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사회와 그 적들』
‘자유’라는 단어는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하고,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단어입니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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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단어는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하고,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단어입니다. 한반도의 경우 일제 36년간 억압당한 역사의 흔적 덕택에 자유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 박혀 있고, 특히 남북 간에 대살육이 벌어졌던 기억은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사람들에겐 자유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남다릅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사실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제1공화국의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이야기한 자유는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되어 민족국가로서의 주권 통치자가 된 국민과 국가의 ‘자유’였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권력과 힘으로 억눌렀던 것은 독재와 부당에 대한 의사 표현에 대한 ‘자유’였고, 가끔 시위 현장에 등장하는 ‘자유 대한’ 구호는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의 반의어로 존재하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한참 유행하는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의 유동성을 의미하는 ‘자유’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가리켜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게 일반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회입니다. 다만, 그 자유주의자가 무엇의 자유를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짚어내기 위해서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부르주아의 등장부터 천부인권 사상으로 이어지는 근대 정치학의 흐름을 짚어보는 방식이 정석이겠으나, 꼭 그것만이 답은 아닙니다.

‘반증’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칼 포퍼는 그의 대표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바로 그 자유민주주의사회라는 현대사회의 보편 명제에 대해서 특유의 스타일로 명쾌한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워낙에 쉽게 쉽게 글을 풀어나가는 특성 덕택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라면 저는 오히려 정치학 고전보다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추천하곤 합니다. 그의 손쉽고 명쾌한 정의를 따라가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책 제목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반 이상을 설명합니다. 포퍼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사회는 ‘열린 사회’며,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그 열린 사회를 해치는 ‘적’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인류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 책의 큰 결론입니다.

열린 사회란 그럼 무엇일까요? 칼 포퍼는 과학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과학철학자로서 명성을 날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열린 사회’ 개념은 그 과학적 방법론에 상당히 기대어 있습니다. 따라서 포퍼의 과학적 방법론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이야기하는 ‘열린 사회’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칼 포퍼의 과학적 방법론을 통칭할 수 있는 이름은 바로 ‘반증’입니다. 반증이란, 그렇지 않은 사례가 있음을 들어 주장을 부인함으로써 진리에 다다르는 방법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과학 방법론인 귀납적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100마리의 까마귀를 살펴보고, 그 경험에 의거해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100% 정확한 결론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선가 흰 까마귀가 나타난다면, 그 결론은 바로 깨어지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귀납적 방법에 의한 주장은 언제나 진리가 아닐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포퍼는 그러나 귀납적 방법이 갖는 함정을 함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역으로 말해 ‘반증가능성이 없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앞서 들었던 까마귀의 예를 계속하자면, ‘모든 까마귀가 검다.’는 주장은 흰 까마귀의 출현 가능성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습니다. 포퍼는 이 가능성이 바로 진리를 향해 더더욱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보며, 이러한 반증의 가능성이 없는 경우(그는 종교를 예로 듭니다.)는 과학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 반증가능성에 관한 이론을 포퍼는 사회로 들고 나옵니다. 그가 말하는 열린 사회란, 바로 그 반증가능성이 보장되는 사회를 의미합니다. 제도와 관습, 법률과 윤리가 영원히 올바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사회제도이고, 그렇기에 포퍼는 최상의 사회는 현재의 체제에 대해 구성원과 체제 스스로가 언제나 그 반증을 손쉽고 편리하게 제시할 수 있는 사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의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열린 사회는 항상 자유로워야 합니다. 구성원과 체제는 체제 스스로를 부정해버릴 수도 있는 주장과 행동까지도 모두 수용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모든 변화에 있어 능동적이고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열린 사회의 가동을 통해 인류 사회는 늘 이전보다 발전하고 앞서 나갈 수 있는 역량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포퍼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열린 사회를 막는 적을 지목합니다. (사실 책의 상당 부분은 이 적들에 대한 비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적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사상은 두 가지로, 바로 서양 사상의 원류라 일컬어지는 플라톤이 첫 번째, 그리고 누구보다도 변혁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마르크스가 두 번째입니다.

포퍼는 플라톤이 구상했던 이상적인 국가야말로 닫힌 사회의 표본이라고 주장하며 시종일관 비판합니다. 실제로 포퍼의 열린 사회 개념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데아 개념을 국가철학에 투영하여, 국가는 ‘이데아의 현상화’라고 생각합니다. 불변의 진리인 이데아를 닮아야 하는 것이 국가이기에, 국가의 변혁은 곧 이데아로부터의 멀어짐, 즉 퇴보입니다. 그렇기에 플라톤의 정치 체제에서는 변혁을 인류의 퇴보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시종일관 변혁을 주장했던 마르크스는 어떨까요? 포퍼는 마르크스와 헤겔을 묶어 그들의 사상이 갖는 예언자적 관점을 비판합니다. 마르크스 사상의 한 축을 이루는 중심점인 역사관이 주 대상입니다.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하고, 원시 공산사회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공산주의라는 최종 결론으로 도달할 것이라는 예언자적 관점을 보여 줍니다. 그에게 있어 자본주의란 필연 결론인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을 포퍼는 비판합니다. 열린 사회는 말 그대로 모든 주장과 비판, 행동에 열려 있기 때문에 그 결론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의하면 사실 사회 구성원들은 뭘 하든지 ‘어차피 다가올’ 공산주의 사회라는 흐름에서 별로 할 일이 없어지게 되며, 이러한 사상이 체제를 지배할 때 체제는 이미 내려진 결론인 공산주의로의 흐름 외의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는 ‘닫힌 사회’ 가 되고 만다는 것이 포퍼의 이야기입니다.

포퍼의 주장은 2차대전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배경이 된 점을 감안해 볼만 합니다. 국가사회주의라는 전체주의의 대표적 체제였던 독일 나치가 보여준 만행과 횡포, 초기 혁명이념이 상실된 채 오직 전체주의의 껍데기만 남은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연방은 체제 중심의 체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포퍼 또한 이러한 점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기에 그의 주 공격 대상이 플라톤의 국가론과 마르크스의 혁명론이었을 것입니다.

포퍼의 시각과 주장은 플라톤과 마르크스에 대한 강렬한 비판만으로도 매우 주옥 같은 존재가 됩니다. 물론 플라톤이 포퍼의 시각만으로 이해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점이지만, 쉽게 그리스 고전철학을 접하기 어려운 일반인들에게 그나마 플라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방식은 그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르크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마르크스의 분석과 통찰이 갖는 이면의 난점들을 독자들에게 보다 쉽게 안내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오히려 더 쉽게 이해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쉬운 문체와 빠른 논지 전개로 일반교양서로는 최고의 난이도를 맞춘 책이지만, 한편으로는 우울한 점도 없지 않습니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확고한 반공주의자로서 각인되었는데, 이 점 때문에 포퍼의 저서는 반공서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의 주장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반공주의자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흔히 알려진 반공주의가 지적하는 비판점과 포퍼의 비판점은 완전히 상이합니다. 일반적인 반공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냥 ‘빨갱이는 나쁜 놈’ 수준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포퍼는 정확히 한 지점,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전체주의의 오류와 운명론적 역사관의 함정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의 반공은 ‘때려잡자 공산당’이 결코 아님을 책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포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함께 매카시즘적 반공주의 지식인의 선봉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은 좀 씁쓸한 부분입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누구나 가슴속 최상위의 욕망이지만, 실제 생활에서 쓰이는 용도는 제각각입니다. 자유는 누군가에겐 곧 반공의 상징이고, 누군가에게는 금융자본의 규제 없는 이동이며, 누군가에겐 구조조정의 편리함이기도 하며 누군가에겐 대통령의 얼굴 앞에 당신의 정책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 방대한 자유 중에 과연 우리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포퍼의 이 책이야말로 그 해답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유를 말하고 모두가 내 자유가 진짜라고 외치는 세상 속에서 한번쯤 자유의 기본개념을 함께 곱씹어 보는 것은 올가을에 걸맞은 즐거운 교양 산책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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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고전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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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전

2011.09.30

'반증'이란 용어를 익히 알고 있고 익숙히 알고있었는데 칼포퍼의 과학적방법론에서 연유하는군요. 이 기사를 읽어보니 칼포퍼를 반공주의자로만 아는 사람들이 있다면 너무나 그에 대해 제한된 시각만을 가졌다보입니다. '다시보고싶은 책'이란 코너 현재관점에서 연재는 종료되었지만 칼포퍼를 찾다가 알게된 매우 소중한 코너란 생각이 듭니다. 이 코너에 소개된 여러 작품들 이번 가을에 찾아가고싶은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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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1

<칼 포퍼> 저/<이한구> 역

출판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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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이문트 포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인물 칼 포퍼. 그는 1902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대계 변호사인 아버지로부터 강렬한 지적 호기심을 물려받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혼란 속에서 제도교육에 환멸을 느끼고 고등학교를 중퇴, 한때 목수의 도제로 근무했다. 하지만 억누를 수 없는 지적 욕구로 인해 뒤늦게 빈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 물리학, 역사, 철학, 음악 등을 전공했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퍼는 십대 청소년 시절에는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곧 마르크스주의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발견하고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였다고 알려져있다. 졸업 후에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이른바 과학철학 분야에서 ‘반증가능성’의 방법을 제시한 첫 저서 『탐구의 논리』(1934)를 출간해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1930년대 유럽 사상계의 중심적 위치에 서 있는 오스트리아 빈 학단의 논리실증주의에 맞서 반증가능성을 기축으로 하는 방법론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20세기 과학철학의 가장 중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나치의 득세로 인해 외국행을 결심한 포퍼는 1937년에 그 당시 서구 지식인들의 주된 망명지인 유럽과 미국이 아닌 뉴질랜드에 위치한 캔터베리 대학 칼리지의 강사로 부임하여 철학을 가르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그곳에 머무르며 정치철학 분야의 주저인 『역사주의의 빈곤』(1944)을 저술하였으며 또한 이 시기에 그는 기념비적인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45)을 완성한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전체주의의 폭력을 체험한 포퍼는 위험천만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철학적이며 사상사적인 배경을철저히 파헤쳐 보여 주었으며 '열린 사회'의 최대 적으로 플라톤과 헤겔을 지목하며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러 전후 사상계에 일대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1946년에 포퍼는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학(LSE)으로 자리를 옮겨 1949년에 논리학 및 과학방법론 담당 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비판적 합리주의’로 명명되는 특유의 신조에 입각하여 철학, 정치, 사회, 과학, 교육 분야의 다양한 주제에 관해 왕성한 연구 및 저술 활동을 전개한다. 또한 그는 비트겐슈타인과의 ‘부지깽이 논쟁’(1946), 아도르노 및 하버마스와의 ‘실증주의 논쟁’(1961), 토머스 S. 쿤과의 ‘과학철학 논쟁’(1965), 마르쿠제와의 ‘혁명/개혁 논쟁’(1971) 등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한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자유주의의 열렬한 대변인으로 전체주의와 싸운 사상적 투쟁에 대한 지성사적 공헌이 널리 인정되어 1965년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969년에 교수직에서 은퇴한 직후에도 지칠 줄 몰랐던 포퍼의 ‘끝없는 탐구’는 1994년 9월 17일, 영국 런던에서 그가 생을 달리하며 멈추게 된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 『역사주의의 빈곤』, 『추측과 논박』(1963), 『객관적 지식』(1972), 자서전 『끝없는 탐구』(1976), 에세이집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1994), 대담집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1996)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등이 있으며 이 책들은 29개 나라말로 옮겨져 세계 각국에서 그의 사상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