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모든 사람은 늘 이중생활을 해야 한다”
지난 6월 28일,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고전 영화 <허수아비>를 감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마련되었다. 신간 『그을린 예술』에서도 이 영화를 언급했던 작가 심보선은 독자들과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으로 출간기념회를 대신했다. 그는 영화 <허수아비>를 통해 우리 삶에서 우정이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우정으로서의 예술이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하는지에 대한 그간의 고민을 들려주었다. 독자들 역시 책을 읽으며 생각했던 것들, 현실 속에서의 고민들을 차례로 풀어 놓으며 내밀한 시간을 만들었다.
201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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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수아비>
제리 샤츠버그 감독의 1973년작인 영화 <허수아비>는 막 감옥에서 출소한 맥스와 5년간 선원생활를 마친 프랜시스가 캘리포니아 시골길에서 만나면서 시작된다. 맥스에게 마지막 남은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여주며 프랜시스는 맥스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된다. 처음 둘은 일종의 사업파트너다. 맥스는 프랜시스에게 자신과 함께 세차사업을 하자고 제안한다. 피츠버그에 있는 돈을 찾아 사업을 하자는 맥스에게 프랜시스는 자신이 두고 온 아내와 아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게 먼저라고 답한다. 그래서 둘은 디트로이트를 들러 피츠버그로 가는 여정을 짜고 함께 길을 떠난다. 맥스는 늘 정확한 인생 계획을 강조하지만 툭하면 다른 사람을 윽박지르고 싸운다. 이에 비해 프랜시스는 나누는데 인색함이 없고,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한다. 그는 어디에서나 희극배우다. 어느 날, 프랜시스는 맥스에게 까마귀들이 왜 허수아비를 보면 도망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까마귀들은 허수아비를 무섭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며 오히려 허수아비를 보고 한바탕 웃은 다음, 농부가 고마워 피해가 덜 가도록 해주는 거라고 말한다. 처음에 맥스는 이 말을 ‘헛소리’ 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둘의 여행이 계속되면서 맥스는 어느새 화를 내기보다는 스스로를 광대로 만들어 사람들을 웃게 하는 법을 배운다. 프랜시스의 유머와 여유가 맥스에게 옮겨 간 것이다.
하지만 늘 낙천적일 것 같던 프랜시스도 곧 다가오는 끔찍한 현실 앞에 무너진다. 고향에 도착한 그에게 아내는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아이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것이 삶의 목표였던 프랜시스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다. 사실 그 이야기는 아내가 원망 속에서 던진, 순간적인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진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말은 프랜시스를 거대한 비극 속으로 몰아간다. 언제나 희극배우였던 그는 이제 비극배우가 되어 광장 분수대에 선다. 비장하게 대사를 외치며 그는 물속에 고꾸라진다. 이제 맥스는 프랜시스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그의 모든 계획은 무너지고 어긋나지만 상관없다. 딱딱한 시체처럼 누워있는 프랜시스에게 맥스는 자신이 돌봐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약속한다. 구두쇠에 돈과 사업이 중요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맥스는 이제 프랜시스를 위해 피츠버그로 떠난다. 그곳에 돈이 있는지 없는지, 정말 프랜시스를 돌봐줄 수 있을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맥스는 잠들기 전에 늘 머리맡에 두고 자던 신발 뒤축을 열어 피츠버그 행 왕복표를 구입한다. 그리고 구두를 바로잡기 위해 뒤축을 탕탕, 두들기는 맥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상영을 모두 마친 뒤, 심보선 작가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작가는 이 영화를 어렸을 적 TV에서 우연히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비록 대부분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느 날 문득, 글을 쓰던 그에게 이 영화는 하나의 아이디어로 찾아왔다. 그는 구두 뒤축을 두드리는 마지막 장면이 여전히 인상적이라고 말하며 함께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영화인데, 당시 미국 영화들 중에 좋은 작품이 많다고 했다. 주로 밑바닥 인생에 대한 영화가 많다며 그는 <미드나잇 카우보이>,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를 꼽았다. 당시가 할리우드는 위기에 빠졌고, 그래서 일종의 도박처럼 젊은 감독들에게 마음껏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 할리우드에서 상업성보다는 감독의 개성이 드러나는 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된 건 바로 이런 이유다.
심보선 작가는 자신이 책에서 이 영화를 우리 삶 속의 우정과 우정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용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고 나니 프랜시스는 삶에서 이미 예술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까마귀가 웃는다’는 표현 자체가 시적이라는 거였다. 사기꾼이자 항상 계획을 짜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진 맥스는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 “bull shit”이라고 반응한다. 작가는 이걸 달리 말하자면 시 쓰고 자빠졌네, 라는 뜻이 된다고 했다. 또 프랜시스는 소설가이기도 한데 흔히 말하는 소설 쓰고 자빠졌네, 하는 말이 프랜시스에게 얼마든지 어울린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배우 이미지다. 심보선 작가는 영화의 뒷부분에서 ‘내 단검은 어디 있느냐’며 울부짖는 분수에서의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연극 같았다고 감상을 전했다. 그는 프랜시스의 예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대한 개인의 예술’이 아니라 삶 속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또 다른 의미의 예술이라고 했다.
작가는 머리맡에 구두를 숨기고 잠을 자던 수전노 맥스가 그 구두를 스스로 열어 왕복표를 사는 마지막 장면이 다시 봐도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10달러 밖에 되지 않는 돈을 구두 뒤축에 넣어 둔 남자를 떠올려보면 정말 피츠버그에 돈이 있는지, 이 약속이 지켜질지 자신할 수 없지만 작가는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글에서 ‘텅 빈 우정’이라고 명명한 관계가 이 장면에서 극대화되고 있다고 집어주었다.
심보선 작가와 독자들의 대화
책에서 이야기 하는 ‘텅 빈 우정’이란 개념이 궁금하다. ‘공허한 우정’과 헷갈리기도 한다.
맥스와 프랜시스가 처음 이야기한 건 사업이다. 맥스는 한동안 계속 사업이야기를 한다. 이 때 둘의 관계는 파트너십이다. 지금 현실 속에는 이런 관계가 만연해 있는 것 같다. 현대의 우정은 언제나 내용이 꽉 차 있어야 한다. 왜 ‘텅 빈’이라고 했느냐 하면 맥스가 처음에 프랜시스와 맺은 협정은 세차장을 여는 거였다. 그런데 점점 그게 중요하지 않아진다. 맥스가 프랜시스를 돌보겠다고 하며 왕복티켓을 사는 장면도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콜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맥스는 그다지 사업수완이 없어 보인다. 정말 돈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게 결국 프랜시스에게 돌아오느냐, 세차장을 하게 되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그저 구두 뒤축에서 10달러를 꺼내는 것, 그리고 다시 뒤축을 바로 잡으려는 그 궁색한 몸짓이 중요했다. 둘 사이에는 신뢰가 있고, 그 신뢰 속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있다. 그러니 이건 공허한 우정과는 다른 의미다. 내용이 뭐든, 지킬 수 있건 없건, 최선을 다해 행동하고 말하는 거다. ‘텅 빈 우정’이라는 말이 생소해서 오해가 있을 수는 있겠다. 공허한 우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책에서 변호사 선배와 ‘공허한 대화’가 나온 다음 바로 ‘텅 빈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헷갈렸던 것 같다.
우정은 탈 관계적 관계, 실체 없는 실체다. 탈 관계라는 것은 보통 확실한 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선후배관계나 파트너십 같은 건 명명하기 쉽다. 하지만 그 관계에서 벗어났을 때, 그때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실체는 있지만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른다. 그게 바로 ‘텅 빈 관계’다.
예술가들이 창작의 행복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현실적 측면도 중요할 텐데, 교수면서 시인인 사람으로서 본인이 생각하는 대안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는 그걸 이중생활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사람은 늘 이중생활을 해야 한다. 나는 현재 직업의 세계가 점점 사람들을 파괴시키고 거의 영혼을 죽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계의 현장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축의 현장이 있어야 한다. 창작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창작 전문가의 세계에 매몰되어 있으면 오히려 창작이 되지 않는다. 창작을 하는데, 그 이유나 자극을 항상 외부에 두게 된다.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이럴 때, 결과는 대게 좋지 않다. 나는 ‘인정’을 다른 의미에서 사용하고 싶다. 영어로 하면 인정은 recognize, 즉 다시 알아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다시’ 알아보는 것이 ‘인정’이 된다면 경쟁만 있는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라는 낭독시리즈를 하고 있는데, 어떤 의도에서 시작한 것인지 궁금하다.
네 달 정도 됐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낭독회다. 요즘 대부분의 낭독회들이 출판사의 기획을 통해 이루어진다. 방송에서도 낭독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낭독회는 그런 기획 없다. 그냥 시인들이 마음대로 하는 자리다. 홍보도 트위터가 전부다. 일단은 시인들이 즐거워한다. 사실 잘한다고 보긴 어렵다. 내가 볼 때는 학예회 수준일 때도 많다. 그런데 관객들이 관용도가 높다. 뭘 해도 좋아해준다. 시인들이 애처럼 놀고, 관객들도 애처럼 듣다가 같이 노는 시간이다. 이 영화를 보도 애와 어른의 구분이 있다. 맥스가 꾸준히 프랜시스에게 너는 애다, 라고 놀리고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른이 되는 건 일의 세계, 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낭독회는 어쩌면 그런 이중생활의 일환이다. 준비할 때는 굉장히 열심히 한다. 절대 학예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에서 스노비즘에 대해 언급한 부분만 읽었는데, 이중생활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책에도 썼지만 스노비즘에 대한 글을 귀국 뒤에 바로 쓴 것이다. 비관주의에 젖어 있던 시기였다. 이제 누구도 속물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다 스놉이다. 이런 진단 아래서 쓴 글이다. 그런데 글을 완성한 뒤에 과연 그럴까, 그 길 밖에 없는 걸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다. 사실 그 글은 어떤 부분에서는 문제가 있는 글이다. 여전히 내게는 중요한 글이지만 계속해서 반성하게 하는 글이었다. 비관주의에서 출발해서 장밋빛 전망은 아니지만 희미하고 희박한 경로라도 찾아서 가보자는 이야기를 하며 이중생활을 이야기하게 된 거다. 사실 이중생활을 지키기란 아주 어렵다. 하지만 계속 그 길을 찾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다.
프랜시스를 예술가라고 하셨는데 사실 그가 생계와 예술을 함께하는 사람,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하지만 맥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맥스는 일종의 컨설팅을 한다.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안 벌면 큰일이 난다고 협박한다. 프랜시스는 질질 끌려간다. 그러다 감옥에서 쇼비지니스에 넘어가기도 한다. 사실 이 인물은 줏대도 없고, 그냥 철이 없는 아이다. 인생의 목표라는 것도 자기 아이한테 램프를 전달하는 게 전부다. 그런데 프랜시스가 콜리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콜리는 맥스도 인생의 목표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부분이다. 맥스는 늘 인생의 목표를 말하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인데 말이다. 콜리가 보기에 아이에게 램프를 전달하는 게 사업을 구상하는 것보다 훨씬 목표다운 목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에 대해 삶을 나누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삶은 이미 내 안에 나누어져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나누어져 있는 거다. 내가 나와 나누는 것도 우정이다. 타인과 나누는 것도, 또 사회와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이중생활은 나의 이중생활이기도 하고, 나와 타인 사이의 이중생활이기도 하고, 사회적 이중생활이기도 하다. 돈을 벌어 성공해야 한다는 세계가 있고 다른 편에는 우정으로서의 예술의 세계, 또 삶을 살리는 세계가 있는 거다. 내 안에서도 사회적으로도 이중생활을 적용해볼 수 있다.
작가의 이중생활이 궁금하다. 바쁜 일정 속에서 글 쓰는 시간은 어떻게 확보하나.
요새 시를 잘 못 쓴다. 가능한 짬짬이 틈나는 대로 쓴다. 시가 이중생활의 중요한 축인 건 맞지만 사실 그 것 말고도 많다. 시 낭독회도 있고, 요즘 자전거를 타는데 자전거도 재미있다. 자전거, 친구, 시, 대화. 모두가 이중생활에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제 인생과 영혼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예술이 없어진 시대이고, 그 대신 생활 속에서 소소한 예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누구나 삶에서 예술가로, 이중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
나는 예술을 이렇게 표현한다. 자유로운 노동. 철학적으로 미학은 예술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학문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영미의 경우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원래 미학의 어원은 감성에 대한 담론이었다. 감정, 느끼고 감각하고 인식하는 것, 즐겁고 슬픈 감정에 대한 담론이 미학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조금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궁금하다.
지금은 시의 시대를 벗어난 셈이다. 그런데 시인의 숫자는 더 많이 늘어났다. 등단한 시인만 삼만 명은 된다고 한다. 시인은 늘어났는데, 왜 시를 읽지 않을까? 사실 내가 시를 읽던 80년대를 떠올려보면 기형도, 이성복, 황지우씨 시를 읽을 때 나는 이해한 게 아니었다. 설명할 수는 없는데 어쩐지 아랫배가 울렁거리는 야릇함이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사회학자라 문학에 대한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울렁거림이 내 삶과 시대와 맞닿아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이건 우리 이야기,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성복 시인의 유명한 구절 ‘모두 다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를 보면서 나는 시대와 맞닿아있는, 막연하지만 강렬한 시의 세계에 사로잡혔다. 이제 시를 읽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건 그 야릇함이 점점 사라지거나 ‘나’와 ‘시’와 ‘시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야릇한 감정의 지대가 사라졌다는 뜻이 될 거다. 혹은 여전히 그 지대가 존재하지만 계속해서 배제되고 밀려나고 있다는, 그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한 시대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바로 바로 이해되고 확실한 것, 적용될 수 있는 게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말이다.
제리 샤츠버그 감독의 1973년작인 영화 <허수아비>는 막 감옥에서 출소한 맥스와 5년간 선원생활를 마친 프랜시스가 캘리포니아 시골길에서 만나면서 시작된다. 맥스에게 마지막 남은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여주며 프랜시스는 맥스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된다. 처음 둘은 일종의 사업파트너다. 맥스는 프랜시스에게 자신과 함께 세차사업을 하자고 제안한다. 피츠버그에 있는 돈을 찾아 사업을 하자는 맥스에게 프랜시스는 자신이 두고 온 아내와 아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게 먼저라고 답한다. 그래서 둘은 디트로이트를 들러 피츠버그로 가는 여정을 짜고 함께 길을 떠난다. 맥스는 늘 정확한 인생 계획을 강조하지만 툭하면 다른 사람을 윽박지르고 싸운다. 이에 비해 프랜시스는 나누는데 인색함이 없고,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한다. 그는 어디에서나 희극배우다. 어느 날, 프랜시스는 맥스에게 까마귀들이 왜 허수아비를 보면 도망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까마귀들은 허수아비를 무섭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며 오히려 허수아비를 보고 한바탕 웃은 다음, 농부가 고마워 피해가 덜 가도록 해주는 거라고 말한다. 처음에 맥스는 이 말을 ‘헛소리’ 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둘의 여행이 계속되면서 맥스는 어느새 화를 내기보다는 스스로를 광대로 만들어 사람들을 웃게 하는 법을 배운다. 프랜시스의 유머와 여유가 맥스에게 옮겨 간 것이다.
하지만 늘 낙천적일 것 같던 프랜시스도 곧 다가오는 끔찍한 현실 앞에 무너진다. 고향에 도착한 그에게 아내는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아이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것이 삶의 목표였던 프랜시스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다. 사실 그 이야기는 아내가 원망 속에서 던진, 순간적인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진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말은 프랜시스를 거대한 비극 속으로 몰아간다. 언제나 희극배우였던 그는 이제 비극배우가 되어 광장 분수대에 선다. 비장하게 대사를 외치며 그는 물속에 고꾸라진다. 이제 맥스는 프랜시스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그의 모든 계획은 무너지고 어긋나지만 상관없다. 딱딱한 시체처럼 누워있는 프랜시스에게 맥스는 자신이 돌봐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약속한다. 구두쇠에 돈과 사업이 중요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맥스는 이제 프랜시스를 위해 피츠버그로 떠난다. 그곳에 돈이 있는지 없는지, 정말 프랜시스를 돌봐줄 수 있을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맥스는 잠들기 전에 늘 머리맡에 두고 자던 신발 뒤축을 열어 피츠버그 행 왕복표를 구입한다. 그리고 구두를 바로잡기 위해 뒤축을 탕탕, 두들기는 맥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상영을 모두 마친 뒤, 심보선 작가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작가는 이 영화를 어렸을 적 TV에서 우연히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비록 대부분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느 날 문득, 글을 쓰던 그에게 이 영화는 하나의 아이디어로 찾아왔다. 그는 구두 뒤축을 두드리는 마지막 장면이 여전히 인상적이라고 말하며 함께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영화인데, 당시 미국 영화들 중에 좋은 작품이 많다고 했다. 주로 밑바닥 인생에 대한 영화가 많다며 그는 <미드나잇 카우보이>,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를 꼽았다. 당시가 할리우드는 위기에 빠졌고, 그래서 일종의 도박처럼 젊은 감독들에게 마음껏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 할리우드에서 상업성보다는 감독의 개성이 드러나는 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된 건 바로 이런 이유다.
심보선 작가는 자신이 책에서 이 영화를 우리 삶 속의 우정과 우정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용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고 나니 프랜시스는 삶에서 이미 예술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까마귀가 웃는다’는 표현 자체가 시적이라는 거였다. 사기꾼이자 항상 계획을 짜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진 맥스는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 “bull shit”이라고 반응한다. 작가는 이걸 달리 말하자면 시 쓰고 자빠졌네, 라는 뜻이 된다고 했다. 또 프랜시스는 소설가이기도 한데 흔히 말하는 소설 쓰고 자빠졌네, 하는 말이 프랜시스에게 얼마든지 어울린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배우 이미지다. 심보선 작가는 영화의 뒷부분에서 ‘내 단검은 어디 있느냐’며 울부짖는 분수에서의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연극 같았다고 감상을 전했다. 그는 프랜시스의 예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대한 개인의 예술’이 아니라 삶 속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또 다른 의미의 예술이라고 했다.
작가는 머리맡에 구두를 숨기고 잠을 자던 수전노 맥스가 그 구두를 스스로 열어 왕복표를 사는 마지막 장면이 다시 봐도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10달러 밖에 되지 않는 돈을 구두 뒤축에 넣어 둔 남자를 떠올려보면 정말 피츠버그에 돈이 있는지, 이 약속이 지켜질지 자신할 수 없지만 작가는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글에서 ‘텅 빈 우정’이라고 명명한 관계가 이 장면에서 극대화되고 있다고 집어주었다.
심보선 작가와 독자들의 대화
책에서 이야기 하는 ‘텅 빈 우정’이란 개념이 궁금하다. ‘공허한 우정’과 헷갈리기도 한다.
맥스와 프랜시스가 처음 이야기한 건 사업이다. 맥스는 한동안 계속 사업이야기를 한다. 이 때 둘의 관계는 파트너십이다. 지금 현실 속에는 이런 관계가 만연해 있는 것 같다. 현대의 우정은 언제나 내용이 꽉 차 있어야 한다. 왜 ‘텅 빈’이라고 했느냐 하면 맥스가 처음에 프랜시스와 맺은 협정은 세차장을 여는 거였다. 그런데 점점 그게 중요하지 않아진다. 맥스가 프랜시스를 돌보겠다고 하며 왕복티켓을 사는 장면도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콜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맥스는 그다지 사업수완이 없어 보인다. 정말 돈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게 결국 프랜시스에게 돌아오느냐, 세차장을 하게 되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그저 구두 뒤축에서 10달러를 꺼내는 것, 그리고 다시 뒤축을 바로 잡으려는 그 궁색한 몸짓이 중요했다. 둘 사이에는 신뢰가 있고, 그 신뢰 속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있다. 그러니 이건 공허한 우정과는 다른 의미다. 내용이 뭐든, 지킬 수 있건 없건, 최선을 다해 행동하고 말하는 거다. ‘텅 빈 우정’이라는 말이 생소해서 오해가 있을 수는 있겠다. 공허한 우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책에서 변호사 선배와 ‘공허한 대화’가 나온 다음 바로 ‘텅 빈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헷갈렸던 것 같다.
우정은 탈 관계적 관계, 실체 없는 실체다. 탈 관계라는 것은 보통 확실한 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선후배관계나 파트너십 같은 건 명명하기 쉽다. 하지만 그 관계에서 벗어났을 때, 그때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실체는 있지만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른다. 그게 바로 ‘텅 빈 관계’다.
예술가들이 창작의 행복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현실적 측면도 중요할 텐데, 교수면서 시인인 사람으로서 본인이 생각하는 대안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는 그걸 이중생활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사람은 늘 이중생활을 해야 한다. 나는 현재 직업의 세계가 점점 사람들을 파괴시키고 거의 영혼을 죽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계의 현장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축의 현장이 있어야 한다. 창작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창작 전문가의 세계에 매몰되어 있으면 오히려 창작이 되지 않는다. 창작을 하는데, 그 이유나 자극을 항상 외부에 두게 된다.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이럴 때, 결과는 대게 좋지 않다. 나는 ‘인정’을 다른 의미에서 사용하고 싶다. 영어로 하면 인정은 recognize, 즉 다시 알아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다시’ 알아보는 것이 ‘인정’이 된다면 경쟁만 있는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라는 낭독시리즈를 하고 있는데, 어떤 의도에서 시작한 것인지 궁금하다.
네 달 정도 됐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낭독회다. 요즘 대부분의 낭독회들이 출판사의 기획을 통해 이루어진다. 방송에서도 낭독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낭독회는 그런 기획 없다. 그냥 시인들이 마음대로 하는 자리다. 홍보도 트위터가 전부다. 일단은 시인들이 즐거워한다. 사실 잘한다고 보긴 어렵다. 내가 볼 때는 학예회 수준일 때도 많다. 그런데 관객들이 관용도가 높다. 뭘 해도 좋아해준다. 시인들이 애처럼 놀고, 관객들도 애처럼 듣다가 같이 노는 시간이다. 이 영화를 보도 애와 어른의 구분이 있다. 맥스가 꾸준히 프랜시스에게 너는 애다, 라고 놀리고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른이 되는 건 일의 세계, 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낭독회는 어쩌면 그런 이중생활의 일환이다. 준비할 때는 굉장히 열심히 한다. 절대 학예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에서 스노비즘에 대해 언급한 부분만 읽었는데, 이중생활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책에도 썼지만 스노비즘에 대한 글을 귀국 뒤에 바로 쓴 것이다. 비관주의에 젖어 있던 시기였다. 이제 누구도 속물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다 스놉이다. 이런 진단 아래서 쓴 글이다. 그런데 글을 완성한 뒤에 과연 그럴까, 그 길 밖에 없는 걸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다. 사실 그 글은 어떤 부분에서는 문제가 있는 글이다. 여전히 내게는 중요한 글이지만 계속해서 반성하게 하는 글이었다. 비관주의에서 출발해서 장밋빛 전망은 아니지만 희미하고 희박한 경로라도 찾아서 가보자는 이야기를 하며 이중생활을 이야기하게 된 거다. 사실 이중생활을 지키기란 아주 어렵다. 하지만 계속 그 길을 찾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다.
프랜시스를 예술가라고 하셨는데 사실 그가 생계와 예술을 함께하는 사람,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하지만 맥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맥스는 일종의 컨설팅을 한다.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안 벌면 큰일이 난다고 협박한다. 프랜시스는 질질 끌려간다. 그러다 감옥에서 쇼비지니스에 넘어가기도 한다. 사실 이 인물은 줏대도 없고, 그냥 철이 없는 아이다. 인생의 목표라는 것도 자기 아이한테 램프를 전달하는 게 전부다. 그런데 프랜시스가 콜리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콜리는 맥스도 인생의 목표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부분이다. 맥스는 늘 인생의 목표를 말하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인데 말이다. 콜리가 보기에 아이에게 램프를 전달하는 게 사업을 구상하는 것보다 훨씬 목표다운 목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에 대해 삶을 나누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삶은 이미 내 안에 나누어져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나누어져 있는 거다. 내가 나와 나누는 것도 우정이다. 타인과 나누는 것도, 또 사회와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이중생활은 나의 이중생활이기도 하고, 나와 타인 사이의 이중생활이기도 하고, 사회적 이중생활이기도 하다. 돈을 벌어 성공해야 한다는 세계가 있고 다른 편에는 우정으로서의 예술의 세계, 또 삶을 살리는 세계가 있는 거다. 내 안에서도 사회적으로도 이중생활을 적용해볼 수 있다.
작가의 이중생활이 궁금하다. 바쁜 일정 속에서 글 쓰는 시간은 어떻게 확보하나.
요새 시를 잘 못 쓴다. 가능한 짬짬이 틈나는 대로 쓴다. 시가 이중생활의 중요한 축인 건 맞지만 사실 그 것 말고도 많다. 시 낭독회도 있고, 요즘 자전거를 타는데 자전거도 재미있다. 자전거, 친구, 시, 대화. 모두가 이중생활에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제 인생과 영혼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예술이 없어진 시대이고, 그 대신 생활 속에서 소소한 예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누구나 삶에서 예술가로, 이중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
나는 예술을 이렇게 표현한다. 자유로운 노동. 철학적으로 미학은 예술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학문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영미의 경우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원래 미학의 어원은 감성에 대한 담론이었다. 감정, 느끼고 감각하고 인식하는 것, 즐겁고 슬픈 감정에 대한 담론이 미학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조금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궁금하다.
지금은 시의 시대를 벗어난 셈이다. 그런데 시인의 숫자는 더 많이 늘어났다. 등단한 시인만 삼만 명은 된다고 한다. 시인은 늘어났는데, 왜 시를 읽지 않을까? 사실 내가 시를 읽던 80년대를 떠올려보면 기형도, 이성복, 황지우씨 시를 읽을 때 나는 이해한 게 아니었다. 설명할 수는 없는데 어쩐지 아랫배가 울렁거리는 야릇함이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사회학자라 문학에 대한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울렁거림이 내 삶과 시대와 맞닿아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이건 우리 이야기,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성복 시인의 유명한 구절 ‘모두 다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를 보면서 나는 시대와 맞닿아있는, 막연하지만 강렬한 시의 세계에 사로잡혔다. 이제 시를 읽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건 그 야릇함이 점점 사라지거나 ‘나’와 ‘시’와 ‘시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야릇한 감정의 지대가 사라졌다는 뜻이 될 거다. 혹은 여전히 그 지대가 존재하지만 계속해서 배제되고 밀려나고 있다는, 그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한 시대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바로 바로 이해되고 확실한 것, 적용될 수 있는 게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말이다.
- 그을린 예술 심보선 저 | 민음사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람』)을 낸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이 첫 연구서이자 산문집인 『그을린 예술』을 ㈜민음사에서 출간하였다. 심보선은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현재 우리 사회가 맞이한, 예술의 위기와 삶의 비참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전망하며, 예술을 행하고 또 삶을 사는 당사자로서 체험하고 관찰하고 느끼고 사유한, 예술과 삶의 관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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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연빈
북극곰이 되기를 꿈꾸며 세상을 거닐다.
어지러운 방에 돌아와 글을 씁니다.
djsslqkqn
2013.07.11
즌이
2013.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