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연인들이 겪게 되는 낯섦에 더하여
이 영화는 두보와 꽤 관련이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도 그렇지만, 왜, 두보의 삶이 그리 순탄치 못했잖아요. 그에게 ‘호우시절’ 또한 드물었으리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래서 영화에서 내리는 따뜻한 봄비에서도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있었어요.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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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 <호우시절>, 2009, 허진호 감독 -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게 아름다운 것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시간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아름다운 거지요. 시간은 제 아름다움을 숨긴 채 그 시간 속에 있는 존재나 현상들을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죽음이 예정된 삶이 아름답고, 이별이 있기 때문에 사랑도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아름다운 것은 그 삶이나 사랑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시간 자체가 아닐까요? 그래서 시간은, 시간이란 것이 우주에서 태어난 이래 한 번도 그 절대미의 권좌를 잃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의 아름다움을 노출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는 거지요.

영화의 제목인 ‘호우시절’의 의미도 역시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알려진 대로,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라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때를 알고 내리는 비가 그리 쉬울까요? 어쩌면 그 제목은 아이러니인 것 같습니다. ‘호우시절’이란 제목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시구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제목에 비추어 본다면 봄밤에 내리는 비겠지요? 영화 속에서도 ‘동하’와 ‘메이’, 두 남녀가 비를 함께 맞았을 때 비로소 진심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거든요. 마침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비’라는 핑계가 생긴 거지요.


두 사람이 진심을 숨길만 한 이유 또한 ‘시간’이란 것에 있습니다. 이 영화의 시작조차 바로 시간의 차이, 즉 시차로부터입니다. 배우 정우성이 연기했는데요, 주인공 ‘동하’가 비행기에서 중국 사천공항에 내리기 직전 시계를 한 시간 전으로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중국과 한국의 시차가 한 시간인 거죠. 그리고 사천의 두보초당에서 ‘메이’를 만납니다. ‘메이’는 중국인이고 이들은 미국 유학시절에 만난 관계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서 다시 중국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서로 연락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각자에게 많은 일이 생겼겠지요.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해 서로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머뭇거리는데요, 여기서 또 다른 시차(時差/視差)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유학시절과, 다시 만나게 된 시간 사이의 시차인 것이죠. 이 시차는 둘의 기억조차 다르게 만들어 놓습니다. 둘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어 보려 하지만 서로가 기억하는 내용이 좀 달라요.

특히 동하는 메이가 기억하는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고집을 하는데요, 그때, 메이 역의 고원원 씨의 눈빛이, 계속 어떤 갈증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더라고요. 무슨 말을 할듯하다가 딴청을 피우고, 손을 내밀듯하다가 마음을 접어버리는 듯한 행동이랄까요? 어느 신문에 실린 정우성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요, 정우성씨는 고원원 씨의 다양한 리액션을 장점으로 꼽더라고요.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그러니까 상투적이지 않은 그녀만의 독특한 앙상블 연기가 강점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메이와 동하의 관계에서 더욱 긴장이 느껴진 것은, 이들 사이에 놓인 ‘시차’라는 갭 말고도 ‘언어의 차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하와 메이 사이에 통하는 언어는 영어밖에 없어요. 동하는 중국어를 모르고 메이는 한국어를 모릅니다. 결국 동하와 메이가 함께 사용하는 영어는 둘에게는 모두 모국어가 아니고 이방의 언어인 셈입니다. 우리도 어쩌다 외국인과 외국어로 대화할 때면, 어쩐지 자기 자신이 아닌 듯한 낯섦을 느끼잖아요. 낯선 상대와 만나기 전에 먼저 낯선 자신과 조우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이런 낯선 자신과의 대면이 사실 연애의 과정이기도 하지요? 보통, 사랑을 하게 되면, 블랙박스에 들어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가 하나씩 공개되는 듯한 느낌을 받잖아요. 동하와 메이의 사랑도 이렇게 점차 기억을 맞추고, 몰랐던 자아를 알게 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들에겐 보통 연인들이 겪게 되는 낯섦에, 시차와 언어로 인한 또 다른 낯섦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간절하겠지요?


이 영화는 두보와 꽤 관련이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도 그렇지만, 왜, 두보의 삶이 그리 순탄치 못했잖아요. 그에게 ‘호우시절’ 또한 드물었으리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래서 영화에서 내리는 따뜻한 봄비에서도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있었어요. 메이가 사용하는 두 가지 언어에서도 그런 점이 비치는데요, 그녀가 중국어로 말할 때는 어쩐지 우울해 보입니다, 영어로 말할 때는 산뜻해 보이는 반면에요.

두보와 관련된 장면을 또 하나 말씀드린다면, 동하가 두보초당에 가서 맨 처음 두보의 입석상을 마주했을 때 그 두보의 긴 손가락을 먼저 천천히 만지거든요. 그런데 나중 또 다른 장면에서 메이의 손가락을 그렇게 만지는 장면이 있어요. 메이와 동하는 모두 두보의 시를 사랑하고요.

그리고 바로 그 두보의 초당에서 대숲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렸는데, 저도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니 낙엽이 바람 사이에서 마른 소리를 내며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일상이 한 순간 영화의 한 컷으로 편입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우리의 일상도 영화와 오버랩 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글을 연재하는 동안 그런 점들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었는데요,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연재의 마지막인데요, ‘호우시절’이라는 영화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게 되니 또 다른 감회가 생기는데요. 영화를 많이 보시라는 말씀보다는 좋은 영화에 대한 잔상을 많이 남기시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전해 드리고 싶어요. 영화에 대한 잔상은 각박한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고, 또 간혹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요.



1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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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rim49

2012.08.31

오호. 이렇게 보니 더 영화가 재밌게 느껴지네요. 다시한번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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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2012.08.09

아. 비마져 타이밍. 제가 지금 이렇게 외롭고 적적한건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거겠죠? 뭐든 다 때가 있으니까. 좋은 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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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a223

2012.07.12

호우시절..지금은 장마시절....생각해보면 지금 내리도 장마도 호우인 것 같아요. 올해는 유난히 비가 안와서 가뭄이 들었는데 비가 와주니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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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정우성>, <고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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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은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문학을 가르치는 그녀는, 학생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문학을 가까이 하길 바란다. 20세기에 한 시인은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21세기엔 “아무도 병들지 않았지만, 모두들 아프다.”라고 그녀는 진단한다. 이 환부가 없는 아픔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치유의 시간만이 흐를 때, 문학이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 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21세기 문학의 소명은 치유에 있다고 믿는다. 세상 대부분의 일을 책, 영화, 드라마, 음악으로 배웠다. 마흔 즈음부터 그 배우고 익힌 것을 몸소 실험하면서 인문학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인문학으로 사랑뿐만 아니라 육아, 직장생활, 돈 쓰기나 쇼핑, 심지어 거절까지도 잘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문학 과격주의자이다. 감성만 있으면 늙어도 그냥 늙는 게 아니라고 믿는 감성 낙관주의자이며, 행복하지만 이 행복이 낯설어서 더 신이 나는 행복전향자이다. 그 외 고독능력자, 롤랑 바르트 신봉자, 작가 노희경처럼 쓰고 싶었던 인문학자이기도 하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KBS 진주 라디오에서 ‘책 테라피’(bibliotherapy) 코너를 진행했다. 책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보살피는 과정과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시간을 거치면서 책이 얼마나 안전하며 또 은밀한 치유제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2010년 하반기에는 이별한 여자의 치유 과정을 담은 ‘문학치료의 (불)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영화를 통한 위로와 이해의 메시지를 담은 에세이 『이토록 영화 같은 당신』을 펴냈으며, 그 외 저서로 『여자의 문장』,『하루 10분 엄마의 인문학 습관』, 『그녀의 시간』, 『엄마와 집짓기』,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 『모든 순간의 인문학』, 『이별리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