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모퉁이 집만 골라 살았을까? - 뻬쩨르부르그의 모퉁이 집
도스또예프스끼가 모퉁이 방에서 본 것은 무엇보다도 러시아 사회의 불행한 참상이었다. 그는 너무 끔찍해서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것을 외면해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는, 민중들의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삶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모퉁이 방에 앉아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교차점을 찾기 시작했다.
글ㆍ사진 이병훈
201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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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번의 이사

1841년 8월 도스또예프스끼는 공병학교를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장교 과정으로 진급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이상 공병학교 기숙사에 머무를 수 없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처음 방을 구해 나간 곳은 까라반나야 거리로, 이곳은 네프스끼 대로와 만나는 폰딴까 운하 뒷길이다.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1842년 봄까지 머물다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다시 거처를 블라지미르스끼 대로 11번지로 옮겼다. 네프스끼 대로의 번잡함이 그의 기질에 맞지 않았던 걸까.

도스또예프스끼가 살았던 집은 3층짜리 아담한 건물로 옛 모양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는 1842년 봄부터 1846년 1월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세를 얻은 방은 2층으로 방 세 개와 현관방, 부엌이 딸려 있었다. 창문은 모두 세 개로 그라프스끼 골목길 쪽으로 향해 있다. 방은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크고 비싼 편이었다.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집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집주인은 당시 우체국장이었던 K. 쁘랴니치니꼬프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선량하고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였다.

이 집을 구할 당시 도스또예프스끼는 스물한 살이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뻬쩨르부르그에 살면서 스무 번에 걸쳐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그 주소지들을 쫓아 돌아다니면서 나는 문득 묘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가 살았던 집들이 대부분 길모퉁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살던 19세기 중후반 당시의 주소지를 확인하면 대번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살던 집 주소에는 유난히 뻬레울로끄переулок, 우골угол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 있다. 러시아어로 ‘뻬레울로끄’는 골목길이라는 뜻이고, ‘우골’은 길모퉁이 또는 모서리를 뜻한다.

그가 살던 주소지에 이런 단어가 들어 있지 않은 경우에도 실제로 가보면 어김없이 대로, 길, 골목길, 모퉁이길의 교차로에 건물들이 위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러시아인들은 이를 두고 도스또예프스끼가 모퉁이 집에 유달리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도스또예프스끼가 살았던 집들의 ‘현 주소’를 일별해보자.


① 블라지미르스끼 대로 11번지(1842~1846).
② 보즈네센스끼 대로 8번지(1847~1849).
③ 까즈나체이스까야 거리 1번지(1861~1863).
④ 까즈나체이스까야 거리 9번지(1864).
⑤ 까즈나체이스까야 거리 7번지(1864~1867).
⑥ 그레체스끼 대로 6번지(1875~1878).
⑦ 꾸즈네치니 골목길 5번지(1846, 1878~1881).



블라지미르스끼 대로 집
보즈네센스끼 집

까즈나체이스까야 거리 7번지-죄와 벌
꾸즈네치니 골목길 5번지


사진에서 보듯이 도스또예프스끼가 살았던 집은 모두 모퉁이를 끼고 서 있다. 이 사실은 도스또예프스끼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그는 왜 하필 모퉁이 집만 골라 살았던 것일까. 단순한 개인적 취향일까, 아니면 거기에 뭔가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일까.


도스또예프스끼 작품과 모퉁이 집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도스또예프스끼가 모퉁이 집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인공들도 그런 공간에 배치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죄와 벌』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의 하숙방도 모퉁이에 위치해 있고, 여주인공 소냐 마르멜라도바의 거처도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낀 모퉁이 집이다. 심지어 라스꼴리니꼬프가 살해한 전당포 노파의 집도 사방으로 교차하는 모퉁이에 서 있다.

골목을 낀 모퉁이 집 2, 3층에서 거리를 내다보면 무엇이 보일까. 정면이 막히지 않고 사방으로 터진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거리는 항상 사거리 아니면 삼거리로 교차로를 이룬다. 거리를 쉴 새 없이 오가는 행인들과 마차를 관찰할 수 있다. 길거리에 늘어선 상인들의 행렬, 건물 지하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 지하 선술집에서 난폭하게 보드까를 마시는 주정뱅이들, 어린 자식들을 학대하는 부모들, 몸을 파는 창녀들이 그들이다. 각각이 한 장면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장면의 작은 디테일들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이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런 사실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모퉁이 집은 모든 것이 교차하는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작가로서 본능적으로 이 교차점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그가 본 것은 러시아 민중의 삶이었고,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였다. 그에게 모퉁이 방은 이런 운명의 교차점을 항상 관찰할 수 있는 확대경이었던 셈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모퉁이 방에서 본 것은 무엇보다도 러시아 사회의 불행한 참상이었다. 그는 너무 끔찍해서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것을 외면해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는, 민중들의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삶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모퉁이 방에 앉아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교차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의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으며, 길거리에서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그것을 현실 너머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교차로의 ‘끄레스뜨’, 즉 교회의 십자가였다.

이런 사실을 반증하듯 도스또예프스끼가 살았던 집 근처에는 예외 없이 러시아정교회 사원이나 교회가 있다. 공병학교 모퉁이 방에서는 성聖빤쩰레이몬 교회를 가까이 볼 수 있고, 블라지미르스끼 대로의 집 근처에는 성모 마리아 블라지미르 이꼰 사원이 있다. 보즈네센스끼 대로의 집 옆에는 이삭 성당이 있고, 센나야 광장 인근의 집들 근처에는 지금은 사라진 성모 승천 사원이 있었다. 십자가도 상징으로 보면 교차점을 닮았다. 모퉁이 방에서 현실의 비참한 정경을 목격한 도스또예프스끼는 사원이나 교회 지붕 위에 고요히 솟아 있는 황금빛 십자가를 구원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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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이병훈 저 | 문학동네

저자가 모스끄바 국립대학 재학 시절 도스또예프스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부터 모아온 방대한 자료와 더불어, 2009년과 2010년 여름,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모스끄바, 대부분의 작품활동을 전개한 뻬쩨르부르그,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중 4년간 감옥살이를 한 옴스끄, 말년에 가족과 전원생활을 즐긴 스따라야 루사 등 직접 취재한 기록을 담았다...

 



#도스또예프스끼 #죄와 벌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1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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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스테네스

2012.09.30

러시아 여행간 친구에게 꼭 물어봐야겠네요 저도 가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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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여신

2012.09.21

환경이 정말 작품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 같습니다. 역시 문화를 보면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말이 틀린말이 없네요. 지금이야 우리가 모퉁이 집에 사는것도 조금은 낭만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바라볼수 있지만 당시대의, 그리고 그런집에만 살아야햇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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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7.27

모퉁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그냥 길이면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잖아요. 아니면 십자가 모양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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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모스끄바 국립대학에서 러시아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강의교수로 재직중이며, 같은 대학 의대에서 '문학과 의학'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미하일 부가꼬프의 『젊은 의사의 수기.모르핀』, 벨린스끼 문학비평선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