 되고, 덕분에,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건
힘들었어요.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면서.
'집'의 소중함을 그제서야 실감하곤 했죠.
된장, 미역국! 이런 거 처음 봤어요. 직접 만들어먹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거든요. 이건 도전해볼 만 한데요?ㅋ
"생일 케이크를 일년에 한 번 가질 수 있는 세상은 그래도 공평한 세상이 아닐까 싶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뭔가 모를 울림이.ㅋㅋ
이젠, 내 생일이 되면, 씩씩하게, 미역국 끓여먹고. 부모님께도 전화드려야겠어요.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요~
손녀딸
2009.01.23
문화탐험가
2009.01.23
미역국 한 숟가락 먹고 나선 ~ 그 생각이 싹 바뀌었어요~
이렇게 맛있는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서 다시마 버섯 우린물에
매매 볶은 쇠고기와 미역.
엄마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위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아직도 내 생일에 미역국 얻어먹을 생각만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내년엔 서른살. 이제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 들여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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