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 수배 몽타주로 본 오늘의 주인공들.
왼쪽부터 1975년10월 외딴집 연쇄살인사건의 김대두, 1975년8월 미제 유괴살인사건의 범인 몽타주,
1973년8월 구로공단 총기사건 범인 이종대. 실물과 많이 다른 몽타주도 있다.
“살인이 제일 쉬웠어요.”
그에게 가장 어울릴 법한 말이다. 총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주로 칼과 망치를 이용했다. 때로는 낫과 돌과 절구공이를 썼다. 1975년8월13일부터 10월7일까지 55일간 외딴집만 골랐다. 17명을 죽였다. 주로 힘없는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당시엔 ‘외딴집 연쇄살인사건’으로 불렸다.
범인은 그 유명한 ‘김대두’다. 살인사건 분야의 한국신기록 보유자로 오래도록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1982년4월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에서 우범곤 순경이 4개 마을을 돌며 총기를 난사해 56명을 죽이기 전까지 7년동안! 비총기 분야로 한정하자면, 2004년 7월 유영철이 칼과 망치로 부유층 노인과 여성 등 20명을 8개월간 죽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29년 동안!!
아버지의 스크랩 9, 10권(1973년1월~1976년10월)을 마지막으로 펴본다. 이번 주제는 ‘수사반장’이다. 난데없이 70년대 문화방송 드라마 이름을 댄 것은, 강도*살인사건으로 좁혀서 살펴본다는 뜻이다. 70년대 초반 스크랩에서 ‘다방 인질극’이 빈번하게 등장했다면, (채널예스 연재 ‘김포공항선 인공기 휘날리고, 다방에선 카빈총이 불을 뿜고’ 참조) 중반 들어서면서부터는 비정한 잔혹살인극이 대세다. 다방인질극 역시 잔혹하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이뤄지거나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애원조 신파의 요소가 적지 않았다. 이에 반해 70년대 중반 스크랩에 나오는 살인극은 대부분 계획적이고 치밀하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스크랩에 나오는 기사들의 면면을 통해 ‘범죄의 세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만큼 사회가 살벌해져 갔다. 때는 바야흐로 유신의 절정기였다. 유신시대 공권력을 농락했던 세 가지 살인사건 + 알파를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알파’란 글을 쓰다 예기치 않게 넣어버린 ‘깍두기’다. 이 글에서 온전히 끼워주기 힘든 인물이라 비유적으로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어쨌든 도합 네 가지 사건 주인공들의 결말은 제각기 다르다. 먼저, 사법보복으로 끝난 김대두 사건.
외딴집 연쇄살인범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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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찌질하기 짝이 없다. 위의 표를 근거로 김대두가 살인을 통해 돈을 얼마 뜯어냈는지 계산해보았다. 2번째 범행 250원 4번째 범행 2천500원 5번째 범행 2만1000원 6번째 범행 1천500원 7번째 범행 180원 8번째 범행 1천450원. 모두 더하니 총 2만6천880원이다. 이 돈을 얻으려고 그렇게 무자비한 살상을 벌였다는 말이냐. 지금 화폐가치로 아무리 비싸게 계산해봤자 1백만 원도 안 되는 현금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리라. 희대의 살인마는 바보였단 말인가. 아니면 사이코패스?
그를 체포했던 청량리 경찰서 강력반 홍인수 순경에 따르면, 김대두는 “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몸이 약해 내가 먼저 죽이기 전에는 당한다고 생각했다.” 국선변호인이었던 이상혁씨에게는 이런 말도 했다. “남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불빛은 많은데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있는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무관심뿐이었다.” “농촌이 아닌 도시에서 태어났더라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콤플렉스와 소외감이 괴물로 성장해 사람을 잡아먹었단 말인가.아버지는 ‘살인마’라는 시를 남겼다.
살인마 |
김대두만 ‘살인마’였나? 김대두 사건을 전하는 10월10일치 <한국일보>기사 바로 앞장에는 9월3일치 ‘중앙 학도호국단 발단’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붙어있다. 5.16광장(지금의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발단식에서 김종필 국무총리는 “국난대처 자각”운운하는 훈시를 했다고 한다.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1975년5월3일)에 이어 나온 작품이 바로 대학을 군사조직화해 끽소리 못하게 하려는 학도호국단이었다. 긴급조치 9호 한 달 전인 4월9일에는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다. ‘살인마 김대두’를 저주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직전, “살인마 박정희는 천벌을 받으라”는 인혁당 사건 유족들의 저주가 대한민국 하늘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공권력이 눈에 불을 켜고 애꿎은 유신 반대세력을 때려잡고 있을 때 김대두는 더 애꿎은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 그 삼엄했던 경비와 감시체제 아래서 범행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검문을 받은 일은 없었다.
김대두의 최후는 ‘사형’이었다. 1976년12월28일이 집행일이었다. 화장되어 경기도 벽제의 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는 죽기 전 종교에 귀의했고, 한 마리의 양처럼 변신했다. 교화위원들에게 여러 편지도 남겼다. “사회의 전과자들을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갱생의 길을 넓게 열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유언장도 썼다. 김대두는 떠났다. 여기에 반해, 다음 사건의 주인공은 지금도 잘 살고 있을지 모른다.
‘비상’ 비웃는 ‘어린이수난’ |
김대두 사건 두 달 전의 보도다. 어린이 현정양과 준일군이 연쇄유괴살해되었는데, 이미 그에 준하는 살인미수와 유괴미수사건이 하나씩 총 두 건 있었고, 거기에 덧붙여 여아 추행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모두 한 주 안에 잇따라 벌어진 사건이라 경찰엔 비상이 걸렸다. 가장 쇼킹한 것은 사진이다. 지금 같으면 실리지 못할 주검 모습이다. 설명은 이렇다. “범인은 이상성격에 가까운 잔인성의 소유자. 준일군을 살해한 후 배 위에 ‘후하하 죽였다’라는 잔인한 필적을 남겼다.” 기사에 따르면 현정양의 배 위에다가도 ‘범천동 이xx 대신공원에서죽였다’는 필체를 남겼다니 질색할 일이다.
굳이 이름붙이자면 ‘매직펜 유괴살해사건’이다. “후하하 죽였다”는 필체가 남은 이 사진은 내 머릿속에 수십 년 간 불멸의 이미지가 되었다. 그 기사스크랩 바로 옆 장을 보니 이런 제목의 기사도 있다. “아내 죽인 불륜의 아버지 철부지 3남매 살해.”(8월29일치) 첩을 둔 가장이 아내에 이어 11살 장남과 9살 장녀, 3살 차남을 둔기로 때리거나 목을 졸라 죽여 암매장한 일가족몰살사건이다.
어지간히 충격적이지만 이 나쁜 아버지 기사는 어린 내 눈에 별로 띄지도 않았나 보다. 아마도 어릴 적엔 ‘불륜’이라는 말뜻도 모르지 않았을까 싶다. 난 그저 그로테스크한 글씨가 적힌 아이의 배만 꿈속에 자주 나타나곤 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유괴사건이나 살인사건이 벌어질 때에도 난 아버지의 스크랩 속 어린이의 배 위에 적힌 여섯 글자를 상기하곤 했다. 결과적으로도 범인은 자신의 행위가 신문지상에 대문짝만하게 실림으로써 ‘언론플레이’에 절묘히 성공한 셈이다.
후.하.하.죽.었.다. “ㅋㅋㅋ 죽었다”라고 쓰지 않아 다행일까. 그 범인은 누구였을까. 잡혔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미제 사건이다. 36년 전이니 이젠 공소시효도 지나 처벌도 불가능하다. 사건의 주인공은 다음에 또 비슷한 짓을 했을까?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범행대상을 어린이가 아닌 다른 종류로 물색하지는 않았을까? 이 사건은 나에게 도를 더해가던 범죄의 흉폭함과 그 공포를 시각적 장치로 최대화해 보여주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본 그 이미지가 40년이 다 되도록 지워지지 않는 걸 보면 그렇다.
이제 세 번째 사건이다. 맨 앞의 사건이 사형으로 끝나고, 두 번째가 미제 로 남았다면 세 번째는 처절하게 비극적인 라스트 신을 보여주었다. 이 글에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시계를 1~2년 전으로 돌려보자. 아버지의 스크랩엔 두 번에 걸쳐 기사가 등장한다. 하나는 1973년8월이며, 또 하나는 1974년7월이다. 그 첫 번째 기사.
이 ‘얼굴’을 잡아라 70~80m를 걸어 전씨가 회사정문수위실 앞에 왔을 때 속도를 올린 차는 전씨를 10m쯤 앞지른 수위실 옆에 섰고 청년1명이 내렸다. |
이 사건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총기와 차량을 함께 사용하였고, 치밀성과 대담성, 기동성을 갖춘 선진형 범죄를 보여주었다”는 언론의 평가를 남겼다. 사진설명에 적혀있는 범인의 쪽지메모도 범인들이 뭔가 심상치 않은 족속들임을 은밀히 암시하고 있다. “성산동에 버려진 범행 코티나. ‘넘버’를 떼어버린 찻속에는 ‘지문채취 열심히 해보슈’란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경찰은 범행단서에 대한 그 어떤 감을 잡지 못했다. 지문채취도 하지 못했다. 그걸 확신한 듯한 한 마디. “지문채취 열심히 해보슈?” 사건 실화에 기반한 소설 『지구인』의 해당 대목을 보도록 하자.
“갑시다.” |
범인들의 이름은 이종대, 문도석이다.(구로공단 총기사건의 경우 이종대의 단독범행이지만, 차량유기 땐 문도석이 함께 있었다). ‘카빈 2인조 강도’로 불렸던 이들은 자신만만한 척 메모를 남겼지만, 실제로는 초조한 상태였다. 1972년7월27일 상업은행 용산지점에서 학교공금 55만2백60원을 찾아나오던 김영근(53, 상명국교 용원)을 납치해 돈을 빼앗았다. 납치라는 모험 치고는 액수가 성에 차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한 탕을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총이 필요했다. 결국 두 달 뒤인 1972년9월6일엔 평택군 팽성면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3정과 실탄 120발을 훔쳤다. 총은 그들에게 최고의 이상이요 최대의 희망이었다. 가급적 인명을 해치지는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72년9월12일 국민은행 아현지점에서 66만원을 찾아 나온 이정수를 검은색 코티나 차량에 실어 납치했다.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반격을 제압하다가 문도석은 이정수를 쏴죽이고 만다. 사람까지 죽였다. 산에 묻었다. 손에 들어온 것은 고작 66만원. 그들에겐 돈이 더 필요했다. 전과자였기에 안정적인 직업을 못 잡았던 터라 생활고에 시달렸다. 처자를 먹여살려야 했다. 범죄는 습관처럼 몸에 박혀 있었다.
“형님, 내 소원이 뭔 줄 아시오? 이 상자 속에 카빈총을 악기 대신 넣어갖고 전국 팔도 돌아다니며 은행이란 은행은 모조리 털어서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배불리 멋지게 살고 싶소. 형님, 우리 한탕 뜁시다. 멋있게 한번 해치웁시다. 트럼펫은 이제 더이상 못 불겠고. 형님, 아새끼가 내일모레가 백일이오. 먹일 게 없어 분유 대신 쌀뜨물이나 먹이고 있소. 에미년이 젖이 나와야 먹일 게 아니오. 형님, 딸이라면 또 모르오. 시커먼 아들새끼요. 난 내 새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구, 먹고 싶은 대로 먹게 하구, 갖고 싶은 대로 갖게 하고 싶소. 이 지잘 백년 해야 애새끼 날 닮아 도둑질에 날 등쳐먹을 게 분명하오. 난 이짓 더이상 못 하겠소, 형님. 형님과 함께라면 근사하게 한탕 아니라 열 탕이라두 할 수 있소. 형님은 군산교도소에서 탈옥까지 감행했던 날고 기는 깽까도리 아니오? 형님은 워낙 머리가 좋지 않소. 우린 해낼 수 있소. 형님, 근사하게 해치우고 일본으로 밀항이나 떠납시다...형님 내 이야기 듣고 있소?” ( 『지구인3』 , 최인호 지음, 문학동네, 2005년) |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아슬아슬했다. 자주 불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죄책감과 짜증이 섞인 갈등이 불거졌고, 때로는 서로를 죽일 듯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돈이 궁했던 이종대가 혼자 구로공단 총기사건에 나서 탈취한 돈이 3백75만500원. 이 사건을 계기로 이종대와 문도석은 다시 하나가 되어 새로운 범죄를 꿈꾼다. 그들이 차와 운전수까지 빌려 향한 곳은 마산 수출자유지역. 이 여행에 동원되어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내려갔던 크라운 승용차의 차주 겸 운전사인 최덕현은 함께 돌아오지 못한다. 도중에 목졸려 살해당한 뒤 죽미령 고개에 암장된 것이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을 터는 게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이종대는 다시 구로공단을 털자고 제안한다. 이에 대한 문도석의 반론, 둘의 다툼, 경찰의 검문, 예기치 않은 승용차 고장, 사소한 실수와 신원노출, 그리고 경찰의 추적….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결말을 보자.
아니, 잘 보이지 않는다. “난동 끝에 아들 쏴죽이고 비정의 최후” “이종대 잔학한 최후…총탄 10발” “독안에 든 범인...스피디해진 ‘차량범행’”등등의 제목은 1974년7월27일치 <한국일보>다. 그날의 제목과 기사, 사진들을 조합해놓았다. 1면을 포함해 여러 면에 걸친 기사들을 모으다보니 실제 기사의 상당 부분이 잘려나갔다. 완벽한 형태로 기사내용을 읽고 싶었는데 불가능했다. 국회도서관 정기간행물실을 찾아 같은날치 <한국일보> 기사의 마이크로필름을 빌려 A3용지로 프린트를 했다. 1면 머릿기사의 제목과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카빈2인조 인천셋집서 이종대도 |
이종대와 문도석은 모두 자살했다. 문도석은 6살난 장남 상훈이만 쏴죽인 뒤 자살했고, 이종대는 부인과 두 아들을 모두 쏴죽인 뒤 무려 17시간30분을 대치하다 자신의 심장을 마지막으로 쏘았다. 만약 경찰이 이종대와 긴 대치를 하면서 궁금한 점을 캐묻지 않았다면, 사건의 진상 중 많은 부분이 미궁에 막혔을 지도 모른다. 경찰은 국민은행 아현지점에서 납치된 이정수와 크라운 승용차 최덕현이 암장된 장소를 찾지못해 오랜 기간 헤맸을 것이다.
(사진설명 : 이종대의 대치 현장. 군과 경찰이 진을 치고 있다. <주간조선> 1974년8월4일치 특집기사에 실렸다)
검문순경에 만2천원 주고 통과 이종대와 일문일답 대치중 이종대가 경찰과 나눈 일문일답은 다음과 같다. -인천동부서장(김성천총경)이다. 문도석이가 다 뒤집어썼으니 죄될것도 별로 없을것이다. 자수하라. 이=웃기지 마라. 내 죄는 내가 안다. -무슨 죄가 있는가. 이=평택군 팽성면 무기고의 카빈탈취사건, 용산상은지점 김영근 납치사건, 이정수사건, 구로공단 카빈강도사건은 모두 내가 저지른 것이다. 내가 주범이다. (중략) -이씨의 시체는. 이=용인군 안양컨트리클럽쪽 저수지 근처 길옆에 묻었다. 대전으로 도망쳤다가 다음날 서울로 와 봉천동에 차를 버렸다. 검문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돈은 어떻게 썼나. 이=문도석과 나누어 썼는데 나는 술을 못하기 때문에 주로 여자들과의 유흥비로 나갔다. 명승지와 유원지를 돌아다니며 놀다가 재범할 때 서울에 오곤 했다. -구로공단 사건은. 이=나의 단독범행이다. 문과 함께 하려했으나 전날밤 사소한 일로 다퉈 그만두었다. 카빈은 평택 팽성에서 훔친것이다. 이때 카빈3정과 실탄1백20발을 가져왔다. 범행 후 남부순환도로를 통해 달아났다.(중략) 이때 이는 물을 마시고 하자면서 말을 끊었다. -세 차례 범행에 쓴 차는 어디서 구했는가. 이=이정수씨때는 남산에서, 구로동때는 서울 허리우드극장 앞에서 훔쳐 몰딩 선팅을 모두 내가 직접했다. -이번 사건 얘기 좀 하자 이=구로공단사건과 똑같은 방법으로 해치우려했다. 문도석이가 더듬해서 실패했다. -크라운차 운전사 최덕현씨는. 이=구례에서 최씨가 수상히 생각하는 눈치를 보여 차를 세우고 문과 둘이서 목을 졸라 죽였다. 시체는 트렁크에 넣고 호남-남해 고속도로를 거쳐 산청으로 빠졌다. 산청입구 첫 검문소에서 박모순경으로부터 예비군수첩이 없다고 검문을 받았다. 박순경은 내가 좀 봐달라고 말하자 서울에 긴급조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놔 주머니에서 1만원을 줬다. 이때 박순경은 “적다”면서 되돌려줘 2천5백원을 보태 1만2천5백원을 주니 통과시켜줬다. 검문당할 때 뒤 트렁크에는 최씨의 시체가 들어있었는데 박순경이 자동차를 수색하려했으면 죽이려 했다. 그 친구 운이 좋다. 최씨의 시체는 검문소에서 3km떨어진 산기슭에 묻었다. -어제는 어떻게 된건가. 이=구로공단을 다시한번 털려다 미수에 그쳤다. 문의 실수 때문이다. -왜 구로공단을 택했는가. 이=공단털기는 식은죽 먹기나 다름없다. -그 이후 행적은. 이=크라운차도 버린 후 택시를 빌어탔다. 범행 후 탈출코스로 수원과 원주를 택했다가 수원쪽으로 예비답사차 갔다가 실패한 것이다. -이정수씨의 매장장소를 그려줄 수 있나. 이=좋다. 그러나 최의 매장지는 애매하다.(하략) |
그렇다면 이종대와 문도석은 누구인가. 어떻게 만나 범죄 콤비를 이루게 되었을까.
(왼쪽부터 이종대 문도석. <주간조선> 1974년8월4일치에서 실렸다)
이들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분은 앞에서 두 차례 인용했던 최인호의 장편소설 『지구인』1,2,3권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최인호는 1974년7월에 일어난 이 사건 3~4년 뒤에 우연히 이종대의 이복동생 이종세를 만나 친해지면서 소설을 썼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문학사상』에 연재를 했는데 베트남전에 관한 묘사 등이 문제되어 사복경찰의 급습을 받기도 했다. 소설 속엔 정읍에서 계모 슬하의 어린 시절을 보내다 가출하여 나름의 순정으로 세상과 대화하려 했으나 결국 범죄세계로 빠져드는 이종세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그의 동생 이종세도 형 못지않다. 금광과 소매치기단, 미군부대, 교도소, 유랑 서커스단, 베트남의 야전병원 등등 1950~70년대 하류인생들의 무대를 실감나게 만날 수 있다. 일단 맛봬기로 1974년7월27일치 <한국일보> 해설기사를 보도록 하자.
7*29 탈옥사건의 주범 |
위의 기사에서 언급됐지만, 이종대는 1958년 군산교도소에서 7.29탈옥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여기에 비하면 문도석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소설 『지구인』에 따르면, 문도석은 인천이 고향으로 전쟁통에 부모를 잃었으며 원래 성은 문이 아닌 이씨였다. 고아원에 있을 때까지 이씨로만 알려졌는데, 네 살 때 한 집안에 입양되면서 새로운 성과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이는 이종대보다 일곱살 어린 1942년생이었다. 해병대에 근무하다가 탈영해서 불명예 제대한 것을 필두로 폭력, 업무상 과실치상, 횡령죄 등 갖은 죄목의 전과를 골고루 섭렵했다. 그런 이력을 드러내듯 온몸은 문신 투성이였다고 한다.
이색적인 대목은 둘 다 비상하고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이종대는 그림에 천재적인 조예가 있었다. 이로 인해 부대(부산 미군부대)에서도 그림을 그려 상관들의 총애를 받았다. 감옥에서도 교도관들의 초상화를 그려줘 환심을 샀으며, 이는 잠시나마 탈옥 성공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감옥 내 미술작품전에서 동양화로 세 번이나 특상을 차지했으며, 부산의 극장에서 간판그림을 그리며 밥벌이를 하기도 했다.
문도석은 악기 다루는 재능이 뛰어났다. 드럼, 기타, 트럼펫, 피아노, 심지어는 바이올린까지 다룰 줄 알았다. 이종대가 뒤늦게 출감한 뒤 문도석의 행방을 찾아낸 단서도 악사들을 통해서였다. 결국 이종대는 문도석이 밴드의 일원으로 트럼펫을 불던 허름한 술집에서 문도석과 조우한뒤 모종의 범죄기획을 제안한다.
둘은 서로에게 끌렸지만, 성격은 판이했다. 이종대가 키가 작으면서도 다부졌다면, 도석은 키가 크고 체구가 우람했다. 종대가 침착하고 냉정했다면 도석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 불같은 성격에 난폭하고 충동적이었다. 그런 문도석의 핸디캡이, 머리가 좋고 주도면밀했던 이종대로선 늘 골칫거리였다. 결국 성급한 행동으로 수사의 빌미를 준 것은 문도석이었다. 먼저 자살한 것도 문도석이었다.
범인 文 李와 죽기전에 언쟁 |
안양교도소에서 처음 만나 정을 나누고 함께 범죄를 저지른 두 사람이었지만, 죽기 전엔 결국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했다. 문도석이 서울 개봉동에서 아들 상훈이를 죽이고 자살한 지 1시간 만에 인천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도착한 이종대는 경찰이 집을 포위하자 대치 4시간 만에 아내와 아들들을 죽이고 다시 기나긴 대치를 시작했다.
두아들 장난감 안은채 |
주변 사람들에게 이종대 문도석 사건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거의 없었다. 20명 중에 한 두 명이 될까 말까. 여기에 비하면 ‘김대두 연쇄살인사건’은 지나치게 유명한 감이 없지 않다.
죄 없는 은행 고객 2명을 죽이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생명까지 빼앗은 그들을 미화하거나 변호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을 “미친놈” “살인마”라고 비난하거나 저주하고 끝나버리면 우리 사회에 득이 될 것이 없다.
이 사건의 역사성을 말해주듯 이종대와 문도석은 소설 뿐 아니라 영화에도 나왔다. 박일과 이영호가 주연한 이장호 감독의 1982년 개봉작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이다. 이 영화 포스터엔 이런 카피가 써 있었다. “지옥행 티켓을 쥔 비정의 두 사나이.” 1970년대 후반에 방영된 문화방송 <수사반장>의 400회 특집극 소재가 된 적도 있다. 연극판에선 <등신과 머저리>라는 작품으로 여러차례 공연되었고, 가장 최근의 일은 2011년 11월이다. 2004년 영화 <범죄의 재구성>을 세상에 내놓았던 최동훈 감독은 당시 언론인터뷰에서 “이종대 문도석 사건을 다룬 영화를 차기작으로 만들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왜 이러는 것일까.
이 사건 이야기를 꺼내자, 미국 아서 펜 감독의 1967년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보니 & 클라이드’다. 1930년대에 실존했던 남녀 2인조 갱 보니 파커(Bonnie Parker)와 클라이드 배러우(Clyde Barrow)의 일탈적 범죄행각을 통해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그 시대 미국인들의 공감을 샀다는 평가를 받은 영화다. 이 사건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 서해성씨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미국 아메리카 시네마의 기원이자 진보영화의 대표였다며 문도석 이종대의 범죄는 한국판 보니 & 클라이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에 의해 벌어진 최대의 총기사건이었다. 이렇게 역동적인 액션을 구사한 범죄는 당시까지 없었다. 산업사회에 대한 좌절감을 드러나며 중산층이 되고픈 욕망을 드러냈던 그들은 일탈이 없는 유신체제 아래서 체제의 상부를 향해 카빈총을 갈겨댄 셈이다.”
자유는 행동하는 순간에 획득되는 것이다. 자유는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 단지 행동하는 찰나찰나에 자유는 조금씩 조금씩 얻어진다. 행동하라. 행동하는 순간에 너는 자유롭다. 행동하지 않으면 너는 이미 죽어있는 시체에 불과한 것.(군산교도소 탈옥 직전의 이종대 내면을 묘사한 대목) |
이것은 희극이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이것은 장난이며 우스꽝스런 코미디다. 나는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를 속인 것뿐이다. 그리고 그가 가진 것을 나눠 가진 것 뿐이다. |
소설가 최인호는 『지구인』의 2005년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산업사회가 시작되던 1970년대 초, 두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진 연쇄살인은 지끔껏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괴리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인 사회범죄였다. 일찍이 바클은 ‘사회는 범죄를 배양하고 범죄자는 그것을 범한다’라고 말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종대가 저지른 범죄는 산업사회로 접어든 고도의 물질문명이 배양한 소산이며, 이종대는 그 사회악의 하수인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세 가지 사건에 덧붙는 마지막 ‘알파’의 최후를 하나 더 전할 시간이다. ‘박영복’을 아시는가? 그는 앞의 세 경우처럼 사형을 당하지 않았고, 수사망을 피해가지도 못했고, 처참한 자살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감방에서 오래 살다가 죽었다. 이종대 문도석의 최후를 전하는 아버지의 스크랩 바로 직전 페이지엔 ‘박영복에 징역15년 선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붙어있다.1) 1974년7월17일치다.
박영복은 당시 금융가를 발칵 뒤집어놓은 74억원 부정대출사건의 주인공이다.
장영자 이철희보다 앞선 대한민국 금융사기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대검찰찰청은 수사과정에서 중소기업은행장 등 관련 은행간부들이 뇌물을 받은 사실과 중앙정보부 전 수사관 박태룡 등이 배후에서 부당융자를 강요한 사실 등을 밝혀냈다. 이 사건은 바로 위에서 소설가 최인호가 말한 대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괴리현상’을 당시에 가장 떠들썩하게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민심의 바닥에선 상류층을 향한 적개심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버지는 ‘박영복’에 관해 일갈했다.
황금의 벌레 |
아버지는 이종대와 동갑이었다. 1935년생. 1974년에 만 39살. 이종대는 동생뻘인 문도석과 카빈총으로 세상의 금고들을 털고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려 했지만, 사람들만 죽이고 ‘푼돈’만을 얻었다. 아버지는 남도의 한 시골에서 풍족하진 않았지만 근근히 살고 있었다. 일확천금 따위는 꾼 적이 없었다. 나는 소설 『지구인』을 보면서 아버지도 몰랐을 그 시대의 밑바닥 인생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종대를 박영복과 비교하며 생각했다. 대담했지만 어리석었구나. 박영복이란 인간은 사기를 쳐서 무려 74억 원을 갈취해냈는데 이종대 당신은 납치사건 다 합쳐봤자 겨우 5백만 원도 못됐다. 그 박영복 역시 신문에 표기된 나이로 추정컨대 1935년생이다. 동갑인 이종대와 박영복, 그리고 나의 아버지. 극단적인 베팅을 하며 산 두 사람과, 일상에 안주(?)했던 평범한 한 사람을 세워놓고 최선이 무엇일지 골라보기를 시도한다.
모르겠다. 그저 “후하하 죽었다”의 주인공인 그놈, 그놈이 궁금하다. 이종대, 문도석, 김대두, 박영복, 나의 아버지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놈’만은 웬지 아직도 백발의 구부정한 노인이 되어 살아있을 것만 같다. 대답해다오. 어디선가 “후하하 살았다”라고 할 것만 같아 오싹하구나.
1973년부터 1976년12월까지 신문기사들이 수록된 아버지의 스크랩 9, 10권. 10권은 앞뒤쪽 표지가 다 떨어져나가버렸다.
◆ 참고한 책
『광주일보』기획연재 ‘광주*전남 사건과 사람들-9. 75년 연쇄살인범 김대두’, 2004. 3. 10
『지구인 1, 2, 3』 (최인호 지음, 문학동네, 2005) *** 글 중에 인용한 이종대와 문도석에 관한 사실은 소설 속의 내용으로 실제와는 다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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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영복은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공방 끝에 사기 및 사문서위조 등이 모두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78년 1월 간염과 당뇨병 등으로 인하여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에 또 다시 유령회사를 설립하고 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신용보증서를 발급받아 대구투자금융 등 8개 금융기관에서 2억 1천만 원을 부정대출받고, 1981년 10월 타인의 대출금 중 1억 원을 편취한 것이 밝혀져 1982년 2월 11일 재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징역 19년이 선고되었다.
박영복은 2001년 9월 29일 만기출소하였으나, 2005년 9월 29일 특정 버섯분말의 위탁가공무역독점권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다가 유령 무역다단계회사설립과 관련한「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혐의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다시 법원으로부터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2007년7월 폐암으로 사망했다.(네이버 지식in 등 참고)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또니우스
2012.03.16
오늘날과 많이 다른 부분도 있으나 인간 세상의 모순적 구조는 여전한 듯.
zzx8
2012.03.12
------------ bg37.go.hn --------------
대박한번 터지고 ..눈욕이를확실이할분… 함들려보세요~
tomy
201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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