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왜 친일파를 껴안았을까? - 한홍구 한국현대사 특강
지난해 대통령 선거 직후, 많은 사람들이 ‘멘붕(멘탈 붕괴)’을 호소했다. 덧붙여 멘붕(men-boong), 국제적인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뉴욕타임즈는 대선 결과 한국의 젊은 세대가 ‘정신적 공황상태(mental collapse)’에 빠졌고, 이를 ‘멘붕’이라고 부른다고 기사화했다.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펼쳐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한국 현대사 특강 ‘지금은 대한민국을 되돌아볼 시간!’에서 멘붕 이야기가 언급됐다.
201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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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멘붕까진 안 갔다. 왜냐면 질 거라는 생각을 더 했다. 물론 선거당일 투표율이 높아서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 질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4.11 총선 이후 반전의 계기를 못 찾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총선 때 지는 걸 뒤집을 수 있는 뭔가를 꺼내야하는데, 대선까지 그것을 못했다. 많은 분들이 대선 후 자신의 가치관이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심한 충격을 느꼈던 것 같다.”
식민통치의 아픈 기억
한 교수, 역사의 기억을 꺼낸다. 대한민국 史. “역사에서 보면 우리의 힘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해방, 미군점령, 전쟁, 이승만 군사독재, 4.19 이후 1년쯤 좋은 세상을 기대했지만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97년 말 국가 부도가 났다. 그제서야 정권이 바뀌었다. 국가부도 안 났으면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의 탄생을 기적이라고 해야 한다. 다른 요인들도 돕지 않았으면 정권교체가 안 됐다. 이인제가 500만 표를 갖고 가면서 민주정권의 수립의 1등 공신이 됐다. (웃음) 거기에 DJP연합도 있었다. 김대중을 대통령 병 환자라고 비판했다. JP와 붙었다고. 나도 비판했다. 그런데 이게 없었어도 정권은 바뀌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김현철 게이트도 있었다. 이런 모든 요인에도 김대중은 겨우 37만 표 차이로 이겼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왜 민주세력은 이다지도 힘이 약한 것인가? 한 교수, 한국전쟁 때 모두 죽었다고 설명한다. 전멸. 일본의 식민지 지배도 독하게 겪었다. 이웃나라에 식민지 지배당한 국가는 한국과 아일랜드 밖에 없단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하면서, 그 넓은 인도 땅에 영국인 2천명이 주둔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한국 땅에 60만, 많을 때는 100만이 주둔했을 정도였다.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우리나라를 강하게 압박한 것이다. 더불어 일본은 강력한 동화정책을 폈다.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금지 등이었다.
“일본인은 성(姓)이 없었다. ‘다나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친척이 아니다. ‘집이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나카였다. 집이 우물 주위에 있으면 ‘이노우에’였다. 일본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성을 만들었다. 우리는 어땠나. 내 말이 거짓이면 성을 간다. 이런 말이 있을 만큼 우리는 성이 중요했다. 조선이 일본에게 식민지 당할 만한 나라가 아닌데, 운 없게 식민지가 됐다. 일본은 역량이 안 됐는데, 운 좋게 조선을 집어삼켰다. 그러니 일본은 폭압적이었다. 그것을 해방이후 그대로 우리가 물려받아 지금까지 왔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는 물론, 궁성요배라고 천황에 대한 절을 강요당했다. 세상이 바뀌어 해방이 됐지만, 비슷한 것이 이어졌다.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강요했다. 중요한 것은 반성이 없었다. 신사참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반성했다는 얘기, 한 교수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편에선 의병이 싸웠다. 한 교수, 묻는다. 의병이 싸움을 잘했을까? 일본군을 이길 거라고 생각해서 싸웠을까? 그는 답한다. 이긴다는 망상(!)을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질 것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런데 싸웠다! 그들, 처절하게 죽었다. 교수형 당하고 총살당하고.
“나라가 망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거룩하게, 또 하나는 드럽게. 우리가 망할 때 고종이 책임졌나? 고종 개인에겐 가혹한 얘기겠지만, 고종이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거나 목을 매서 죽었다면 어쨌을까. 1945년 해방됐을 때, 대한제국을 다시 세우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입헌군주제 하자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나라가 드럽게 망해서! 대궐에서 망한 것도 아니고, 통감부 사무실도 아니요, 통관관저의 침실의 부속응접실에서 도장을 찍었다. 회사가 합병하듯, 물건 팔듯이, 그렇게 드럽게 망했다.”
한 교수, 백범일지를 보니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슬펐다고 말을 이었다. 나라를 망하게 한 도장을 챙겨온 이가 있었다. 조선이 망한 테이블에 이완용 외에 한 명이 더 있었다. 말하자면, 울트라 친일파. 그러나 역사책은 이것을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았다. 치욕의 장면이자 역사라도 제대로 기록해야 하는 것이 역사책의 임무임에도, 역사는 그를 다른 일로 기억한다.
“친일파 문제를 다루다보면 뉴라이트와 시비가 붙는다. 뉴라이트는 우릴 ‘패륜아’라고 부른다. 뉴라이트는 그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다. ‘신문화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고. 그들은 아버지가 많아서 좋겠다(웃음) 아버지가 살해당한 사람들이 아버지를 복원시킨다. 우리 사회는 친일파를 친일파라 부르지 못한다. 다카키 마사오를 다카키 마사오라고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이)정희가 불렀다. 정희가 정희 딸을 구박했다. 그리 부르다가 독한 년이라고 불렸지. 아무도 안 부르고 이정희 혼자 그렇게 부른 게 죄지. 박근혜 검증, 그런 게 있었나? 2007년, 이명박과 경선할 때는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언론도 안 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자료에 나온 것만 봐도 수두룩하게 많았는데, 아무도 안 했다.”
다시 조선이 망할 때로 돌아간다. 한 교수, 이완용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흉악한 놈이 아니었단다. 학식과 인품이 출중했으며, 온화ㆍ겸손하고 세상 이치에 밝은 명필이었다. 좋은 세상이었다면 보통교육을 도입시킨 학부대신으로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이완용은 세상의 추이를 따라갔다. 어차피 망한 나라, 연착륙 시키면서 자신도 이익을 보자고 한 것이다. 한 교수, 묻는다. 우리는 이완용‘만’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 또 한명의 친일파를 언급한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 종이와 인주, 도장을 들고 간 이, 이인직이었다. 신소설의 아버지. 『혈의 누』. 우리말로 ‘피눈물’ 혹은 ‘혈루’하면 될 것을, ‘혈의 누’라고 굳이 쓴 신소설. 이인직,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이는 얼마나 될까. 우리의 역사교과서는 그것을 제대로 말해줬던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죄!
일제의 잔재를 청산 못해 군사독재가 왔다. 긴가민가 싶겠지만, 한 교수의 설명이 잇는다. 한국 역사에서 중요하고 꼭 알아야 할 것으로 이것을 든다.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로 이어진단다. 즉, 친일파와 군사독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그놈이 그놈이라고 덧붙인다. 한 교수, 해방 직후의 독립 사진을 외치고 있는 한 사진을 보여준다.
“머리가 짧지? 서대문형무소 독립투사들이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다. 한참 들여다보면, 사진사가 늦게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사가 제 시간에 갔으면 정말 생생한 사진이 나왔을 텐데, 늦게 와서 사람들을 다시 잡아 연출해서 찍었을 것이다. 그러니 포토라인이 형성됐던 거지. 연출된 사진이라도 무척 좋다. 1945년 8월 15일이니까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다.”
헌데, 이 사진을 보다가 의문이 생겼다. 사진 속 인물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 한 교수에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된 독립투사의 이름을 모른다니. 이름이 더러 있어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이것이 이 땅의 해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로부터 7~8년 후 남한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이 땅의 해방이었다.
해방 직후 가장 가슴 아픈 것.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무산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반민특위였다. 그러나 나라를 팔아먹고서도 반성문을 쓴 친일파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회개한 사람도 없었다. 한 교수가 알기로는 참회록, 반성문, 회개 거의 없었다. 일본의 압제 하에 있다가 36년 만에 해방이 됐다. 그 징한 일본 밑에서 주구노릇을 한 사람들, 어떻게 처리해야 옳았을까.
“역사에서 보면 더한 멘붕이 많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아니고 친일파에게 역으로 청산을 당했다. 진짜 멘붕이지. 친일청산 옳은 일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시민들은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못했을 거다. 친일파는 어땠을까.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 상황을 돌파했다. 물론 분단이라는 상황 덕을 봤다. 2차 대전 뒤 150여 개의 독립국이 생겼다. 그 새나라의 핵심권력을 누가 장악했겠나.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는데, 딱 두 나라에서 제국주의에 빌붙었던 놈들이 핵심권력을 잡았다. 대한민국과 남베트남. 남베트남은 그나마 없어졌다. 한국만 유일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됐는데, 식민국에 빌붙은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면, 정의, 상식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일들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사람들, 해방 직후 처음엔 도망갔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돌아와 마구 짓기 시작했다. 되레 승진을 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미군의 소행이었다. 일본의 떡고물을 주워 먹던 놈들을 미군이 아예 떡판 채 맡긴 것이다. 힘 센 놈들에게 붙어먹던 놈들이 다루기 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친일파 입장에선 말이 안 되게 고마운 것이었다. 미군이 친일파를 껴안은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멘붕이었다. 그것이 또한 대한민국의 해방이었다.
“친일파에 대한 가장 좋은 청산은 봐주는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그들이 부끄럽게 만들었어야 했다. 봐주는 것, 필요하다. 왜? 친일파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으니까. 어떻게 하면 저들을 반성하게 만들까 궁리했어야 했다. 그런데 절대 봐줄 수 없는 놈들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고문하고 탄압한 자들이다. 불행하게도 그런 놈들이 정권을 잡았다. 친일파들이 해방 조국에 대해 한 짓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했다.”
이들, 반민특위를 ‘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잡아넣었다.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백범을 암살했다. 이 세 가지 사건, 한 교수에 의하면 하나의 것이다. 친일파들의 쿠데타. 대한민국을 접수했다. 이승만과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남은 제국주의 협력 세력, 손을 잡았다. 멘붕은 계속 된다.
7년 주기설, 다시 일어나는 법
한 교수, 1991년 분신정국의 기억을 꺼낸다. 학생운동 진영이 마지막으로 군사정권과 붙었던 시절. 국제적으로 동서냉정 무너진 시기. 이틀에 한 명꼴로 분신이 일어났다. 끔찍했다. 정권도 위태했다. 유서조작사건이 일어났다. (당국이 범인으로 몰았던 강기훈은 현재 간암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운동권과 군사정권의 팽팽했던 대결, 정원식 총리가 계란과 밀가루를 뒤집어쓴 사진 한 장으로 분신정국은 끝이 났다.
“광주항쟁이 비록 졌지만, 긴 호흡에선 승리했다고 하는 지점이 있다. 헌데 91년 투쟁은 너무 아프다. 회고도 안 한다. 사진 한 장에 훅 가버렸다. 우리 역사를 보자. 피카소 작품 중에 <한국에서의 학살>이 있다. 평화박물관에 정말 걸고 싶은데, 철갑옷을 입은 군인이 벌거벗은 여인을 학살하는 그림이다. 이렇듯 다 죽고, 우리 같은 쭉정이만 남았다. 거기서 우리는 시작했다. 그런데, 4.19, 전쟁 끝나고 만 7년이 안 됐을 때 일어났다.”
한 교수가 서른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의 한 50대 남성이 노동자들에게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한 교수에게 4.19를 아느냐고 물으면서, 4.19의 힘으로 그것을 돌린다고 했다. 그는 미국 중부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가난이 싫어 입대했고, 훈련을 받고 배치 받은 곳이 영등포였다. 그가 본 당시의 영등포는 폭탄을 갓 맞은 것과 같은 곳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 온지 6개월이 안 돼서 어린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세상이 바뀌었다. 이게 과연 무슨 힘인가 생각했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 노동운동을 하는 사회주의자가 됐고, 그 약발로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한 교수에게 말했다고 한다.
“왜 중고생이 들고 일어났을까? 어른들이 다 죽었으니까. 사람, 회복이 참 빠르다. 7년 주기설을 주장하고 싶을 정도다. 길어야 10년. 박정희가 4.19를 짓밟은 것이 5.16이다. 71년, 온갖 파동이 일어나고 데모가 나니 견딜 수 없어서 박정희가 유신을 선언했다. 그렇게 찍어 눌렀는데, 7년이 지나고 부마항쟁이 터지고 암살당했다. 그걸 다시 찍어 누른 게 80년 광주다. 만 7년 만에 6월 항쟁이 일어났다. 해방정국 때 돌파 구호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는데, 그 말뜻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이 87년이었다. 그러다 다시 뚫린 것이 3당 합당이었다. 합당하면서 민자당이 100년 간다고 했다. 그러다 97년 선거에서 마침내 정권을 교체했다. 우리에겐 그런 힘이 있다. 너무 실망할 것 없다.”
한 교수는 진짜 보수주의자가 사라진 한국의 현실에 대해 한탄했다. 사법살인이라는 인혁당 사건 등을 거치며 그리 됐다는 것. 기실 한국은 보수 전통이 강한 나라였다. 장준하도 진짜 보수였다. 그러나 그 제사는 보수가 지내지 않고 이른바 진보세력이 지낸다.
“장준하는 사상으로 말하면 극우파다. 첫 국무총리였던 이범석이 장준하의 대장이었다. 장준하가 원래 백범 비서였는데, 이범석이 데려왔다. 장준하가 백범과 왜 갈라섰느냐면, 공산주의와 협상한다며 이범석에게 갔다. 그런데, 이범석도 공산주의자와 타협하고 얘기를 듣는 거다. 장준하는 극우 중의 극우다. 성골 극우다. (웃음) 그런데 재야의 대통령이라는 별칭을 얻고 재야 진영의 구심점이 된다. 돌아가신 게 너무 슬프다. 마지막 광복군이 다카키 마사오에게 토벌 당한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했고, 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정경모 선생은 미군 통일장교였다. 김수영도 반공포로 출신으로 인민군에 잠시 가담했지만, 자유주의자다. 이렇게 재야 진보진영의 큰 어른들, 해방 직후 기준으로 보면 울트라 우익이다. 이 분들이 진짜 보수다. 우파는 매판이자, 앞잡이지.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구도가 이상해졌다.”
모완용, 모택동 아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모완용은 한국전 때 죽었는데, 북한에 아직 묘가 있다. 중국 최고권력자가 아들 묘지를 왜 북에 뒀을까. 염치 때문이었다. 자신이 내린 명령 때문에 중국 젊은이들 수십만이 죽어 북한에 묻혔는데 내 아들만 어떻게 중국으로 데리고 오냐. 모택동은 그랬다. 이 땅의 권력자들, 비교된다. 대통령은 다리를 끊고 도망을 갔고, 돌아와서는 피난 못 간 사람들을 빨갱이 혹은 부역자 취급했다. 공직자 임명을 놓고, 늘 빠지지 않는 것. 아들의 병역문제다. 한 교수, 이념의 문제 아닌 ‘싸가지’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4,19, 학생들이 나왔는데, 마산에서 첫 발포가 있었다. 반민특위에 붙잡혔던 놈이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김주열을 쏴 죽였다. 일본 군국주의가 어떻게 군사독재와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성공한 혁명과 실패한 혁명은 1미터 차이다. 민중이 탱크 위에 올라가느냐, 탱크에 깔리느냐.”
1979년 YH사건이 있었다. 박정희가 이 사건 80일 후에 죽는다. 엄정한 시국이었는데, 여공들의 데모로 유신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경찰의 진압 과정, 6년 차 19세 여공이 죽었다. 학생들이 함께 들고 일어섰다. 노학연대. 그러나 90년대, 대학생들만 민주화됐다. 한 교수는 그것이 망하는 징조였다고 진단한다.
“그 어려운 지경, 학생운동도 헌신적이었다. 미국으로 치면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대 학생들이 어떻게 노동자가 될까, 세미나를 하는 거지. 이렇게 부마항쟁이 터졌다. 부산은 5년 동안 데모가 없었는데, 데모가 터졌다. 그리고 박정희가 총에 맞았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쐈다. 수천 명 젊은이의 피 대신, 박정희를 쐈지만, 유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유혈사태는 몇 달 뒤 광주에서 일어났다. 당시 광주는 대동천국을 만들었다. 일주일 이상 시민들이 점령했는데, 칼빈총 수천 자루가 풀렸는데, 금은방, 은행 단 한 곳도 털리지 않았다. 도청소재지 점령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게 점령했지만, 다른 도시에서도 일어나 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5월 26일, 계엄군 쳐들어온다는데 도청 앞 광장에 3만 명이 모였다. 하나, 뿔뿔이 흩어졌다. 말릴 수 없었다. 남은 사람들, ‘걍’ 남았다. 텅 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넘겨줄 수 없는 사람들만. 승패완 상관없었다. 한 교수, 그게 역사라고 말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 이요원이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장면을 잊을 수 없는 이유다.
“광주의 새벽, 반만 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이었을 것이다. 도청에 300명 정도 남았는데, 살아남은 사람은 30명 안팎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깨지고 딱 7년 후, 백만 인파가 거리로 나왔다. 그때 (정권이) 바뀌었어야 했는데, 양김이 갈라지면서 실패했다. 87년 체제가 지금 생명력을 다했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실패했다. 허나, 미국도 민주주의 250년을 한 뒤에야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냈다. 노무현은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인터넷 은어)’에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의 인터넷 은어)’다. (웃음) 우리가 많은 것을 이뤘지만, 이루지 못한 것도 많다. 우리는 다 졌다. 총선에서도 이긴 게 딱 3번이다. 지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게 쉽지 않다. 제대로 준비해야 이길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민주화 진영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찍어줬다. 그런데 찍어줬더니 별 볼일 없잖나. 그래서 더 이상 부담 갖지 않는다. 민주화 가치를 더 이상 옹호하지도 않는다. 지는 게 당연하다.”
지금 이 순간 역사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한 교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87년 6월 항쟁. 이때 민주화되면서 살림살이도 나아졌다. 4년을 싸워 월급이 3~4배 올랐다. 노동시간도 단축됐다. 경제발전과 민주화가 동시에 왔다. 노동자들에게 여가가 생기고, 분배가 이뤄져서 소비를 하고, 선순환이 이뤄졌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민주투사들은 자신들만 민주화됐다. 비정규직이 나타났고, 손배가압류를 이념적으로 풀어내는 작업도 못했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한진중공업의 투쟁, 1991년 박창수 열사를 시작으로 김주익 열사, 김진숙 위원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간이 지났다.” 감성이 따뜻한 사람인데, 그렇게 소릴 했다. 김주익이 투쟁의 수단이었나? 아니다. 견딜 수 없어서 그랬다. 자신도 결국 그랬지 않나. 그런데 대통령할 때 그런 모진 소릴 했다. 나중에 김진숙 영상을 보고 놀랐다. 노무현이 김주익 변호사였다. 그렇게 하나였는데, 갈라졌다. 87년엔 실패했지만, 97년에는 정권 교체했다. 그런데 그 이후, 노동운동과 민주운동, 시민운동이 갈라졌다. 이 갈라진 틈을 극복하지 못하면 민주정권이 들어설 수 없다. 박근혜, 5년 후 끝나지만, 간단하게 보지 마라. 중임제 얘기할 테고, 자신이 지명하고 중임하면 이명박까지 합쳐 18년이 되는 거다.”
한 교수, 문제는 이른바 민주화세력의 ‘자살골’이라고 말한다. 집권 기간 중 대중에게 다시 찍어줘야 할 이유를 준비하지 못했다. 이 엄중한 상황에서 특히 비정규직노동자, 청년노동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인지 준비하지 못했다. 그 부분을 어떻게 극복할지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메시지를 던진다.
“세상에 거저 주어진 것은 없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 몇 십 년 전 누군가의 피와 땀이 섞인 것이다. 바통을 제대로 넘겨줘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노후와 미래, 현실이 달려있다. 부동산이 문제화 된 것은 50년 안짝이다. 사교육은 불과 30년이며, 비정규직은 25년이 안 된 문제다. 한 세대의 문제를 알고, 우리의 현실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 투표도 중요하지만, 투표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역사공부만 할 게 아니고 주인이 돼야 한다. 여러분이 쓰는 역사,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돼서 마지막 페이지를 써야 한다. 이 상황이 고착화되면 광주는 개죽음이 된다. 유신 잔당과 싸운 건데, 지금 유신의 잔재가 대통령이 됐다. 독립투사들도 그렇고, 광주에서 계엄군이 언제 올지 몰라도 자신의 투쟁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30년 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겠나.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시작했다. 게임 끝의 휘슬은 민중이 부는 거다. 우리의 룰은 진 팀이 이길 때까지다. (웃음) 피곤할 수밖에 없지만, 느긋하게 결국은 우리가 이긴다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 역사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식민통치의 아픈 기억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왜 민주세력은 이다지도 힘이 약한 것인가? 한 교수, 한국전쟁 때 모두 죽었다고 설명한다. 전멸. 일본의 식민지 지배도 독하게 겪었다. 이웃나라에 식민지 지배당한 국가는 한국과 아일랜드 밖에 없단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하면서, 그 넓은 인도 땅에 영국인 2천명이 주둔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한국 땅에 60만, 많을 때는 100만이 주둔했을 정도였다.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우리나라를 강하게 압박한 것이다. 더불어 일본은 강력한 동화정책을 폈다.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금지 등이었다.
“일본인은 성(姓)이 없었다. ‘다나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친척이 아니다. ‘집이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나카였다. 집이 우물 주위에 있으면 ‘이노우에’였다. 일본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성을 만들었다. 우리는 어땠나. 내 말이 거짓이면 성을 간다. 이런 말이 있을 만큼 우리는 성이 중요했다. 조선이 일본에게 식민지 당할 만한 나라가 아닌데, 운 없게 식민지가 됐다. 일본은 역량이 안 됐는데, 운 좋게 조선을 집어삼켰다. 그러니 일본은 폭압적이었다. 그것을 해방이후 그대로 우리가 물려받아 지금까지 왔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는 물론, 궁성요배라고 천황에 대한 절을 강요당했다. 세상이 바뀌어 해방이 됐지만, 비슷한 것이 이어졌다.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강요했다. 중요한 것은 반성이 없었다. 신사참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반성했다는 얘기, 한 교수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편에선 의병이 싸웠다. 한 교수, 묻는다. 의병이 싸움을 잘했을까? 일본군을 이길 거라고 생각해서 싸웠을까? 그는 답한다. 이긴다는 망상(!)을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질 것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런데 싸웠다! 그들, 처절하게 죽었다. 교수형 당하고 총살당하고.
“나라가 망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거룩하게, 또 하나는 드럽게. 우리가 망할 때 고종이 책임졌나? 고종 개인에겐 가혹한 얘기겠지만, 고종이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거나 목을 매서 죽었다면 어쨌을까. 1945년 해방됐을 때, 대한제국을 다시 세우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입헌군주제 하자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나라가 드럽게 망해서! 대궐에서 망한 것도 아니고, 통감부 사무실도 아니요, 통관관저의 침실의 부속응접실에서 도장을 찍었다. 회사가 합병하듯, 물건 팔듯이, 그렇게 드럽게 망했다.”
한 교수, 백범일지를 보니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슬펐다고 말을 이었다. 나라를 망하게 한 도장을 챙겨온 이가 있었다. 조선이 망한 테이블에 이완용 외에 한 명이 더 있었다. 말하자면, 울트라 친일파. 그러나 역사책은 이것을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았다. 치욕의 장면이자 역사라도 제대로 기록해야 하는 것이 역사책의 임무임에도, 역사는 그를 다른 일로 기억한다.
“친일파 문제를 다루다보면 뉴라이트와 시비가 붙는다. 뉴라이트는 우릴 ‘패륜아’라고 부른다. 뉴라이트는 그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다. ‘신문화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고. 그들은 아버지가 많아서 좋겠다(웃음) 아버지가 살해당한 사람들이 아버지를 복원시킨다. 우리 사회는 친일파를 친일파라 부르지 못한다. 다카키 마사오를 다카키 마사오라고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이)정희가 불렀다. 정희가 정희 딸을 구박했다. 그리 부르다가 독한 년이라고 불렸지. 아무도 안 부르고 이정희 혼자 그렇게 부른 게 죄지. 박근혜 검증, 그런 게 있었나? 2007년, 이명박과 경선할 때는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언론도 안 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자료에 나온 것만 봐도 수두룩하게 많았는데, 아무도 안 했다.”
다시 조선이 망할 때로 돌아간다. 한 교수, 이완용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흉악한 놈이 아니었단다. 학식과 인품이 출중했으며, 온화ㆍ겸손하고 세상 이치에 밝은 명필이었다. 좋은 세상이었다면 보통교육을 도입시킨 학부대신으로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이완용은 세상의 추이를 따라갔다. 어차피 망한 나라, 연착륙 시키면서 자신도 이익을 보자고 한 것이다. 한 교수, 묻는다. 우리는 이완용‘만’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 또 한명의 친일파를 언급한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 종이와 인주, 도장을 들고 간 이, 이인직이었다. 신소설의 아버지. 『혈의 누』. 우리말로 ‘피눈물’ 혹은 ‘혈루’하면 될 것을, ‘혈의 누’라고 굳이 쓴 신소설. 이인직,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이는 얼마나 될까. 우리의 역사교과서는 그것을 제대로 말해줬던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죄!
일제의 잔재를 청산 못해 군사독재가 왔다. 긴가민가 싶겠지만, 한 교수의 설명이 잇는다. 한국 역사에서 중요하고 꼭 알아야 할 것으로 이것을 든다.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로 이어진단다. 즉, 친일파와 군사독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그놈이 그놈이라고 덧붙인다. 한 교수, 해방 직후의 독립 사진을 외치고 있는 한 사진을 보여준다.
“머리가 짧지? 서대문형무소 독립투사들이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다. 한참 들여다보면, 사진사가 늦게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사가 제 시간에 갔으면 정말 생생한 사진이 나왔을 텐데, 늦게 와서 사람들을 다시 잡아 연출해서 찍었을 것이다. 그러니 포토라인이 형성됐던 거지. 연출된 사진이라도 무척 좋다. 1945년 8월 15일이니까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다.”
헌데, 이 사진을 보다가 의문이 생겼다. 사진 속 인물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 한 교수에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된 독립투사의 이름을 모른다니. 이름이 더러 있어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이것이 이 땅의 해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로부터 7~8년 후 남한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이 땅의 해방이었다.
해방 직후 가장 가슴 아픈 것.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무산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반민특위였다. 그러나 나라를 팔아먹고서도 반성문을 쓴 친일파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회개한 사람도 없었다. 한 교수가 알기로는 참회록, 반성문, 회개 거의 없었다. 일본의 압제 하에 있다가 36년 만에 해방이 됐다. 그 징한 일본 밑에서 주구노릇을 한 사람들, 어떻게 처리해야 옳았을까.
“역사에서 보면 더한 멘붕이 많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아니고 친일파에게 역으로 청산을 당했다. 진짜 멘붕이지. 친일청산 옳은 일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시민들은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못했을 거다. 친일파는 어땠을까.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 상황을 돌파했다. 물론 분단이라는 상황 덕을 봤다. 2차 대전 뒤 150여 개의 독립국이 생겼다. 그 새나라의 핵심권력을 누가 장악했겠나.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는데, 딱 두 나라에서 제국주의에 빌붙었던 놈들이 핵심권력을 잡았다. 대한민국과 남베트남. 남베트남은 그나마 없어졌다. 한국만 유일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됐는데, 식민국에 빌붙은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면, 정의, 상식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일들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사람들, 해방 직후 처음엔 도망갔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돌아와 마구 짓기 시작했다. 되레 승진을 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미군의 소행이었다. 일본의 떡고물을 주워 먹던 놈들을 미군이 아예 떡판 채 맡긴 것이다. 힘 센 놈들에게 붙어먹던 놈들이 다루기 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친일파 입장에선 말이 안 되게 고마운 것이었다. 미군이 친일파를 껴안은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멘붕이었다. 그것이 또한 대한민국의 해방이었다.
“친일파에 대한 가장 좋은 청산은 봐주는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그들이 부끄럽게 만들었어야 했다. 봐주는 것, 필요하다. 왜? 친일파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으니까. 어떻게 하면 저들을 반성하게 만들까 궁리했어야 했다. 그런데 절대 봐줄 수 없는 놈들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고문하고 탄압한 자들이다. 불행하게도 그런 놈들이 정권을 잡았다. 친일파들이 해방 조국에 대해 한 짓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했다.”
이들, 반민특위를 ‘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잡아넣었다.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백범을 암살했다. 이 세 가지 사건, 한 교수에 의하면 하나의 것이다. 친일파들의 쿠데타. 대한민국을 접수했다. 이승만과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남은 제국주의 협력 세력, 손을 잡았다. 멘붕은 계속 된다.
7년 주기설, 다시 일어나는 법
한 교수, 1991년 분신정국의 기억을 꺼낸다. 학생운동 진영이 마지막으로 군사정권과 붙었던 시절. 국제적으로 동서냉정 무너진 시기. 이틀에 한 명꼴로 분신이 일어났다. 끔찍했다. 정권도 위태했다. 유서조작사건이 일어났다. (당국이 범인으로 몰았던 강기훈은 현재 간암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운동권과 군사정권의 팽팽했던 대결, 정원식 총리가 계란과 밀가루를 뒤집어쓴 사진 한 장으로 분신정국은 끝이 났다.
“광주항쟁이 비록 졌지만, 긴 호흡에선 승리했다고 하는 지점이 있다. 헌데 91년 투쟁은 너무 아프다. 회고도 안 한다. 사진 한 장에 훅 가버렸다. 우리 역사를 보자. 피카소 작품 중에 <한국에서의 학살>이 있다. 평화박물관에 정말 걸고 싶은데, 철갑옷을 입은 군인이 벌거벗은 여인을 학살하는 그림이다. 이렇듯 다 죽고, 우리 같은 쭉정이만 남았다. 거기서 우리는 시작했다. 그런데, 4.19, 전쟁 끝나고 만 7년이 안 됐을 때 일어났다.”
한 교수가 서른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의 한 50대 남성이 노동자들에게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한 교수에게 4.19를 아느냐고 물으면서, 4.19의 힘으로 그것을 돌린다고 했다. 그는 미국 중부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가난이 싫어 입대했고, 훈련을 받고 배치 받은 곳이 영등포였다. 그가 본 당시의 영등포는 폭탄을 갓 맞은 것과 같은 곳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 온지 6개월이 안 돼서 어린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세상이 바뀌었다. 이게 과연 무슨 힘인가 생각했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 노동운동을 하는 사회주의자가 됐고, 그 약발로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한 교수에게 말했다고 한다.
“왜 중고생이 들고 일어났을까? 어른들이 다 죽었으니까. 사람, 회복이 참 빠르다. 7년 주기설을 주장하고 싶을 정도다. 길어야 10년. 박정희가 4.19를 짓밟은 것이 5.16이다. 71년, 온갖 파동이 일어나고 데모가 나니 견딜 수 없어서 박정희가 유신을 선언했다. 그렇게 찍어 눌렀는데, 7년이 지나고 부마항쟁이 터지고 암살당했다. 그걸 다시 찍어 누른 게 80년 광주다. 만 7년 만에 6월 항쟁이 일어났다. 해방정국 때 돌파 구호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는데, 그 말뜻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이 87년이었다. 그러다 다시 뚫린 것이 3당 합당이었다. 합당하면서 민자당이 100년 간다고 했다. 그러다 97년 선거에서 마침내 정권을 교체했다. 우리에겐 그런 힘이 있다. 너무 실망할 것 없다.”
한 교수는 진짜 보수주의자가 사라진 한국의 현실에 대해 한탄했다. 사법살인이라는 인혁당 사건 등을 거치며 그리 됐다는 것. 기실 한국은 보수 전통이 강한 나라였다. 장준하도 진짜 보수였다. 그러나 그 제사는 보수가 지내지 않고 이른바 진보세력이 지낸다.
“장준하는 사상으로 말하면 극우파다. 첫 국무총리였던 이범석이 장준하의 대장이었다. 장준하가 원래 백범 비서였는데, 이범석이 데려왔다. 장준하가 백범과 왜 갈라섰느냐면, 공산주의와 협상한다며 이범석에게 갔다. 그런데, 이범석도 공산주의자와 타협하고 얘기를 듣는 거다. 장준하는 극우 중의 극우다. 성골 극우다. (웃음) 그런데 재야의 대통령이라는 별칭을 얻고 재야 진영의 구심점이 된다. 돌아가신 게 너무 슬프다. 마지막 광복군이 다카키 마사오에게 토벌 당한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했고, 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정경모 선생은 미군 통일장교였다. 김수영도 반공포로 출신으로 인민군에 잠시 가담했지만, 자유주의자다. 이렇게 재야 진보진영의 큰 어른들, 해방 직후 기준으로 보면 울트라 우익이다. 이 분들이 진짜 보수다. 우파는 매판이자, 앞잡이지.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구도가 이상해졌다.”
모완용, 모택동 아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모완용은 한국전 때 죽었는데, 북한에 아직 묘가 있다. 중국 최고권력자가 아들 묘지를 왜 북에 뒀을까. 염치 때문이었다. 자신이 내린 명령 때문에 중국 젊은이들 수십만이 죽어 북한에 묻혔는데 내 아들만 어떻게 중국으로 데리고 오냐. 모택동은 그랬다. 이 땅의 권력자들, 비교된다. 대통령은 다리를 끊고 도망을 갔고, 돌아와서는 피난 못 간 사람들을 빨갱이 혹은 부역자 취급했다. 공직자 임명을 놓고, 늘 빠지지 않는 것. 아들의 병역문제다. 한 교수, 이념의 문제 아닌 ‘싸가지’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4,19, 학생들이 나왔는데, 마산에서 첫 발포가 있었다. 반민특위에 붙잡혔던 놈이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김주열을 쏴 죽였다. 일본 군국주의가 어떻게 군사독재와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성공한 혁명과 실패한 혁명은 1미터 차이다. 민중이 탱크 위에 올라가느냐, 탱크에 깔리느냐.”
1979년 YH사건이 있었다. 박정희가 이 사건 80일 후에 죽는다. 엄정한 시국이었는데, 여공들의 데모로 유신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경찰의 진압 과정, 6년 차 19세 여공이 죽었다. 학생들이 함께 들고 일어섰다. 노학연대. 그러나 90년대, 대학생들만 민주화됐다. 한 교수는 그것이 망하는 징조였다고 진단한다.
“그 어려운 지경, 학생운동도 헌신적이었다. 미국으로 치면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대 학생들이 어떻게 노동자가 될까, 세미나를 하는 거지. 이렇게 부마항쟁이 터졌다. 부산은 5년 동안 데모가 없었는데, 데모가 터졌다. 그리고 박정희가 총에 맞았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쐈다. 수천 명 젊은이의 피 대신, 박정희를 쐈지만, 유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유혈사태는 몇 달 뒤 광주에서 일어났다. 당시 광주는 대동천국을 만들었다. 일주일 이상 시민들이 점령했는데, 칼빈총 수천 자루가 풀렸는데, 금은방, 은행 단 한 곳도 털리지 않았다. 도청소재지 점령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게 점령했지만, 다른 도시에서도 일어나 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5월 26일, 계엄군 쳐들어온다는데 도청 앞 광장에 3만 명이 모였다. 하나, 뿔뿔이 흩어졌다. 말릴 수 없었다. 남은 사람들, ‘걍’ 남았다. 텅 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넘겨줄 수 없는 사람들만. 승패완 상관없었다. 한 교수, 그게 역사라고 말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 이요원이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장면을 잊을 수 없는 이유다.
“광주의 새벽, 반만 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이었을 것이다. 도청에 300명 정도 남았는데, 살아남은 사람은 30명 안팎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깨지고 딱 7년 후, 백만 인파가 거리로 나왔다. 그때 (정권이) 바뀌었어야 했는데, 양김이 갈라지면서 실패했다. 87년 체제가 지금 생명력을 다했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실패했다. 허나, 미국도 민주주의 250년을 한 뒤에야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냈다. 노무현은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인터넷 은어)’에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의 인터넷 은어)’다. (웃음) 우리가 많은 것을 이뤘지만, 이루지 못한 것도 많다. 우리는 다 졌다. 총선에서도 이긴 게 딱 3번이다. 지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게 쉽지 않다. 제대로 준비해야 이길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민주화 진영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찍어줬다. 그런데 찍어줬더니 별 볼일 없잖나. 그래서 더 이상 부담 갖지 않는다. 민주화 가치를 더 이상 옹호하지도 않는다. 지는 게 당연하다.”
지금 이 순간 역사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한 교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87년 6월 항쟁. 이때 민주화되면서 살림살이도 나아졌다. 4년을 싸워 월급이 3~4배 올랐다. 노동시간도 단축됐다. 경제발전과 민주화가 동시에 왔다. 노동자들에게 여가가 생기고, 분배가 이뤄져서 소비를 하고, 선순환이 이뤄졌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민주투사들은 자신들만 민주화됐다. 비정규직이 나타났고, 손배가압류를 이념적으로 풀어내는 작업도 못했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한진중공업의 투쟁, 1991년 박창수 열사를 시작으로 김주익 열사, 김진숙 위원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간이 지났다.” 감성이 따뜻한 사람인데, 그렇게 소릴 했다. 김주익이 투쟁의 수단이었나? 아니다. 견딜 수 없어서 그랬다. 자신도 결국 그랬지 않나. 그런데 대통령할 때 그런 모진 소릴 했다. 나중에 김진숙 영상을 보고 놀랐다. 노무현이 김주익 변호사였다. 그렇게 하나였는데, 갈라졌다. 87년엔 실패했지만, 97년에는 정권 교체했다. 그런데 그 이후, 노동운동과 민주운동, 시민운동이 갈라졌다. 이 갈라진 틈을 극복하지 못하면 민주정권이 들어설 수 없다. 박근혜, 5년 후 끝나지만, 간단하게 보지 마라. 중임제 얘기할 테고, 자신이 지명하고 중임하면 이명박까지 합쳐 18년이 되는 거다.”
한 교수, 문제는 이른바 민주화세력의 ‘자살골’이라고 말한다. 집권 기간 중 대중에게 다시 찍어줘야 할 이유를 준비하지 못했다. 이 엄중한 상황에서 특히 비정규직노동자, 청년노동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인지 준비하지 못했다. 그 부분을 어떻게 극복할지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메시지를 던진다.
“세상에 거저 주어진 것은 없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 몇 십 년 전 누군가의 피와 땀이 섞인 것이다. 바통을 제대로 넘겨줘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노후와 미래, 현실이 달려있다. 부동산이 문제화 된 것은 50년 안짝이다. 사교육은 불과 30년이며, 비정규직은 25년이 안 된 문제다. 한 세대의 문제를 알고, 우리의 현실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 투표도 중요하지만, 투표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역사공부만 할 게 아니고 주인이 돼야 한다. 여러분이 쓰는 역사,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돼서 마지막 페이지를 써야 한다. 이 상황이 고착화되면 광주는 개죽음이 된다. 유신 잔당과 싸운 건데, 지금 유신의 잔재가 대통령이 됐다. 독립투사들도 그렇고, 광주에서 계엄군이 언제 올지 몰라도 자신의 투쟁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30년 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겠나.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시작했다. 게임 끝의 휘슬은 민중이 부는 거다. 우리의 룰은 진 팀이 이길 때까지다. (웃음) 피곤할 수밖에 없지만, 느긋하게 결국은 우리가 이긴다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 역사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 대한민국사 세트
- 한홍구 저 | 한겨레출판
소설보다 재미있고 영화보다 짜릿한 역사이야기 대한민국사 세트. 한국 사회의 현실을 치우침 없는 역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홍구 교수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주요한 문제들을 재치 있는 입담으로 들려준다.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역사교양서의 베스트셀러로 그동안 출간된 4권의 책을 세트로 구성하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7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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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뭐꼬
2013.05.30
구름그림자
2013.02.17
만다
201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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