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선고 받고 18년 만에 무죄 입증, 결정적 증거는?
타액에는 우리의 상상보다 많은 양의 구강 상피 세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강간 피해자의 유두, 범인이 사용한 컵과 담배꽁초 등에서 쉽게 DNA를 확보할 수 있다. 심지어 과일을 깨문 자국에서도 DNA를 발견할 수 있다.
글ㆍ사진 표창원
201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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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액에는 우리의 상상보다 많은 양의 구강 상피 세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강간 피해자의 유두, 범인이 사용한 컵과 담배꽁초 등에서 쉽게 DNA를 확보할 수 있다. 심지어 과일을 깨문 자국에서도 DNA를 발견할 수 있다. 가끔 범죄 현장에 마치 동물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 대소변을 남기는 범인이 있다. 여기에도 범인의 DNA는 존재한다.”


단순 절도 사건의 범인이었다. 주택가를 돌며 네 곳에 침입해 물건을 훔치고 달아난 범인이 잡혔다. 연이은 절도 사건에 분노하고 불안에 떠는 주민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 기약 없는 잠복 수사에 나섰다가 현행범으로 붙잡은 것이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 열린 재판에서 초범, 피해액 경미, 반성하는 태도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자 바로 풀려났다. 범죄 현장에서 직접 느끼는 형사나 피해자들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고귀한 판사님의 아량과 관용’ 덕분이었다.

형사들은 열린 창문을 통해 침입하는 그의 수법과 범행 대상 지역이 서울시 용산구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수상하게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속되기 전 체포 상태에서 DNA 검사를 할 수 있는 구강 상피 세포를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둔 상태였다. 그가 집행유예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보내 온 긴급 회신은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신길동 발바리’였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절도 방식과 동일하게 혼자 사는 여성의 집만 골라 열린 창문을 통해 침입한 뒤 흉기로 여성들을 위협, 강간하고 금품을 강취해 온 연쇄 성폭행범이었던 것이다. 자유의 기쁨을 채 느끼기도 전에 ‘신길동 발바리’는 다시 그가 있어야 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인 ‘철창 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번엔 아주 오랜 세월을.

단순한 절도범으로 알고 DNA를 채취해 두지 않았다면 그 ‘발바리’는 여성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유린하고 평생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는 잔혹하고 파렴치한 성폭행 범죄를 계속 저질렀을 것이다. 절도범의 독특한 수법을 가볍게 여겨 지나치지 않고, 범죄자는 한 가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한 베테랑 형사들의 노련함이 DNA라는 첨단 과학수사 기법을 만나서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미국에서는 1992년, 잘못된 목격자 또는 피해자의 진술, 수사관의 증거 조작, 불확실한 증거를 통한 오판 등에 의해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DNA 검사를 실시하는 ‘결백 입증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를 실시했다.


가장 최근에 ‘결백 입증 프로젝트’에 의해 자유를 되찾은 사람은 2011년 8월 19일, 18년간의 억울한 옥살이 끝에 석방이 결정된 세 명의 공범 데미안 에콜스(Damien Echols), 제이슨 발드윈(Jason Baldwin) 그리고 제시 미스켈리(Jessie Misskelley)다. 언론에 의해 ‘서부 멤피스 삼총사(West Memphis Three)’로 불린 이들은 10대 청소년이던 1993년, 동네에서 발생한 세 명의 남자 어린이 피살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어 12시간에 걸친 경찰 신문 끝에 범행을 자백하고 각기 사형 및 종신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와 달리 법정에서는 결백을 호소하며 눈물을 쏟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살해당한 세 명의 피해 어린이들과 겹쳐 보이는 이들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부모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백 입증 프로젝트’의 도움을 받아 수차례에 걸쳐 현장 증거물에 대한 DNA 분석을 실시한 끝에 18년 만에 무죄를 입증해내고 말았다.


 

한국의 CSI 공저 표창원,유제설 | 북라이프

프로파일러 표창원 교수와 과학수사 전문가 유제설 교수가 안내하는 경이롭고 치밀한 CSI의 현장! ‘과학수사’를 통해 형사들을 지원하는 현장 과학수사 요원과 실험실 법과학 전문가들을 ‘CSI’로 정의하고, 그 세부 분야와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들을 소개한다. 오제이심슨 사건의 무죄 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세계적 법과학자 헨리 리 박사, 안정된 연구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남자들도 손사래 치는 사건현장 업무에 뛰어든 이현정 검시관 등 과학수사계의 ‘스타’들을 망라…

#CSI
1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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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ee78

2013.05.30

휴...18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라... 정말 상상할 수가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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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a2to

2013.01.29

와 진짜 억울하셨겠다 ㅠㅠ 엄청난 뒷이야기네요........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새삼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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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비

2012.02.20

DNA라는 것, 정말 대단하군요.
당시엔 10대였다니 정말 억울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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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표창원 교수는 실제 경찰관 출신으로 연쇄살인, 엽기범죄 등 각종 범죄와 살인자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해내는 걸로 유명한 한국의 ‘프로파일러’로 현재 범죄학, 범죄심리학, 피해자학 등을 강의하는 경찰대학 교수이다. 그는 1989년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1991년 경기도 화성경찰서, 1991년~1992년 경기도 부천경찰서 형사과, 1992년~1993년 경기지방경찰청 외사계에서 근무했다. 1993년부터 4년간 학업에 매진하여 영국 Exeter 대학교 석사 및 박사 (경찰학, 범죄학)학위를 받았다. 경찰청 강력범죄 분석팀(VICAT) 자문위원, 경찰청 미제사건 분석 자문위원, 범죄수사연구회 지도위원를 역임했으며 미국 샘휴스턴 주립대학교 형사사법대학 객원교수, 한국심리학회 범죄심리사 과정 강사, 경찰 수사보안연수소 범죄학 및 범죄심리학 강사, 법무연수원 범죄학 및 범죄심리학 강사로 활발한 강의활동을 해왔으며 아시아경찰학회 총무이사 및 회장을 지냈다. 그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이유 없는 분노와 복수심에 빠져 있는 잠재적 연쇄살인범들이 우리 사회 각 기능의 제역할로 인해 상처를 치유 받고 교훈을 얻고, 행동이 교정되어 무모하고 비극적인 공격의도를 꺾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관련된 범죄 관련 저서들을 집필 중이다. 저서로 『한국의 연쇄살인』,『EBS 지식 프라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