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천만 영화’ <광해>는 설레고, 슬프고, 아픈 영화
맹자에게 정치의 시작과 끝은 공감, 즉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느낌이다. 함께 느낀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너에게로, 너의 마음이 나에게로 경계 없이 다가서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정치를 맹자는 차마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라고 한다.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에 토대한 정치이며,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이 확충되어 실천된 정치인 인정(仁政)이다. 영화에서 내 마음을 이끈 것은 가짜 왕의 진짜 마음, 측은지심이었다.
20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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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를 영화가 대신하다
대통령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쯤 되면 각 후보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해야 하고, 그것은 서로 비교되어야 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그 정책들이 적어도 앞으로 5년간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지금쯤 우리는 각 후보자들, 아니면 캠프들의 치열한 정책 공방을 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지금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둘 곳 없는 정치적 욕망을 한 편의 영화에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 <광해>가 개봉한다고 할 때도, 관객 수가 500만 1000만을 넘는다고 할 때도 나는 이 영화를 봐야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다. 일단 이 영화의 제작사와 배급사가 평소에 마땅치 않았고, 주연 배우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스크린을 독점한 대기업이 이때쯤은 이런 것이 잘 먹힐 거라며 쳐놓은 그물 같아서 그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기 싫었다는 것이 가장 컸다. 그런데 어느 평론가가 ‘<광해> 강제 천만 사태’라고 명명하듯이 영화의 무엇이 사람들을 이끄는지는 궁금했다.
진짜 왕 노릇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진짜 왕은 정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웠고 그에게 정치는 하나를 내어주고 하나를 얻는 파워 게임이었다. 그러나 광대 출신 가짜 왕은 대역 왕 노릇을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가고 함께 아파한다. 일일 드라마처럼 누가 봐도 빤한 대립 구도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사월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자신의 먹성 때문에 끼니를 거를지 모를 나인들을 걱정하며, 중전의 웃음기 없는 얼굴을 염려하는 그에게 점점 마음이 끌려간다.
제 선왕이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을지를 묻자, 맹자는 백성들을 잘 보호해 주면 가능하며 제 선왕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제사에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양으로 바꾼 사례를 들면서 “왕의 은혜가 동물에게 미칠 정도로 충분하면서도 그 공적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 백성들이 편안하지 않은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은 실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 못 해서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44~48쪽)
맹자는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는 시작이 제사에 끌려가는 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라고 말한다. 소에 대한 연민은 비록 그 대상을 양과 바꾸는 것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펼쳐진 곤경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느끼게 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바로 공감의 마음이다. 그리고 소에게도 미친 왕의 공감의 마음과 그 실천(양으로 대체함)이 백성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은 왕이 ‘못하는 것이 아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백성의 곤궁에 공감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치를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책이지만 그래도 소의 곤경에 공감하는 마음을 가진 당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격려이기도 하다.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내 집안의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어른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아이에게까지 이르게 한다.”(상동) 그리고 이렇게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목표로 한다. 맹자에게 정치의 시작과 끝은 공감, 즉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느낌이다. 함께 느낀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너에게로, 너의 마음이 나에게로 경계 없이 다가서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정치를 맹자는 차마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라고 한다.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에 토대한 정치이며,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이 확충되어 실천된 정치인 인정(仁政)이다. 영화에서 내 마음을 이끈 것은 가짜 왕의 진짜 마음, 측은지심이었다.
선한 마음만으로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
가짜 광해는 진짜 광해가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땅과 세금 문제인 대동법과 대외 관계 문제인 등거리 외교를 실행한다. 공감이 정치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여긴 맹자이지만 그 마음만으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선한 마음만으로 정치를 행하기는 부족하다고, 제도도 스스로 실행될 수는 없다.”(187~190쪽) 정치가의 선한 마음은 제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백성을 위한 제도 역시 정치가의 선한 마음이 없이 실행되기 어렵다.
“인(仁)한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확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경계의 확정이 바르지 않으면 정전의 토지가 균등하지 못하고, 토지의 수확에서 얻는 봉록 역시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144~149쪽)
정전(井田)은 국가에서 백성에게 토지를 나눠줄 때 우물 정(井)으로 구획하는 것으로, 아홉 조각 중 여덟 조각은 사전(私田)으로 1가구당 한 조각씩 분배하고 남은 한 조각은 공전(公田)으로 함께 경작하여 그 소출을 세금으로 낸다. 맹자는 토지 분배방식으로 정전제를 주장하는데, 정전제는 경제생활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근간이 된다. 조세는 정전제에서 공전을 공동 경작하여 내는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조법을 적용하고 따로 세금을 거두지 않으면 천하의 농부들이 모두 기뻐하며 그 나라의 땅에서 농사 짓기를 원할 것이다.”(104~105쪽) 정전제와 9분의 1 조세 제도를 통해 맹자는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조법은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액이 달라지므로 국가에게는 재정의 항상성이 문제가 되지만, 국가가 풍년과 흉년에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국가는 토지와 세금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를 보살펴야 한다. “늙어서 아내가 없는 이를 홀아비라고 하고, 늙어서 남편이 없는 이를 과부라고 하며, 늙고 자식이 없는 이를 독거노인이라 하고, 어린데 부모가 없는 이를 고아라고 한다. 이들은 천하에 곤궁한 백성으로 그 처지를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이들이다. 문왕은 인한 정치를 펼 때 이 네 사람들을 가장 먼저 보살폈다.”(67~69쪽)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의 확충은 정치가 최우선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토지, 세금, 복지 제도를 갖춘 후에 교육이 필요하다. “상(庠과) 서(序)에서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행해 효도와 공경의 의미를 거듭해서 가르치면 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될 것이다.”(51~55쪽) 맹자는 인간다움의 확충이 백성에게는 안정된 생업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또는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의 계급적 인식의 한계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정치는 제도를 통한 안정된 생활이 우선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성이 공감의 주체다
가짜 광해는 명에 파병하고 사대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신하들에게 “적당히들 하시오. 대체 이 나라가 누구 나라요?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 곱절 천 곱절 더 중요하오”고 일갈한다. 이쯤 되면 진짜 왕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진짜 왕은 이미 세습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백성과 공감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자이다. 진짜가 사실은 가짜였고 가짜가 진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판단해 정치권력을 맡기는 것은 누구일까? 맹자에게 그것은 백성의 선택이다.
맹자, [출처: 위키피디아]
양 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하내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곳의 백성들을 하동으로 이주시키고 노약자들에게 식량을 풀어 구제해줍니다. 하동 지방에 흉년이 든 경우에도 그렇게 합니다. 다른 나라를 보면 저처럼 마음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줄어들거나 내 나라의 백성들이 늘어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요?”(36~39쪽)
양 혜왕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했던 것을 내세우며 자신이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다고 자부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자신보다 잘 통치하는 것 같지 않은 이웃 나라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로 옮겨 오지 않는 것을 의아해 한다. 그에게 통치는 백성에 대한 시혜이고, 백성은 자신의 소유물로 더 많은 수가 확보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양 혜왕에게 맹자는 그의 태도가 전쟁에서 “오십 보를 도망간 사람이 백 보를 도망간 사람을 보고서 비겁하다고 비웃는 것”과 같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시혜를 좋은 통치 행위라고 생각하는 왕이 나쁘지는 않더라도 나라를 옮겨 가면서까지 함께 해야 할 왕은 아니라는 백성들의 정확한 판단과 선택이다.
왕의 진짜/가짜 마음과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백성은 공감에 반응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공감을 이끌어내는 주체다. 바로 정치의 주체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하찮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된다.”(209쪽)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위임한 정치권력의 회수를 선택할 수 있다. “인을 해치는 자는 남을 해치는 사람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는 잔인하게 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남을 해치고 잔인하게 구는 사람은 인심을 잃어 고립된 사람일 뿐이다. 인심을 잃어 고립된 사람인 걸과 주를 처형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73~74쪽)
영화 <광해>의 ‘강제 천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요일 저녁 TV를 틀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리더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역시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누군가 이번 정권을 지나면서 대통령에게 ‘감성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으며, ‘감성적 능력’은 아픔을 가진 사람의 그 아픔에 가 닿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의 지적처럼 영화 <광해>의 천만 관객 돌파는 가짜 ‘광해’의 진짜 마음에 대한 공감과 환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정치 현실과 정치인들의 모습에 대한 질책을 의미할 것이다.
의도한 것이었는지 프로그램의 시작은 ‘나는 비정규직이다’였다. 임금 노동자의 50퍼센트가 비정규직인 대한민국, 그들의 아픔은 수많은 또 다른 아픔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아픔을 함께 나눌 정치와 정치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그런 정치와 정치인을 요구하고 가질 자격이 있는가? 정작 나는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고 함께 나누지 않으면서 영화처럼 진짜 마음을 가진 왕이 나타나 좋은 정치를 해준다면 그것을 누리고만 싶은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신이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임을,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한 영화 <광해>는 설레고, 슬프고, 아픈 영화였다.
대통령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쯤 되면 각 후보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해야 하고, 그것은 서로 비교되어야 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그 정책들이 적어도 앞으로 5년간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지금쯤 우리는 각 후보자들, 아니면 캠프들의 치열한 정책 공방을 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지금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둘 곳 없는 정치적 욕망을 한 편의 영화에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 <광해>가 개봉한다고 할 때도, 관객 수가 500만 1000만을 넘는다고 할 때도 나는 이 영화를 봐야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다. 일단 이 영화의 제작사와 배급사가 평소에 마땅치 않았고, 주연 배우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스크린을 독점한 대기업이 이때쯤은 이런 것이 잘 먹힐 거라며 쳐놓은 그물 같아서 그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기 싫었다는 것이 가장 컸다. 그런데 어느 평론가가 ‘<광해> 강제 천만 사태’라고 명명하듯이 영화의 무엇이 사람들을 이끄는지는 궁금했다.
진짜 왕 노릇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진짜 왕은 정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웠고 그에게 정치는 하나를 내어주고 하나를 얻는 파워 게임이었다. 그러나 광대 출신 가짜 왕은 대역 왕 노릇을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가고 함께 아파한다. 일일 드라마처럼 누가 봐도 빤한 대립 구도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사월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자신의 먹성 때문에 끼니를 거를지 모를 나인들을 걱정하며, 중전의 웃음기 없는 얼굴을 염려하는 그에게 점점 마음이 끌려간다.
맹자는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는 시작이 제사에 끌려가는 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라고 말한다. 소에 대한 연민은 비록 그 대상을 양과 바꾸는 것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펼쳐진 곤경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느끼게 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바로 공감의 마음이다. 그리고 소에게도 미친 왕의 공감의 마음과 그 실천(양으로 대체함)이 백성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은 왕이 ‘못하는 것이 아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백성의 곤궁에 공감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치를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책이지만 그래도 소의 곤경에 공감하는 마음을 가진 당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격려이기도 하다.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내 집안의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어른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아이에게까지 이르게 한다.”(상동) 그리고 이렇게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목표로 한다. 맹자에게 정치의 시작과 끝은 공감, 즉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느낌이다. 함께 느낀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너에게로, 너의 마음이 나에게로 경계 없이 다가서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정치를 맹자는 차마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라고 한다.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에 토대한 정치이며,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이 확충되어 실천된 정치인 인정(仁政)이다. 영화에서 내 마음을 이끈 것은 가짜 왕의 진짜 마음, 측은지심이었다.
선한 마음만으로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
가짜 광해는 진짜 광해가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땅과 세금 문제인 대동법과 대외 관계 문제인 등거리 외교를 실행한다. 공감이 정치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여긴 맹자이지만 그 마음만으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선한 마음만으로 정치를 행하기는 부족하다고, 제도도 스스로 실행될 수는 없다.”(187~190쪽) 정치가의 선한 마음은 제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백성을 위한 제도 역시 정치가의 선한 마음이 없이 실행되기 어렵다.
“인(仁)한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확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경계의 확정이 바르지 않으면 정전의 토지가 균등하지 못하고, 토지의 수확에서 얻는 봉록 역시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144~149쪽)
정전(井田)은 국가에서 백성에게 토지를 나눠줄 때 우물 정(井)으로 구획하는 것으로, 아홉 조각 중 여덟 조각은 사전(私田)으로 1가구당 한 조각씩 분배하고 남은 한 조각은 공전(公田)으로 함께 경작하여 그 소출을 세금으로 낸다. 맹자는 토지 분배방식으로 정전제를 주장하는데, 정전제는 경제생활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근간이 된다. 조세는 정전제에서 공전을 공동 경작하여 내는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조법을 적용하고 따로 세금을 거두지 않으면 천하의 농부들이 모두 기뻐하며 그 나라의 땅에서 농사 짓기를 원할 것이다.”(104~105쪽) 정전제와 9분의 1 조세 제도를 통해 맹자는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조법은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액이 달라지므로 국가에게는 재정의 항상성이 문제가 되지만, 국가가 풍년과 흉년에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국가는 토지와 세금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를 보살펴야 한다. “늙어서 아내가 없는 이를 홀아비라고 하고, 늙어서 남편이 없는 이를 과부라고 하며, 늙고 자식이 없는 이를 독거노인이라 하고, 어린데 부모가 없는 이를 고아라고 한다. 이들은 천하에 곤궁한 백성으로 그 처지를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이들이다. 문왕은 인한 정치를 펼 때 이 네 사람들을 가장 먼저 보살폈다.”(67~69쪽)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의 확충은 정치가 최우선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토지, 세금, 복지 제도를 갖춘 후에 교육이 필요하다. “상(庠과) 서(序)에서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행해 효도와 공경의 의미를 거듭해서 가르치면 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될 것이다.”(51~55쪽) 맹자는 인간다움의 확충이 백성에게는 안정된 생업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또는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의 계급적 인식의 한계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정치는 제도를 통한 안정된 생활이 우선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성이 공감의 주체다
가짜 광해는 명에 파병하고 사대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신하들에게 “적당히들 하시오. 대체 이 나라가 누구 나라요?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 곱절 천 곱절 더 중요하오”고 일갈한다. 이쯤 되면 진짜 왕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진짜 왕은 이미 세습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백성과 공감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자이다. 진짜가 사실은 가짜였고 가짜가 진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판단해 정치권력을 맡기는 것은 누구일까? 맹자에게 그것은 백성의 선택이다.
맹자, [출처: 위키피디아]
양 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하내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곳의 백성들을 하동으로 이주시키고 노약자들에게 식량을 풀어 구제해줍니다. 하동 지방에 흉년이 든 경우에도 그렇게 합니다. 다른 나라를 보면 저처럼 마음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줄어들거나 내 나라의 백성들이 늘어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요?”(36~39쪽)
양 혜왕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했던 것을 내세우며 자신이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다고 자부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자신보다 잘 통치하는 것 같지 않은 이웃 나라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로 옮겨 오지 않는 것을 의아해 한다. 그에게 통치는 백성에 대한 시혜이고, 백성은 자신의 소유물로 더 많은 수가 확보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양 혜왕에게 맹자는 그의 태도가 전쟁에서 “오십 보를 도망간 사람이 백 보를 도망간 사람을 보고서 비겁하다고 비웃는 것”과 같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시혜를 좋은 통치 행위라고 생각하는 왕이 나쁘지는 않더라도 나라를 옮겨 가면서까지 함께 해야 할 왕은 아니라는 백성들의 정확한 판단과 선택이다.
왕의 진짜/가짜 마음과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백성은 공감에 반응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공감을 이끌어내는 주체다. 바로 정치의 주체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하찮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된다.”(209쪽)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위임한 정치권력의 회수를 선택할 수 있다. “인을 해치는 자는 남을 해치는 사람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는 잔인하게 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남을 해치고 잔인하게 구는 사람은 인심을 잃어 고립된 사람일 뿐이다. 인심을 잃어 고립된 사람인 걸과 주를 처형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73~74쪽)
영화 <광해>의 ‘강제 천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요일 저녁 TV를 틀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리더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역시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누군가 이번 정권을 지나면서 대통령에게 ‘감성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으며, ‘감성적 능력’은 아픔을 가진 사람의 그 아픔에 가 닿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의 지적처럼 영화 <광해>의 천만 관객 돌파는 가짜 ‘광해’의 진짜 마음에 대한 공감과 환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정치 현실과 정치인들의 모습에 대한 질책을 의미할 것이다.
의도한 것이었는지 프로그램의 시작은 ‘나는 비정규직이다’였다. 임금 노동자의 50퍼센트가 비정규직인 대한민국, 그들의 아픔은 수많은 또 다른 아픔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아픔을 함께 나눌 정치와 정치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그런 정치와 정치인을 요구하고 가질 자격이 있는가? 정작 나는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고 함께 나누지 않으면서 영화처럼 진짜 마음을 가진 왕이 나타나 좋은 정치를 해준다면 그것을 누리고만 싶은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신이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임을,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한 영화 <광해>는 설레고, 슬프고, 아픈 영화였다.
- 맹자 맹자 저/박경환 역 | 홍익출판사
『맹자』라는 책은 유가 철학의 추상적인 이론서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맹자』를 유학의 근엄한 경전이 아니라 실용적인 정치사상서로 생각하고 전국시대의 구체적인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고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 등을 대상으로 하는 맹자의 다양한 언급들이 구체적인 맥락 위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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