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이 두려운 마흔들의 멘토, 산티아고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십대 시절에는 1,500파운드가 넘는 청새치를 잡고도 고기 한 조각도 얻지 못한 노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빈손으로 돌아온 노인보다는 그 노인을 비웃고 조롱하는 젊은 어부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산티아고 노인은 그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경험이 쌓인 지혜로운 자와 미숙한 자를 구분할 줄 알게 된 덕분이다.
201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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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를 올라본 사람이나, 평생 산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나 평지를 걸으면 똑같아 보이지. 정상에 올랐을 때 찍은 증명사진을 가슴에 달고 다닌다면 모를까.”
취재 중 만났던 산악인 엄홍길 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히말라야와 같은 험준한 산을 올랐던 사람과 오르지 못했던 사람 모두 평지에 서 있으면 구별할 수 없다고. 이처럼 평소 우리는 경험이 쌓인 지혜로운 자와 미숙한 자를 구별할 수 없다.
등산뿐만이 아니다. 처음 붓글씨를 배울 때 스승은 힘주어 쓰라고 가르치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다시 힘을 빼고 글씨를 쓰라고 가르친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처음 시작할 때는 팔과 다리에 힘을 빼라고 가르침을 받아도 자꾸 힘이 들어가지만, 수영 고수가 되면 자연히 힘을 뺀 몸으로 물고기처럼 수영을 한다. 그러고 보면 유명한 화가의 추상화를 보고 유치원생 그림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은 영 틀린 말이 아니다. 서예가나 수영 선수, 또는 큐레이터가 아니라면 고수와 초보의 그 보이지 않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렇다면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허탈함을 느꼈다.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고수와 초보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긴 고수가 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극한 경험은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있으리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엄홍길 대장을 떠올린 것은 허망한 줄거리 때문이었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오랫동안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어부가 평생 한번 만날까 말까 하는 거대한 청새치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사투 끝에 잡은 청새치를 상어에게 전부 뜯어 먹히고 결국 앙상한 뼈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출발할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십대 시절에는 1,500파운드가 넘는 청새치를 잡고도 고기 한 조각도 얻지 못한 노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빈손으로 돌아온 노인보다는 그 노인을 비웃고 조롱하는 젊은 어부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산티아고 노인은 그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경험이 쌓인 지혜로운 자와 미숙한 자를 구분할 줄 알게 된 덕분이다.
다시 만난 일흔의 노인 산티아고
노인은 멕시코 부근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를 한다. 84일 동안 노인은 빈손이었다. 결국 친한 벗이자 동료였던 소년도 떠나버렸다. 소년의 부모가 노인이 최악의 불운을 만날 것이라며 소년으로 하여금 다른 배를 타게 한 것이다. 85일째 되던 날, 노인은 여느 때보다 일찍 바다로 나간다.
노인의 독백에서 84일 동안의 불운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읽을 수 있다. 저녁이 다가올 무렵, 노인은 드디어 거대한 청새치와 조우한다. 길이가 무려 5.5미터나 되는 청새치였다. 이처럼 큰 청새치를 노인은 난생 처음 보았다. 노인은 작은 배를 끌고 도망가려는 청새치와 밀고 당기며 사투를 벌였다. 밤낮으로 싸우던 노인은 뼛속까지 지쳤지만, 나약해질 때마다 끊임없는 독백으로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마침내 사흘째 되던 날, 노인은 작살로 대어의 심장을 찔러 배에 붙잡아 맸다. 평생에 걸쳐 가장 도전적인 작업에서 노인은 승리했다.
노인과 바다의 행간을 누비다
『노인과 바다』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마도 노인이 청새치를 잡은 다음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헤밍웨이는 노인이 대어를 낚은 성공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았다. 대어를 잡아 항구로 향하던 노인은 상어 떼를 만나 상어에게 고기를 다 떼어 먹히고 결국 앙상한 뼈만 남은 청새치를 가지고 돌아온다. 이러한 장면은 아마 헤밍웨이 자신의 처지가 반영됐을 지도 모르겠다. 당시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후 10여년이 넘게 이렇다 할 작품 없이 작가로서 긴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그는 짧은 승리 이후 긴 패배가 이어지는 것이 인생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노인은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상어에게 맞섰다. 단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부로서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평생을 보낸 바다 한가운데서, 업으로 삼은 고기잡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저항이었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성숙한 태도였다.
다시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이 어부로 태어났다는 사실만 빼고 말이다. 그러나 노인은 청새치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았다. 상어에 대해 분노도 품지 않았고, 자신의 불운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일상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깊은 잠에 빠진 노인은 아프리카 사자의 꿈을 꾼다. 죽음 직전까지 갔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 금의환향한 어부처럼. 마흔을 앞두고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마흔의 사투는 달라야 한다
젊은 날,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질주했다. 출발 지점보다는 멀리 와 있어야 했다. 화가는 그림으로, 가수는 노래로, 의사는 수술로……. 자신이 도달한 어딘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경주한다. 가끔은 문서로 된 증명서도 필요하다. 졸업장이나 자격증, 상장 따위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노인이 잡은 물고기에 붙은 살점에만 관심이 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붙은 딱지에만 관심을 둔다. 정상에 깃발을 꽂고 찍은 사진이 없다면 히말라야를 정복한 것이 아닌 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신은 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경험은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남에게 보여줄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마흔이라는 분기점에 섰다. 사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건 나를 수치화한 증명서 따위로는 싸울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지금까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면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았다가 상어에게 전부 빼앗기고도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은 것은 어부로서 최고의 경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노인은 자신의 승리를 남에게 증명할 수 없을지라도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으므로 충분히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마흔이 넘으면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외롭다. 조각배를 타고 끝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대어와 홀로 싸웠던 노인처럼. 두렵다. 마흔이 넘어 젊은 날을 바쳤던 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까 봐. 노인은 84일간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이웃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던져졌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작아지고 나약해지는 나에게 노인은 속삭인다.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 않는다.”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그리고 나는 이렇게 노인에게 답한다.
“인간은 패배할 수 있다. 하지만 패배를 딛고 일어설 수가 있다. 도전하는 한 인간은 진정으로 패배하지는 않는다.” 고.
새로운 시작을 앞둔 이들에게 문학이 주는 위로
돌이켜 보면 10대와 20대 때에는 길을 잃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는 책을 찾았다. 하지만 30대가 되어서는 책을 읽고 답을 찾기보다는 현실을 망각하려고 했던 것 같다. 책 속의 이야기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외면했다. 어쩌면 인생의 정답을 찾는 노력을 쉽게 포기했다. 문학은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위로를 해 준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살았다. 문학은 인생을 보는 시각을 달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 높은 장벽이 아니라 도움닫기를 충분히 한다면 넘을 수 있는 허들로 여겨지게 만든다. 발걸음을 뗄 수 없게 하는 현실의 무게를 새털처럼 가벼워지게 하기도 한다. 인생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면 나를 둘러싼 세계도 바뀐다. 이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노인과 바다』의 어부 산티아고는 인생의 반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줬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더라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타인이 아닌 나에게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 말이다.
노인의 모습은 도전이 두려운 마흔의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다.
취재 중 만났던 산악인 엄홍길 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히말라야와 같은 험준한 산을 올랐던 사람과 오르지 못했던 사람 모두 평지에 서 있으면 구별할 수 없다고. 이처럼 평소 우리는 경험이 쌓인 지혜로운 자와 미숙한 자를 구별할 수 없다.
등산뿐만이 아니다. 처음 붓글씨를 배울 때 스승은 힘주어 쓰라고 가르치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다시 힘을 빼고 글씨를 쓰라고 가르친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처음 시작할 때는 팔과 다리에 힘을 빼라고 가르침을 받아도 자꾸 힘이 들어가지만, 수영 고수가 되면 자연히 힘을 뺀 몸으로 물고기처럼 수영을 한다. 그러고 보면 유명한 화가의 추상화를 보고 유치원생 그림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은 영 틀린 말이 아니다. 서예가나 수영 선수, 또는 큐레이터가 아니라면 고수와 초보의 그 보이지 않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렇다면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허탈함을 느꼈다.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고수와 초보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긴 고수가 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극한 경험은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있으리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엄홍길 대장을 떠올린 것은 허망한 줄거리 때문이었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오랫동안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어부가 평생 한번 만날까 말까 하는 거대한 청새치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사투 끝에 잡은 청새치를 상어에게 전부 뜯어 먹히고 결국 앙상한 뼈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출발할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십대 시절에는 1,500파운드가 넘는 청새치를 잡고도 고기 한 조각도 얻지 못한 노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빈손으로 돌아온 노인보다는 그 노인을 비웃고 조롱하는 젊은 어부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산티아고 노인은 그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경험이 쌓인 지혜로운 자와 미숙한 자를 구분할 줄 알게 된 덕분이다.
다시 만난 일흔의 노인 산티아고
노인은 멕시코 부근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를 한다. 84일 동안 노인은 빈손이었다. 결국 친한 벗이자 동료였던 소년도 떠나버렸다. 소년의 부모가 노인이 최악의 불운을 만날 것이라며 소년으로 하여금 다른 배를 타게 한 것이다. 85일째 되던 날, 노인은 여느 때보다 일찍 바다로 나간다.
“하지만 누가 알아? 오늘이라도 운이 트일지?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인 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을 테니까.” | ||
“이보게, 늙은이, 자네나 두려워 말고 자신감을 갖게.” “고통쯤이야 사내에겐 별거 아니지.” “난 견딜 수 있어. 아니, 반드시 견뎌내야 해.” | ||
노인과 바다의 행간을 누비다
『노인과 바다』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마도 노인이 청새치를 잡은 다음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헤밍웨이는 노인이 대어를 낚은 성공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았다. 대어를 잡아 항구로 향하던 노인은 상어 떼를 만나 상어에게 고기를 다 떼어 먹히고 결국 앙상한 뼈만 남은 청새치를 가지고 돌아온다. 이러한 장면은 아마 헤밍웨이 자신의 처지가 반영됐을 지도 모르겠다. 당시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후 10여년이 넘게 이렇다 할 작품 없이 작가로서 긴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그는 짧은 승리 이후 긴 패배가 이어지는 것이 인생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노인은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상어에게 맞섰다. 단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부로서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평생을 보낸 바다 한가운데서, 업으로 삼은 고기잡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저항이었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성숙한 태도였다.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더구나 그건 죄악이거든.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죄가 아니라도 생각할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 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면 돼.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 ||
마흔의 사투는 달라야 한다
젊은 날,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질주했다. 출발 지점보다는 멀리 와 있어야 했다. 화가는 그림으로, 가수는 노래로, 의사는 수술로……. 자신이 도달한 어딘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경주한다. 가끔은 문서로 된 증명서도 필요하다. 졸업장이나 자격증, 상장 따위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노인이 잡은 물고기에 붙은 살점에만 관심이 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붙은 딱지에만 관심을 둔다. 정상에 깃발을 꽂고 찍은 사진이 없다면 히말라야를 정복한 것이 아닌 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신은 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경험은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남에게 보여줄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마흔이라는 분기점에 섰다. 사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건 나를 수치화한 증명서 따위로는 싸울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지금까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면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았다가 상어에게 전부 빼앗기고도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은 것은 어부로서 최고의 경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노인은 자신의 승리를 남에게 증명할 수 없을지라도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으므로 충분히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마흔이 넘으면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외롭다. 조각배를 타고 끝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대어와 홀로 싸웠던 노인처럼. 두렵다. 마흔이 넘어 젊은 날을 바쳤던 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까 봐. 노인은 84일간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이웃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던져졌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작아지고 나약해지는 나에게 노인은 속삭인다.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 않는다.”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그리고 나는 이렇게 노인에게 답한다.
“인간은 패배할 수 있다. 하지만 패배를 딛고 일어설 수가 있다. 도전하는 한 인간은 진정으로 패배하지는 않는다.” 고.
새로운 시작을 앞둔 이들에게 문학이 주는 위로
돌이켜 보면 10대와 20대 때에는 길을 잃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는 책을 찾았다. 하지만 30대가 되어서는 책을 읽고 답을 찾기보다는 현실을 망각하려고 했던 것 같다. 책 속의 이야기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외면했다. 어쩌면 인생의 정답을 찾는 노력을 쉽게 포기했다. 문학은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위로를 해 준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살았다. 문학은 인생을 보는 시각을 달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 높은 장벽이 아니라 도움닫기를 충분히 한다면 넘을 수 있는 허들로 여겨지게 만든다. 발걸음을 뗄 수 없게 하는 현실의 무게를 새털처럼 가벼워지게 하기도 한다. 인생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면 나를 둘러싼 세계도 바뀐다. 이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노인과 바다』의 어부 산티아고는 인생의 반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줬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더라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타인이 아닌 나에게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 말이다.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 ||
- 마흔 고전에게 인생을 묻다 이경주,우경임 공저 | 글담
이 책은 저자들이 읽은 고전 중 마흔 즈음 독자들과 함께 읽고 싶은 24권의 고전을 엄선해 24편의 그림과 함께 수록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젊을 때보다 다시 읽을 때 더 큰 감동을 느꼈던 『데미안』과 『노인과 바다』,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게 도와준 『불확실성의 시대』, 『소유의 종말』 등 동서양의 다양한 고전들을 만날 수 있다. 고전을 읽은 것으로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들처런 삶의 본질과 마주할 용기를 얻고 마흔의 문턱을 조금 낮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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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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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경주, 우경임
이경주
열심히 살면 행복하다는 신념을 가진 전형적인 워커홀릭. 마흔을 앞두고 열심히 뿐 아니라 잘 살고 싶다며 고전을 들었다. 속독과 다독을 통해 며칠이고 마음을 빼앗길 명문장을 캐내는 것을 즐긴다. 현재 서울신문 경제부 기자. 연세대에서 영문학·심리학을 전공했고, 동국대학원에서 광고홍보학 석사를 받았다. 2012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UNC) 저널리즘대학에서 방문연구원(visiting scholar)으로 지내고 있다.
우경임
읽기를 놀이 삼아 자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절박한 학습이었다. 딱히 잘못된 것은 없는데 인생의 실타래가 꼬인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용을 써 봤자 더욱 복잡해질 뿐이었다. 행간에서 답을 찾고자 빨간 줄을 정성껏 그어가며 읽었다. 정독을 즐기는 작가는 현재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연세대에서 사회학·심리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를 받았다.
heliokjh
2013.07.25
신비22
2013.07.07
항구로 돌아와야 하는데 오는 도중에 상어를 잡았는데
따른 고기들이 다 먹어버려 아무것도 없었다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포기하지 않는..
공우민
201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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