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만남]부암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오!!! 멋진 서울』 박상준
부암동을 찾았다. 이유가 있었다. 아주 특별한 산책. 『오!!! 멋진 서울 : 서울산책자와 떠나는 매력 만점 120곳 탐방』(박상준 글·사진|웅진리빙하우스 펴냄) 출간기념 저자와 함께하는 부암동 탐방의 시간.
201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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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이십여 년 전, 멋도 모르는 촌놈. 부암동 외삼촌 댁에서 잠깐 서식했다. 삼촌을 졸라 마련한 노가다(막노동) 현장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촌 댁은 하숙집이나 다름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 지쳐 쓰러지면 그뿐. 동네를 들여다볼 틈, 돌아다닐 엄두, 당최 없었다. 더구나 당시 촌놈에게 서울은 명동, 종로, 신촌과 같은 유흥과 환락이 휩쓴 뻑적지근한 풍경이 지배했다. 부암동? 처음 발 들여놓은 동네의 고즈넉한 풍경은, 촌놈의 레이더를 자극하지 못했다. 내 첫 번째 부암동의 기억. 하림각만 오로지 오롯이(?) 서 있는 가난한 기억.
다시 부암동
커피 만드는 사람인 내게, 부암동은, 일종의 성지다. 전통의 커피 명가 ‘클럽 에스프레소’가 있다. 부암동에 향긋한 커피 향을 날리며, 사람들을 행복한 커피의 세계로 인도한 곳. 더불어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최한성(이선균)의 집으로 나왔던 ‘산모퉁이’도 있다. 풍경 하나만큼은 작살이다. 이후 부암동, 커피 향이 조금씩 더해졌다. 커피 하우스들이 하나둘 둥지를 튼 까닭이다. 자본의 증식을 위한 커피가 아닌, 여유와 사유를 위한 커피가 있는 곳, 부암동이다.
또다시 부암동
부암동을 찾았다. 이유가 있었다. 아주 특별한 산책. 『오!!! 멋진 서울 : 서울산책자와 떠나는 매력 만점 120곳 탐방』(박상준 글?사진|웅진리빙하우스 펴냄) 출간기념 저자와 함께하는 부암동 탐방의 시간. 타이틀 하여, “그대, 아직 서울을 안다고 하지 말아요.” 그래, 서울의 속살이 어깨너머 흘러내린 어느 봄날의 오후. 부암동을 다시 찾아 나선 이유. 아는 사람은 안다는 부암동의 매력과 속살을 살짝 엿 보고 싶었다. 내 가난한 부암동의 기억에 영양분을 보충해 주고 싶은 것도 한 가지 이유.
저자 박상준
역시 촌놈 출신으로, 이대역 사거리 근처에 사는, 그래서 ‘이대 사는 남자’. 12년째 살고 있는 서울은, 그에겐 ‘밥’이란다. 서울은 이젠 그의 밥줄이 됐으니까. 이 책에 앞서 지난 2008년, 『서울 이런 곳 와보셨나요? 100 : 당신이 몰랐던, 서울의 가볼 만한 곳』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서울내기들이 몰랐던 서울의 속살을 알려주는, 혹은 서울을 알고 싶은 이들의 호기심을 풀어주는, 민간 ‘서울 해설사’ 혹은 ‘서울 산책자’ 되시겠다. 사실 그도 그렇게 될 줄 몰랐다. 길을 나서니 서울이 자꾸만 민낯을 내밀고 새로운 말을 걸어왔단다. 서울과 사랑에 빠진 남자, 박상준. 서울을 걷고 서울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얻는다. 그는 이리도 말한다. “길은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표정을 드러냈다.”(p.9)
길
그렇게 길과 만난다. 오해 마시라. 박정아의 연인 길, 아니다. 박상준과 함께하는 길이다. 아마도 부암동은 내게 이전과 또 다른 표정을 지으리라. 서울 산책자가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서 모인 길동무들을 이끈다. 파스타가 맛있다고 한 ‘오월’을 끼고 오롯한 옛 정서를 탐하기에 좋은, 외려 샛강처럼 열린 보은 마트 옆 음산해(?) 뵈는 골목으로 향한다. 그의 심상의 길과 통한다는 그 골목. 더도 말고 덜도 마는, 그저 골목. 그는 2년 전부터, 부암동이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가 됐단다.
부암동을 좋아한다. 그 빛바랜 색감이 만드는 낡은 정서가 좋다. 걸음을 뗄 때마다 들고나는 길바닥의 두툼한 시간이 사랑스럽다. 서울에는 많은 동네가 있고 저마다의 색깔을 갖지만 내게는 어느 곳보다 부암동의 은빛이 명징하다. 마음에 갈무리한 ‘우리 동네’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겠지.(P.21)
70~80년대가 훅~
다가온다. 꽃과 잎, 혹은 나무들이 담장 밖으로 빼꼼 나와 눈인사를 건네고, 골목에 살포시 내려앉은 꽃잎이 내 발걸음을 환영한다. 박상준은 이 골목이, “4월에 가장 좋다”고 알려줬지만, 5월이면 어떻고, 또 다른 달이면 어떠랴 싶다. 분명히,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를, 내일 또 다를 길이니, 매일매일 달라지는 길이 궁금해졌다. 언젠가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속도로 살아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지막한 콧노래를 흥얼흥얼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부암동 길동무 가운데 부부가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골목길을 거니는 풍경. 꽃만 아름다우랴. 사람도 꽃만큼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골목길은 늘 사랑을 품고 있다. 떠올려보라. 골목길에서 나눈 키스. 안 해봤다고? 그렇담, 연애 좀 더 해보셔야겠고. 「골목길」이라는 노래도 떠오른다. 이 골목길도 얼마나 많은 사랑의 풍경을 품고 있을까. 골목길에게, 곳곳에 보이지 않게 자리하고 있을 사랑의 흔적, 사랑의 기억을 물어보고 싶어졌다. 더불어 문득 골목길이 되고 싶어졌다. <사랑니>에서 인영(정유미)이 했던 말을 약간 바꿔서. ‘다시 태어난다면 골목길이 되고 싶어.’
골목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골목 옆길, 사유지 길로 살짝 접어든다. 뭐, 괜찮단다. 사람 살기 좋은 동네, 부암동이니까. 한때 잠시 서식했던 강남의 어느 사유지 길엔 아주 무시무시한 경고가 붙어 있었다. ‘절대’라는 수식어까지 붙여가며, 타인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했던 강남의 그 경고문구. 참 많이 다른 풍경.
광장
무계정사길을 품은 골목이 확 넓어지더니 펼쳐진다. 안평대군, 몽유도원도, 현진건 집터까지.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이런 데가 있었다니…….” 박상준이 화답한다. “어렵게 오시라고, 쉽게 찾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아무렴, 길을 쉽게 열어주면 흥미가 떨어지는 법이다.
안평대군 이용 집터(무계정사 터)로 가는 무계정사 길은 호젓하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이 꿈에 본 무릉도원과 닮았다 해 정자를 지은 장소다. 그 꿈속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였다. 『운수 좋은 날』 『무영탑』 등을 쓴 소설가 현진건의 집도 그 곁에 있었다.(p.21)
“부암동 지키기 500평 주차장 반대”
빈터만 덩그러니 남았다지만, 골목길 곳곳에 나붙은 주차장 반대 플래카드가 선뜻 이해가 간다. 그 터에 공영주차장을 조성하겠다는 종로구청의 뜻에 반대하는 주민들. 주민이 아닌 나라도 한 표 던지겠다. 사람의 발이 아닌 자동차의 바퀴가 장악하게 될 부암동은 왠지 빈정 상한다. 반대마저도 시적이다. 동네 주민들은 다들 시인이련가.
키 낮은 집 어깨 맞댄 좁다란 골목길
둥그런 담 굽어드는 달큰한 속삭임
복사꽃 향 빚어가는 부암동 사람들
산책의 기술
다시 뚜벅뚜벅 발걸음. 산이 우뚝,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이 다른 대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산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대도시가 많지 않다. 그렇게 서울은 고개를 들면 산이 보이는 게 지형적인 장점인데, 최근 건물이 높아지면서 서울의 장점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 부암동이 좋은 이유는 사방에 산이 둘러싸여 있다는 거다.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등이 부암동을 둘러싸고 있다. 산책의 기술이 별것 아니다. 먼 산을 보고 걸으면 좋다. 특히 오감을 열어야 한다.”
느껴라
도시는 회색빛이란다. 회색빛 앞에선 나의 오감을 열고 싶지 않다. 미적 감수성을 해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부암동에선 다르다. 내 모든 세포를 열고 싶다.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는다. 새소리?바람 소리, 귀가 즐겁다. 발자국 소리, 숨소리까지도. 나를 간질이는 모든 것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구나. 아, 좋다. 나는 살아 있구나. 산책은 오감을 여는, 오감을 열어야만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오감이 즐거우면 감탄할 것이고, 감탄할 일이 많아지면 행복하다.
예스럽다
‘車길 없음’ ‘감사합니다 차고 앞’. 나무에 새겨진 이 문구들이 부암동의 분위기를 대변한다고나 할까. 예스럽다. 이렇게 동네를 장식하고 있는 것들도 그렇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개발제한구역이나 군사보호구역인 것이 호재(?)로 작용한 셈이다.” 토건국가의 막장개발 욕망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축복이었던 거다. 개발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개발하고, 사람과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거다.
자연을 존중한다
이것 역시 부암동을 대변한다 하겠다. 자연을 무턱대고 자르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차라리 인공을 양보한다. “벽에 나무가 살아 있으니 벽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런 모습이 동네 풍경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요소라고 본다.” 그렇다, 부암동은 조화를 찾는다. 혼자 잘난 척 않는다. 4대강? 거기엔 자연이 없다. 아니, 자연의 소리를 묵살한다. 인간 혼자 삽질한다. 물, 바람, 흙, 물고기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부암동 주민들을 청와대로!
자하미술관
지금까지 따라온 길, 자하미술관 가는 길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울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자하미술관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계속 오르막이다 보니 지친다는 게다. 지금까지 이미 10명 중 5명은 내려갔고, 이 이정표를 발견하지 못하면, 여기 건물이 미술관이겠거니 하다가, 실망하고 남은 5명 가운데 3명도 다른 길을 찾아 나설 거란다.
마지막 오르막
약간 과장해서 곰에 버금가는 크기의 개ㅡ이름이 ‘누루’란다ㅡ가 컹컹 짖어준다. “좀 섭섭하다. 날 수차례 봤는데도 아직도 저렇게 짖어댄다.(웃음) 여기서 남은 2명 중 1명이 또 내려간다. 같은 골목이라도 언제 오느냐에 따라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데, 그게 참 매력이다.” 하지만, 여전히 오르막은 이어진다. “하이원 스키장의 상급에 버금가는 경사진 오르막 같다”는 속삭임도 바람에 나부낀다.
“서울에서 제일 전망 좋은 미술관”
아마 그랬다지. “전망 좋은 미술관은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쉽사리 열어주지 않는다.”(p.24) 그리 높은 곳도 아니건만, 모르면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멀게 느껴질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자하미술관은 그 길의 꼭대기에서 사람을 밀어내고 끌어당긴다.”(p.24) 어쨌든 이 하얀 미술관, 반갑다. 1층 주전시실. 좋다. 천장은 높고, 특히 유리로 창을 내 채광도, 시쳇말로 죽인다. “이곳을 종종 찾는 이유는 꼭 미술품 때문만은 아니다. 올라가 보면 알 거다. 부암동 정경이 다 보이고, 보고만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공간이다.”
“인왕산의 턱밑에 뿌리내린 자하미술관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이라는 수식이 마음을 끌었다. 드라마 <떼루아>의 촬영지라 했다. 극 중 안지선(유선 분)의 집이었다. 2008년 6월에 개관했지만 그해 겨울 드라마 촬영으로 휴관했다.”(P.21)
진짜는 2층이다
1층 옆으로 나가면, 2층으로 향하는 바깥의 벽돌계단이 있다. 2층 2전시실 바깥의 남은 부지에는 좁은 길을 품고 잔디가 자란다. 아, 탐스럽다 싶은데, 약간 고개를 돌리니 풍경 작렬이다. 이건 직접 가보지 않고 얘기가 안 된다.
잔디 위의 망중한이다. 북악산의 가파른 산세가, 너울대는 북한산의 비봉능선이 마주한다. 묵언의 수행처럼 무언의 대화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p.27)
미술애호가 강종권 관장님이 직접 설계하고 설계한 구조란다. 이윤보다 문화의 공유가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작품 전시도 상업성보다 장래성과 실험성에 비중을 둔다는 자하미술관. 2층 전시장 통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풍경도, 그것 자체로 작품이다.
그리고 자하미술관에서 보았던, 가장 인상적인 어떤 산책.
골목길 풍경의 의외성
골목길은 의외성이 지배한다. “돌아다니다 보면 자기만의 습관이나 버릇이 생기는데, 나는 동네를 가면 무조건 올라간다. 부암동의 경우, 혼자 골목길을 따라가면 정말 괜찮은 풍경 볼 수 있다. 골목길 다니면 그렇다. 저 모퉁이를 돌면 굉장한 게 나타날 것만 같다.(웃음) 그러면서 또 모퉁이가 나오고, 그렇게 돌고, 또 나오고……. 2년 동안 여기도 참 자주 왔었는데, 지난달 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것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은 길을 걸어도 어느 계절에, 어떤 시간대에 오느냐에 따라 다르다. 궁상맞게 저녁에 혼자 온 적도 있지만, 친구들에게 어떤 설명보다 직접 데려오는 것이 낫다.”
갑자기 떠오르는 이승환의 노래, 「너를 향한 마음」. “(…)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일까♪/ 저 골목을 돌면 만나지려나~♬” 행여 모퉁이를 돌다가 우연히 만나는 첫사랑. 너무 진부한 클리셰지만, 두 사람이 어디서든 살아 있다면, 7784만분의 1이라도 만날 수 있을 확률. 한때는 그것이 부러웠다.
“이 동네만 좋은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책을 다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내가 사는 곳은 이대 부근의 연미동 골목인데, 3~4년 살았다. 어느 날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재미난 골목이 있었구나, 싶더라. 내가 사는 동네인데 정말 몰랐구나. 자신이 사는 동네를 돌아다녀라. 직장 출퇴근하느라 지금까지 몰랐겠지만, 한 번 돌아다니면 새로운 풍경이 보일 거다.”
누군가는,
집에서 음식을 시켜먹고, 어떤 연인은 부암동을 찾아 사진을 찍고 그들만의 데이트를 즐긴다. 여기는 부암동이다. 천천히 무계정사길을 내려왔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다시 다른 길을 오른다. 이번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란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시가 곳곳에서 흩날리는 공원이다. 「자화상」이 있고, 「코스모스」가 펼쳐지며, 「서시」를 읊으며, 「별 헤는 밤」과 「눈」 등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이 화려하진 않지만 사방으로 서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녁에는 특히 야경이 죽인다.(웃음)”
이승환
약간 엇박자이긴 해도, 한편으로 재미난 풍경이다. 정확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이승환 씨 팬들이 꽃을 조성하고 포토존을 만들었단다. 콘서트도 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윤동주의 흔적
왜 윤동주일까. 윤동주가 이곳에서 시상을 받았다. 그의 하숙집이 이 근방에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별을 헸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시」는 누상동 하숙 시절에 쓴 시다. 그는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를 나와 옥인동 아래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었다.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청운공원의 제일 높은 자락에 자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덕에서는 청운동과 옥인동, 누상동을 잇는 풍경이 차례로 이어진다.”(p.627)
윤동주 시비
정면에는 「서시」가, 뒤편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첫해에 쓴 시, 「슬픈 족속」이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서정을 배제한 의기로 충만하며,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가슴 아린 현실이 서렸다는 그 시가 말이다. 그렇게 윤동주의 성찰과 결기를 품고 있는 시비. 아마도 뿌듯하고 충만한 자존감으로 우뚝 서 있겠지. 영원히 윤동주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
부암동 쪽으로 서울성곽을 따라 걷는다. 친구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성곽 위에 올라 도란도란 이야길 나누고 있다. 그림 같은 풍경. 햇살 받은 모습이 그랬다. 그 아래서 함께 풍경을 바라보지 못한 채 놓여 있던 구두가 약간 안쓰럽긴 했지만.
초록지붕의 집
계속 길을 따르는데, 눈에 띈다. 아, 예쁘다. 감탄이 튀어나온다. 주근깨 빼빼 마른 우리 ‘빨간 머리 앤’이 살았다는 초록지붕도 살짝 떠오른다.(주. 지난 4월로 출간 102주년이 된 『빨간 머리 앤』의 원제는 『초록지붕의 앤』이다.)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찍었단다. “북악산을 내 집 앞마당처럼 볼 수 있는 집이라 참 좋아했다. 그런데 <찬란한 유산> 때문에 만천하에 알려져서 매력이 뚝 떨어졌다.(웃음)”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저런 곳에 사는 주인공이었다면, 딴 건 몰라도 마음씨 하나만은 끝내줬으리라. 물론, 아니면 말고.
이젠 막바지다
윤동주의 시가 아로새겨진 시멘트 계단을 지나 골목길을 타고 내려왔다. 분홍색 꽃잎이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영화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고,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가 마지막으로 만난(아마, 그 이후 둘은 다시 만나지 아니했을 것이다)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백설희의 노래, 「봄날은 간다」도. 연분홍 치마를 떠올리게 한 꽃잎들 때문이었을지도. 공식행사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비공식
박상준이 커피를 한 잔씩 주겠단다. 유후~ 아지트가 있었다. 깜짝 놀랐다. 아주 자그마한 카페. 이름하야, 유쾌한 황당. 부제는 부암동 산책안내소. 5월 초, 이 커피 하우스를 인수했단다. 단골에서 주인장으로. 황당한 쥔장의 유쾌한 변덕에 따라 메뉴는 변화무쌍할 것이란다. 부암동을 담고 싶다면, 이곳에 잠시 들러 부암동 산책의 기술을 전수받아도 좋겠다. 부암동은 쉬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암동이 삼청동처럼 카페와 레스토랑의 거리로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 이들은 산으로 숨어드는 그 지세에 기대를 건다.”(p.24)
그는 앞으로 정기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산책하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했다. 함께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나누고 싶다면, 부암동에 마련한 아지트 ‘유쾌한 황당’(☏ 070-8658-3448)과 인터넷 카페(cafe.naver.com/tourhwangdang)를 통하면 된다. “가끔 독자들과 함께 걷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다. 처음 만나서 낯선 얼굴들, 그러나 ‘서울’이라는 공통점으로 곧 친해질 이들과 함께 편안한 마음, 간편한 복장으로 서울을 산책하고 싶다. 그 길 위에서 서로의 서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우리라. 그날이 또 서울의 멋진 날이 된다면 어찌 아니 좋을까. 그날까지 나는 또 나만의 서울을 만나기 위해 이 도시의 어느 골목을 걷고 있을 것이다.” (‘시작하며’ 중에서)
『오!!! 멋진 서울』이 인상적인 것은, 박상준의 발걸음 속에 드러나는 서울의 진짜 얼굴이다. 감히 ‘진짜’라고 붙이는 게 조심스러운 일면도 있지만, 서울에 몸과 마음을 의탁해 있으면서도 서울을 모르는 서울 촌사람들에게 이 책이 유용하리란 것, 확신한다. 그의 발걸음에 녹아 있는 서울의 문화, 사람, 역사, 풍경 등이 그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시간이 갈수록 변해가는 서울의 모습들도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뭣보다 이 책의 장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면 완전히 좋을 길이 꽤 들어 있다는 것. 단, 이 책을 들키지 말 것. 애인을 위해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사전답사 했다고 호방하게 말할 것. 아마도, “오!!! 멋진 내 애인”이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골목길에서 키스 세례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나도 얼른 섭렵해야겠다. 그리고 말하련다.
자, 가자. 내 연인아. 당신을 위해 서울을 준비했다. 너에게 서울을 선물해줄게.
글을 읽는 당신에겐 좀 미안하다. 손발 좀 오그라들어도 참아주오. ^^;
이십여 년 전, 멋도 모르는 촌놈. 부암동 외삼촌 댁에서 잠깐 서식했다. 삼촌을 졸라 마련한 노가다(막노동) 현장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촌 댁은 하숙집이나 다름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 지쳐 쓰러지면 그뿐. 동네를 들여다볼 틈, 돌아다닐 엄두, 당최 없었다. 더구나 당시 촌놈에게 서울은 명동, 종로, 신촌과 같은 유흥과 환락이 휩쓴 뻑적지근한 풍경이 지배했다. 부암동? 처음 발 들여놓은 동네의 고즈넉한 풍경은, 촌놈의 레이더를 자극하지 못했다. 내 첫 번째 부암동의 기억. 하림각만 오로지 오롯이(?) 서 있는 가난한 기억.
다시 부암동
또다시 부암동
부암동을 찾았다. 이유가 있었다. 아주 특별한 산책. 『오!!! 멋진 서울 : 서울산책자와 떠나는 매력 만점 120곳 탐방』(박상준 글?사진|웅진리빙하우스 펴냄) 출간기념 저자와 함께하는 부암동 탐방의 시간. 타이틀 하여, “그대, 아직 서울을 안다고 하지 말아요.” 그래, 서울의 속살이 어깨너머 흘러내린 어느 봄날의 오후. 부암동을 다시 찾아 나선 이유. 아는 사람은 안다는 부암동의 매력과 속살을 살짝 엿 보고 싶었다. 내 가난한 부암동의 기억에 영양분을 보충해 주고 싶은 것도 한 가지 이유.
저자 박상준
역시 촌놈 출신으로, 이대역 사거리 근처에 사는, 그래서 ‘이대 사는 남자’. 12년째 살고 있는 서울은, 그에겐 ‘밥’이란다. 서울은 이젠 그의 밥줄이 됐으니까. 이 책에 앞서 지난 2008년, 『서울 이런 곳 와보셨나요? 100 : 당신이 몰랐던, 서울의 가볼 만한 곳』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서울내기들이 몰랐던 서울의 속살을 알려주는, 혹은 서울을 알고 싶은 이들의 호기심을 풀어주는, 민간 ‘서울 해설사’ 혹은 ‘서울 산책자’ 되시겠다. 사실 그도 그렇게 될 줄 몰랐다. 길을 나서니 서울이 자꾸만 민낯을 내밀고 새로운 말을 걸어왔단다. 서울과 사랑에 빠진 남자, 박상준. 서울을 걷고 서울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얻는다. 그는 이리도 말한다. “길은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표정을 드러냈다.”(p.9)
길
그렇게 길과 만난다. 오해 마시라. 박정아의 연인 길, 아니다. 박상준과 함께하는 길이다. 아마도 부암동은 내게 이전과 또 다른 표정을 지으리라. 서울 산책자가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서 모인 길동무들을 이끈다. 파스타가 맛있다고 한 ‘오월’을 끼고 오롯한 옛 정서를 탐하기에 좋은, 외려 샛강처럼 열린 보은 마트 옆 음산해(?) 뵈는 골목으로 향한다. 그의 심상의 길과 통한다는 그 골목. 더도 말고 덜도 마는, 그저 골목. 그는 2년 전부터, 부암동이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가 됐단다.
부암동을 좋아한다. 그 빛바랜 색감이 만드는 낡은 정서가 좋다. 걸음을 뗄 때마다 들고나는 길바닥의 두툼한 시간이 사랑스럽다. 서울에는 많은 동네가 있고 저마다의 색깔을 갖지만 내게는 어느 곳보다 부암동의 은빛이 명징하다. 마음에 갈무리한 ‘우리 동네’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겠지.(P.21)
70~80년대가 훅~
다가온다. 꽃과 잎, 혹은 나무들이 담장 밖으로 빼꼼 나와 눈인사를 건네고, 골목에 살포시 내려앉은 꽃잎이 내 발걸음을 환영한다. 박상준은 이 골목이, “4월에 가장 좋다”고 알려줬지만, 5월이면 어떻고, 또 다른 달이면 어떠랴 싶다. 분명히,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를, 내일 또 다를 길이니, 매일매일 달라지는 길이 궁금해졌다. 언젠가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속도로 살아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지막한 콧노래를 흥얼흥얼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부암동 길동무 가운데 부부가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골목길을 거니는 풍경. 꽃만 아름다우랴. 사람도 꽃만큼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골목길은 늘 사랑을 품고 있다. 떠올려보라. 골목길에서 나눈 키스. 안 해봤다고? 그렇담, 연애 좀 더 해보셔야겠고. 「골목길」이라는 노래도 떠오른다. 이 골목길도 얼마나 많은 사랑의 풍경을 품고 있을까. 골목길에게, 곳곳에 보이지 않게 자리하고 있을 사랑의 흔적, 사랑의 기억을 물어보고 싶어졌다. 더불어 문득 골목길이 되고 싶어졌다. <사랑니>에서 인영(정유미)이 했던 말을 약간 바꿔서. ‘다시 태어난다면 골목길이 되고 싶어.’
골목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골목 옆길, 사유지 길로 살짝 접어든다. 뭐, 괜찮단다. 사람 살기 좋은 동네, 부암동이니까. 한때 잠시 서식했던 강남의 어느 사유지 길엔 아주 무시무시한 경고가 붙어 있었다. ‘절대’라는 수식어까지 붙여가며, 타인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했던 강남의 그 경고문구. 참 많이 다른 풍경.
광장
무계정사길을 품은 골목이 확 넓어지더니 펼쳐진다. 안평대군, 몽유도원도, 현진건 집터까지.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이런 데가 있었다니…….” 박상준이 화답한다. “어렵게 오시라고, 쉽게 찾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아무렴, 길을 쉽게 열어주면 흥미가 떨어지는 법이다.
안평대군 이용 집터(무계정사 터)로 가는 무계정사 길은 호젓하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이 꿈에 본 무릉도원과 닮았다 해 정자를 지은 장소다. 그 꿈속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였다. 『운수 좋은 날』 『무영탑』 등을 쓴 소설가 현진건의 집도 그 곁에 있었다.(p.21)
“부암동 지키기 500평 주차장 반대”
빈터만 덩그러니 남았다지만, 골목길 곳곳에 나붙은 주차장 반대 플래카드가 선뜻 이해가 간다. 그 터에 공영주차장을 조성하겠다는 종로구청의 뜻에 반대하는 주민들. 주민이 아닌 나라도 한 표 던지겠다. 사람의 발이 아닌 자동차의 바퀴가 장악하게 될 부암동은 왠지 빈정 상한다. 반대마저도 시적이다. 동네 주민들은 다들 시인이련가.
키 낮은 집 어깨 맞댄 좁다란 골목길
둥그런 담 굽어드는 달큰한 속삭임
복사꽃 향 빚어가는 부암동 사람들
산책의 기술
다시 뚜벅뚜벅 발걸음. 산이 우뚝,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이 다른 대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산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대도시가 많지 않다. 그렇게 서울은 고개를 들면 산이 보이는 게 지형적인 장점인데, 최근 건물이 높아지면서 서울의 장점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 부암동이 좋은 이유는 사방에 산이 둘러싸여 있다는 거다.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등이 부암동을 둘러싸고 있다. 산책의 기술이 별것 아니다. 먼 산을 보고 걸으면 좋다. 특히 오감을 열어야 한다.”
느껴라
도시는 회색빛이란다. 회색빛 앞에선 나의 오감을 열고 싶지 않다. 미적 감수성을 해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부암동에선 다르다. 내 모든 세포를 열고 싶다.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는다. 새소리?바람 소리, 귀가 즐겁다. 발자국 소리, 숨소리까지도. 나를 간질이는 모든 것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구나. 아, 좋다. 나는 살아 있구나. 산책은 오감을 여는, 오감을 열어야만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오감이 즐거우면 감탄할 것이고, 감탄할 일이 많아지면 행복하다.
예스럽다
‘車길 없음’ ‘감사합니다 차고 앞’. 나무에 새겨진 이 문구들이 부암동의 분위기를 대변한다고나 할까. 예스럽다. 이렇게 동네를 장식하고 있는 것들도 그렇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개발제한구역이나 군사보호구역인 것이 호재(?)로 작용한 셈이다.” 토건국가의 막장개발 욕망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축복이었던 거다. 개발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개발하고, 사람과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거다.
자연을 존중한다
이것 역시 부암동을 대변한다 하겠다. 자연을 무턱대고 자르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차라리 인공을 양보한다. “벽에 나무가 살아 있으니 벽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런 모습이 동네 풍경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요소라고 본다.” 그렇다, 부암동은 조화를 찾는다. 혼자 잘난 척 않는다. 4대강? 거기엔 자연이 없다. 아니, 자연의 소리를 묵살한다. 인간 혼자 삽질한다. 물, 바람, 흙, 물고기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부암동 주민들을 청와대로!
자하미술관
지금까지 따라온 길, 자하미술관 가는 길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울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자하미술관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계속 오르막이다 보니 지친다는 게다. 지금까지 이미 10명 중 5명은 내려갔고, 이 이정표를 발견하지 못하면, 여기 건물이 미술관이겠거니 하다가, 실망하고 남은 5명 가운데 3명도 다른 길을 찾아 나설 거란다.
마지막 오르막
약간 과장해서 곰에 버금가는 크기의 개ㅡ이름이 ‘누루’란다ㅡ가 컹컹 짖어준다. “좀 섭섭하다. 날 수차례 봤는데도 아직도 저렇게 짖어댄다.(웃음) 여기서 남은 2명 중 1명이 또 내려간다. 같은 골목이라도 언제 오느냐에 따라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데, 그게 참 매력이다.” 하지만, 여전히 오르막은 이어진다. “하이원 스키장의 상급에 버금가는 경사진 오르막 같다”는 속삭임도 바람에 나부낀다.
“서울에서 제일 전망 좋은 미술관”
아마 그랬다지. “전망 좋은 미술관은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쉽사리 열어주지 않는다.”(p.24) 그리 높은 곳도 아니건만, 모르면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멀게 느껴질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자하미술관은 그 길의 꼭대기에서 사람을 밀어내고 끌어당긴다.”(p.24) 어쨌든 이 하얀 미술관, 반갑다. 1층 주전시실. 좋다. 천장은 높고, 특히 유리로 창을 내 채광도, 시쳇말로 죽인다. “이곳을 종종 찾는 이유는 꼭 미술품 때문만은 아니다. 올라가 보면 알 거다. 부암동 정경이 다 보이고, 보고만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공간이다.”
“인왕산의 턱밑에 뿌리내린 자하미술관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이라는 수식이 마음을 끌었다. 드라마 <떼루아>의 촬영지라 했다. 극 중 안지선(유선 분)의 집이었다. 2008년 6월에 개관했지만 그해 겨울 드라마 촬영으로 휴관했다.”(P.21)
진짜는 2층이다
1층 옆으로 나가면, 2층으로 향하는 바깥의 벽돌계단이 있다. 2층 2전시실 바깥의 남은 부지에는 좁은 길을 품고 잔디가 자란다. 아, 탐스럽다 싶은데, 약간 고개를 돌리니 풍경 작렬이다. 이건 직접 가보지 않고 얘기가 안 된다.
잔디 위의 망중한이다. 북악산의 가파른 산세가, 너울대는 북한산의 비봉능선이 마주한다. 묵언의 수행처럼 무언의 대화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p.27)
미술애호가 강종권 관장님이 직접 설계하고 설계한 구조란다. 이윤보다 문화의 공유가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작품 전시도 상업성보다 장래성과 실험성에 비중을 둔다는 자하미술관. 2층 전시장 통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풍경도, 그것 자체로 작품이다.
그리고 자하미술관에서 보았던, 가장 인상적인 어떤 산책.
골목길 풍경의 의외성
골목길은 의외성이 지배한다. “돌아다니다 보면 자기만의 습관이나 버릇이 생기는데, 나는 동네를 가면 무조건 올라간다. 부암동의 경우, 혼자 골목길을 따라가면 정말 괜찮은 풍경 볼 수 있다. 골목길 다니면 그렇다. 저 모퉁이를 돌면 굉장한 게 나타날 것만 같다.(웃음) 그러면서 또 모퉁이가 나오고, 그렇게 돌고, 또 나오고……. 2년 동안 여기도 참 자주 왔었는데, 지난달 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것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은 길을 걸어도 어느 계절에, 어떤 시간대에 오느냐에 따라 다르다. 궁상맞게 저녁에 혼자 온 적도 있지만, 친구들에게 어떤 설명보다 직접 데려오는 것이 낫다.”
갑자기 떠오르는 이승환의 노래, 「너를 향한 마음」. “(…)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일까♪/ 저 골목을 돌면 만나지려나~♬” 행여 모퉁이를 돌다가 우연히 만나는 첫사랑. 너무 진부한 클리셰지만, 두 사람이 어디서든 살아 있다면, 7784만분의 1이라도 만날 수 있을 확률. 한때는 그것이 부러웠다.
“이 동네만 좋은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책을 다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내가 사는 곳은 이대 부근의 연미동 골목인데, 3~4년 살았다. 어느 날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재미난 골목이 있었구나, 싶더라. 내가 사는 동네인데 정말 몰랐구나. 자신이 사는 동네를 돌아다녀라. 직장 출퇴근하느라 지금까지 몰랐겠지만, 한 번 돌아다니면 새로운 풍경이 보일 거다.”
누군가는,
집에서 음식을 시켜먹고, 어떤 연인은 부암동을 찾아 사진을 찍고 그들만의 데이트를 즐긴다. 여기는 부암동이다. 천천히 무계정사길을 내려왔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다시 다른 길을 오른다. 이번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란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시가 곳곳에서 흩날리는 공원이다. 「자화상」이 있고, 「코스모스」가 펼쳐지며, 「서시」를 읊으며, 「별 헤는 밤」과 「눈」 등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이 화려하진 않지만 사방으로 서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녁에는 특히 야경이 죽인다.(웃음)”
이승환
약간 엇박자이긴 해도, 한편으로 재미난 풍경이다. 정확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이승환 씨 팬들이 꽃을 조성하고 포토존을 만들었단다. 콘서트도 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윤동주의 흔적
왜 윤동주일까. 윤동주가 이곳에서 시상을 받았다. 그의 하숙집이 이 근방에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별을 헸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시」는 누상동 하숙 시절에 쓴 시다. 그는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를 나와 옥인동 아래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었다.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청운공원의 제일 높은 자락에 자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덕에서는 청운동과 옥인동, 누상동을 잇는 풍경이 차례로 이어진다.”(p.627)
윤동주 시비
정면에는 「서시」가, 뒤편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첫해에 쓴 시, 「슬픈 족속」이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서정을 배제한 의기로 충만하며,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가슴 아린 현실이 서렸다는 그 시가 말이다. 그렇게 윤동주의 성찰과 결기를 품고 있는 시비. 아마도 뿌듯하고 충만한 자존감으로 우뚝 서 있겠지. 영원히 윤동주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
부암동 쪽으로 서울성곽을 따라 걷는다. 친구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성곽 위에 올라 도란도란 이야길 나누고 있다. 그림 같은 풍경. 햇살 받은 모습이 그랬다. 그 아래서 함께 풍경을 바라보지 못한 채 놓여 있던 구두가 약간 안쓰럽긴 했지만.
초록지붕의 집
계속 길을 따르는데, 눈에 띈다. 아, 예쁘다. 감탄이 튀어나온다. 주근깨 빼빼 마른 우리 ‘빨간 머리 앤’이 살았다는 초록지붕도 살짝 떠오른다.(주. 지난 4월로 출간 102주년이 된 『빨간 머리 앤』의 원제는 『초록지붕의 앤』이다.)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찍었단다. “북악산을 내 집 앞마당처럼 볼 수 있는 집이라 참 좋아했다. 그런데 <찬란한 유산> 때문에 만천하에 알려져서 매력이 뚝 떨어졌다.(웃음)”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저런 곳에 사는 주인공이었다면, 딴 건 몰라도 마음씨 하나만은 끝내줬으리라. 물론, 아니면 말고.
이젠 막바지다
윤동주의 시가 아로새겨진 시멘트 계단을 지나 골목길을 타고 내려왔다. 분홍색 꽃잎이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영화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고,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가 마지막으로 만난(아마, 그 이후 둘은 다시 만나지 아니했을 것이다)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백설희의 노래, 「봄날은 간다」도. 연분홍 치마를 떠올리게 한 꽃잎들 때문이었을지도. 공식행사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비공식
박상준이 커피를 한 잔씩 주겠단다. 유후~ 아지트가 있었다. 깜짝 놀랐다. 아주 자그마한 카페. 이름하야, 유쾌한 황당. 부제는 부암동 산책안내소. 5월 초, 이 커피 하우스를 인수했단다. 단골에서 주인장으로. 황당한 쥔장의 유쾌한 변덕에 따라 메뉴는 변화무쌍할 것이란다. 부암동을 담고 싶다면, 이곳에 잠시 들러 부암동 산책의 기술을 전수받아도 좋겠다. 부암동은 쉬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암동이 삼청동처럼 카페와 레스토랑의 거리로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 이들은 산으로 숨어드는 그 지세에 기대를 건다.”(p.24)
그는 앞으로 정기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산책하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했다. 함께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나누고 싶다면, 부암동에 마련한 아지트 ‘유쾌한 황당’(☏ 070-8658-3448)과 인터넷 카페(cafe.naver.com/tourhwangdang)를 통하면 된다. “가끔 독자들과 함께 걷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다. 처음 만나서 낯선 얼굴들, 그러나 ‘서울’이라는 공통점으로 곧 친해질 이들과 함께 편안한 마음, 간편한 복장으로 서울을 산책하고 싶다. 그 길 위에서 서로의 서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우리라. 그날이 또 서울의 멋진 날이 된다면 어찌 아니 좋을까. 그날까지 나는 또 나만의 서울을 만나기 위해 이 도시의 어느 골목을 걷고 있을 것이다.” (‘시작하며’ 중에서)
『오!!! 멋진 서울』이 인상적인 것은, 박상준의 발걸음 속에 드러나는 서울의 진짜 얼굴이다. 감히 ‘진짜’라고 붙이는 게 조심스러운 일면도 있지만, 서울에 몸과 마음을 의탁해 있으면서도 서울을 모르는 서울 촌사람들에게 이 책이 유용하리란 것, 확신한다. 그의 발걸음에 녹아 있는 서울의 문화, 사람, 역사, 풍경 등이 그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시간이 갈수록 변해가는 서울의 모습들도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뭣보다 이 책의 장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면 완전히 좋을 길이 꽤 들어 있다는 것. 단, 이 책을 들키지 말 것. 애인을 위해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사전답사 했다고 호방하게 말할 것. 아마도, “오!!! 멋진 내 애인”이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골목길에서 키스 세례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나도 얼른 섭렵해야겠다. 그리고 말하련다.
자, 가자. 내 연인아. 당신을 위해 서울을 준비했다. 너에게 서울을 선물해줄게.
글을 읽는 당신에겐 좀 미안하다. 손발 좀 오그라들어도 참아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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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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