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특별한 궁녀들, 은밀한 임무 맡기기도…
본방 나인이 다른 궁녀들보다도 더 강렬하게 왕비, 세자빈과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본방 나인의 운명은 왕비, 세자빈의 운명에 더 깊이 연결되었다. 왕비와 세자빈의 즐거움은 본방 나인의 즐거움이 되었고 슬픔은 그대로 본방 나인의 슬픔이 되었다. 왕비, 세자빈의 인생에 굴곡이 닥치면 그 굴곡은 그대로 본방 나인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201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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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세자빈 등이 궁궐로 들어올 때 데리고 들어오는 유모나 몸종을 본방 나인이라고 했다. 본방이란 원래 조선 시대 왕비의 친정을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본방 나인이란 왕비의 친정에서 데리고 온 나인이란 의미다.
본방 나인은 다른 궁녀들하고 성격이 달랐다. 궁녀는 기본적으로 내수사나 각사 소속의 공노비를 선발하여 궁중에 들인 여자 종들이었는데, 본방 나인은 공노비가 아니라 사노비였다. 즉 본방 나인은 왕비, 세자빈 등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궁녀였다.
당연히 궁중 안의 왕비, 세자빈 등은 자신이 친정에서 데려고 들어온 본방 나인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왕비, 세자빈 등이 내밀한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어려운 부탁을 하는 상대는 누구보다도 본방 나인이었다. 예컨대 어린 처녀로 궁중에 들어가는 왕비, 세자빈의 속옷을 빨아 주는 사람도 본방 나인이며,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도 본방 나인이었다.
왕비, 세자빈과 본방 나인의 관계가 이처럼 친밀하다 보니 서로 흉허물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강렬한 정서적 유대 관계가 있으므로 주인과 시종의 관계뿐만 아니라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이 지냈다.
본방 나인이 다른 궁녀들보다도 더 강렬하게 왕비, 세자빈과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본방 나인의 운명은 왕비, 세자빈의 운명에 더 깊이 연결되었다. 왕비와 세자빈의 즐거움은 본방 나인의 즐거움이 되었고 슬픔은 그대로 본방 나인의 슬픔이 되었다. 왕비, 세자빈의 인생에 굴곡이 닥치면 그 굴곡은 그대로 본방 나인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드라마 <장희빈> 中 인현왕후 민씨 (2002 作)
조선 시대 왕비 중에서 가장 극적인 인생의 굴곡을 겪은 경우는 아마도 인현왕후 민씨일 것이다. 숙종의 두 번째 왕비로 들어갔다가 장희빈에게 밀려 친정으로 쫓겨 나오고, 또다시 왕비로 들어간 그 파란만장한 인생의 굴곡은 조선 시대 어느 왕비보다도 더 극적이라고 할 만하다. 인현왕후가 이렇게 극적인 인생의 굴곡을 겪을 때, 이름도 없이 소리도 없이 그 굴곡을 함께 겪어야 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왕후의 본방 나인이었다.
위에서 보듯이 인현왕후가 친정으로 쫓겨 나왔을 때 왕후를 따라 나온 궁녀 중에는 본방 나인과 궐내의 궁녀가 있었다. 인현왕후는 본방 나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서 궐내의 궁녀들에게는 얼른 대궐로 돌아가라고 했다. 물론 자신은 더 이상 왕비가 아니므로 궁녀들을 거느릴 수 없다는 의미였다. 엄밀히 따진다면 인현왕후가 왕비에서 쫓겨난 이상 개인 신분이므로 궐내의 궁녀들이 모실 수 없었다. 궐내의 궁녀들은 왕후의 개인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본방 나인은 비록 인현왕후가 쫓겨났을지라도 옆에서 모시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본방 나인은 궁녀이면서 동시에 왕후의 개인 종이었기에 그랬다. 조선 시대 왕비, 세자빈, 후궁 등이 관련된 역사적 대사건의 배후에는 언제나 본방 나인이 있었다. 왕비, 세자빈, 후궁 등이 은밀한 일들을 대부분 본방 나인에게 맡겼기 때문이며, 그것은 둘 사이의 관계가 정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운명 공동체로서도 단단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왕의 봉보 부인이나 보모 상궁 못지않게 왕비, 세자빈, 후궁의 본방 나인은 특별한 궁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방 나인은 다른 궁녀들하고 성격이 달랐다. 궁녀는 기본적으로 내수사나 각사 소속의 공노비를 선발하여 궁중에 들인 여자 종들이었는데, 본방 나인은 공노비가 아니라 사노비였다. 즉 본방 나인은 왕비, 세자빈 등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궁녀였다.
당연히 궁중 안의 왕비, 세자빈 등은 자신이 친정에서 데려고 들어온 본방 나인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왕비, 세자빈 등이 내밀한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어려운 부탁을 하는 상대는 누구보다도 본방 나인이었다. 예컨대 어린 처녀로 궁중에 들어가는 왕비, 세자빈의 속옷을 빨아 주는 사람도 본방 나인이며,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도 본방 나인이었다.
왕비, 세자빈과 본방 나인의 관계가 이처럼 친밀하다 보니 서로 흉허물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강렬한 정서적 유대 관계가 있으므로 주인과 시종의 관계뿐만 아니라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이 지냈다.
본방 나인이 다른 궁녀들보다도 더 강렬하게 왕비, 세자빈과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본방 나인의 운명은 왕비, 세자빈의 운명에 더 깊이 연결되었다. 왕비와 세자빈의 즐거움은 본방 나인의 즐거움이 되었고 슬픔은 그대로 본방 나인의 슬픔이 되었다. 왕비, 세자빈의 인생에 굴곡이 닥치면 그 굴곡은 그대로 본방 나인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드라마 <장희빈> 中 인현왕후 민씨 (2002 作)
조선 시대 왕비 중에서 가장 극적인 인생의 굴곡을 겪은 경우는 아마도 인현왕후 민씨일 것이다. 숙종의 두 번째 왕비로 들어갔다가 장희빈에게 밀려 친정으로 쫓겨 나오고, 또다시 왕비로 들어간 그 파란만장한 인생의 굴곡은 조선 시대 어느 왕비보다도 더 극적이라고 할 만하다. 인현왕후가 이렇게 극적인 인생의 굴곡을 겪을 때, 이름도 없이 소리도 없이 그 굴곡을 함께 겪어야 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왕후의 본방 나인이었다.
왕후, 친정으로 나오시니 부부인(府夫人:인현왕후의 친정 어머니) 마주 나오시어 붙들고 통곡하시니, 왕후도 부원군(府院君:인현왕후의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의 옛 자취를 느끼사 애원 통곡하시고 이윽고 부부인께 고하여 이르시되 “죄인의 몸으로 친족을 보니 편안치 못할 것이니 나가소서”하시니 부인과 다른 부인네들도 통곡하여 마지못해 애오개로 나가신 후 당일 명하사 안팎 문들은 모두 봉쇄하고 친정 비복(婢僕:남녀 하인)들은 한 사람도 두지 않으시고 다만 궁녀만 두시고, 정당正堂을 폐하시고 하당下堂에 거처하시니, 궁녀들은 친정에서 들어간 궁인과 3인은 궐내의 궁인으로서 죽기를 무릅쓰고 나온지라, 왕후 가로되 “네 본디 궁중 시녀라, 어찌 외람되이 거느리리오. 들어가라” 하시나, 3인이 머리를 두드려 울면서 대답하여 아뢰기를 “천첩 등이 낭랑娘娘의 성은을 갚지 못하리니 어찌 일시인들 슬하를 떠날 리 있겠사오리까? 낭랑을 따라 죽으리로다”하니 왕후, 그 정성에 감동하시어 그냥 내버려 두시니. ─ 『인현왕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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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이 인현왕후가 친정으로 쫓겨 나왔을 때 왕후를 따라 나온 궁녀 중에는 본방 나인과 궐내의 궁녀가 있었다. 인현왕후는 본방 나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서 궐내의 궁녀들에게는 얼른 대궐로 돌아가라고 했다. 물론 자신은 더 이상 왕비가 아니므로 궁녀들을 거느릴 수 없다는 의미였다. 엄밀히 따진다면 인현왕후가 왕비에서 쫓겨난 이상 개인 신분이므로 궐내의 궁녀들이 모실 수 없었다. 궐내의 궁녀들은 왕후의 개인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본방 나인은 비록 인현왕후가 쫓겨났을지라도 옆에서 모시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본방 나인은 궁녀이면서 동시에 왕후의 개인 종이었기에 그랬다. 조선 시대 왕비, 세자빈, 후궁 등이 관련된 역사적 대사건의 배후에는 언제나 본방 나인이 있었다. 왕비, 세자빈, 후궁 등이 은밀한 일들을 대부분 본방 나인에게 맡겼기 때문이며, 그것은 둘 사이의 관계가 정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운명 공동체로서도 단단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왕의 봉보 부인이나 보모 상궁 못지않게 왕비, 세자빈, 후궁의 본방 나인은 특별한 궁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궁녀 신명호 저 | 시공사
드라마 「여인천하」 「다모」에서 「대장금」 「동이」, 최근에는 영화 「후궁, 제왕의 첩」까지.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 다양한 작품에서 무수한 궁중 여인들을 만나왔다.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만나볼 수 없었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많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열광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궁녀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7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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