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숙제를 하지 말고 출제를 하라”
여러 분야가 함께 덤벼들지 않으면 실마리조차 찾지 못합니다. “한번 좀 해볼까” 하는 단계도 지났습니다. 이제는 융합하지 않으면 착수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글ㆍ사진 최재천
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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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잘 만들어라”, 이런 숙제가 떨어지면 우리도 이제 제법 잘 만든다는 겁니다. “반도체 잘 만들어라”, 잘 만듭니다. “배 잘 만들어라”, 잘 만들죠.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들어도 이건 ‘숙제’입니다. 누군가가 문제를 냈고 우리는 그 문제를 열심히 푼 겁니다. 여전히 우리는 ‘출제’를 잘 못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내고 세계가 따라오게 한 게 있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게 있나요? 저는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분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늘 청바지에 검은색 터틀넥 차림으로 가끔 뭐 새로운 것 하나 갖고 나와서 제품출시회 같은 거 하시던 분 말입니다. 잘 아시죠? 네, 이 스티브 잡스가 뭐 들고 나와서 한번 스윽 보여주면 전세계가 자지러집니다. 이 양반이 소개한 물건 하루라도 더 일찍 사려고 애플스토어 앞에서 밤새 기다리고 난리들을 치죠. 며칠 지나 산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요. 하여간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 우리 대기업들이 비스무리한 기기 만들어놓고 구시렁거렸습니다.

“속도는 우리가 더 빠른데.”
“해상도는 우리가 더 좋은데.”

이런 소리 백날 하면 뭐합니까? 그 양반이 앞에서 이끌고 우리는 그 뒤에서 숙제하면서 질질 끌려 다녔습니다.


잡스가 아이폰 들고 나와서 했던 퍼포먼스 기억하십니까? 제품설명회 무대 한 가운데에다 이상한 이정표를 만들어놨었죠. 그 이정표에 방향 표시판 두 개 달아놨는데, 하나는 ‘Technology(기술)’ 가리키고 또 하나는 ‘Liberal Arts(인문학)’ 가리켜요. 그러니까 자기네 제품은 ‘기술’과 ‘인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했다는 겁니다.

이게 뭡니까.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나 과학기술의 산물로 나온 기계 덩어리인데 그걸 보고 어쩌자고. ‘구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도 저걸 보면서 “와, 구라도 저 정도면 신(神)의 수준이다” 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 구라가 사실로 드러난 것 아닙니까. 아이(i)로 시작하는 이름의 기기를 만들어놨더니 세상 사람들이 제 발로 그 안에 기어들어갑니다. 앱을 만들어 올리네, 네트워크를 형성하네, 하며 그 속에 들어가서 살잖습니까. 제 눈에는 하루 24시간 동안 아이폰 속에 들어가서 사는 시간이 밖에서 사는 시간보다 길어 보입니다.

이 양반이 한 일이 뭡니까. 이걸 생각해낸 것 아닙니까.

‘이 기기를 만들어내면 그 안에 새로운 세계와 사회가 구성될 것이다.’

그냥 전화를 만든 게 아니잖아요. 소비자가 뭘 절절하게 원하는가를 알고 만들어냈기 때문에 다른 겁니다. 바로 그런 일을 해낸 거예요.


영화 〈아바타(Avatar)〉도 다들 아시죠? 이 영화 제작진에 한국인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터도 있었답니다. 우리나라 정말 그림 실력 세계적입니다. 좀 과장하자면 “전세계 애니메이션은 대한민국이 다 그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결국 뭡니까? 제임스 카메론 같은 감독이 이렇게 만들어달라고 숙제 내면 그대로 열심히 만들어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방식을 뭐라고 하죠? 하청 받아서 일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하청업은 곧잘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바타〉를 구상해내지 못하나요? 그리는 건 무척 잘하는데 전체 과정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죠. 왜죠? 스토리가 중요하기 때문이죠. 기술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인문학만 있으면 어떨까요? 요즘 인문학 열풍이 갑자기 불고 있는데 사실 이거 웃기는 일입니다. 인문학만 갖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만들어요. 과학 위에 인문학이 얹혀야만 비로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상품이 나오는 겁니다. 요즘 할리우드에서 〈아바타〉 같은 영화 많이 나오잖아요. 다 무엇이 공통점일까요? 그리스-로마 신화입니다. 과학기술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녜요. 그리스-로마 신화를 꿰뚫어야 이런 게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 바로 스티브 잡스나 제임스 카메론 같은 사람들이 지금 세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융합은 “어느 한 분야로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복잡계 수준의 문제들입니다. 그 어느 것도 단순하게 “이건 뭐 행정학으로 풀면 되겠네”, “이건 경제학에 답이 있지” 이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 분야가 함께 덤벼들지 않으면 실마리조차 찾지 못합니다. “한번 좀 해볼까” 하는 단계도 지났습니다. 이제 융합하지 않으면 착수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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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융합 콘서트
최재천,박용후,이영혜 등저 | 엘도라도
최재천(과학자), 박용후(관점디자이너), 이영혜(기업인), 박진우(디자이너), 유지나(영화평론가), 정지훈(연구인), 조벽(교육학자) 등 과학ㆍ영화ㆍ게임ㆍ디자인ㆍ교육ㆍIT계의 내로라하는 융합 국가대표 12인의 공저로 탄생한 책. ‘기술’과 ‘인문’의 융합을 테마로 지식의 경계를 허물고 차이를 포용하는 관점의 교차를 통해 급변하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미래에 대한 혜안을 제시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흥미롭고 기발한 ‘융합’ 사례를 단순히 지식의 측면이 아닌 ‘비즈니스’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지식의 이종교배를 넘어 실제로 ‘돈’이 되는 융합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최재천 #융합 #통섭 #아바타 #스티브 잡스 #제임스 카메론 #창의융합 콘서트
9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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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73

2014.02.03

<통섭의 식탁>에서도 감명받았는데 이 책으로 더 절절히 융합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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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ee78

2013.07.3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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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1318

2013.07.31

창의융합의 시대! 아아아, 참말 모든 방면에 능통해야 한다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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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최재천은 이화여자대학교 자연과학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및 에코과학연구소 소장이다. 서울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생태학 석사를 거쳐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시절 세계적 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로 있었으며 후에 그의 저서를 번역하면서 ‘통섭’ 개념을 국내에 도입해 널리 알렸다. 과학자이자 융합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져온 그는 “알면 사랑한다”를 좌우명으로 자연 사랑과 기초 과학의 전도사로 전국을 누비고 있다. 《과학자의 서재》《다윈 지능》《통찰》《통섭의 식탁》 등을 썼고 《통섭》《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무지개를 풀며》 등을 옮겼으며 다수의 책을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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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서울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생태학 석사 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한국생태학회장, 국립생태원 초대원장을 지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와 생명다양성재단 대표를 맡고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와 『과학자의 서재』를 비롯하여 수십여 권의 책을 쓰고 번역했다.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학자로,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번역하여 국내외 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1995년 이래로 시민단체, 학교, 연구소 등에서 강연을 하거나 방송출연, 언론기고를 통해 일반인에게 과학을 알리는 작업을 해왔다. 1953년 강원 강릉에서 4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방학만 되면 어김없이 고향의 산천을 찾았다. 서울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1979년 유학을 떠나 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생태학 석사학위, 1990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하버드대 전임강사를 거쳐 1992년 미시간대의 조교수가 됐다. 1989년 미국곤충학회 젊은과학자상, 2000년 대한민국과학문화상을 수상했고, 1992-95년까지 Michigan Society of Fellow의 Junior Fellow로 선정되었다. 2004년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환경운동연합 공동 대표, 한국생태학회장 등을 지냈고, 2006년 이화여대 자연과학대로 자리를 옮겨 에코과학부 석좌 교수, 이화여대 에코과학연구소 소장과 생명다양성재단 대표를 맡고 있.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고자 설립한 통섭원의 원장이며, 기후변화센터와 136환경포럼의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그 밖에도 '국제환경상' '올해의 여성운동상' '대한민국 과학기술훈장' 등을 수상했고,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을 비롯하여 4개의 국제학술지의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해외에서는 주로 열대의 정글을 헤집고 다니며 동물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국내에 머물 때면 "알면 사랑한다!"라는 좌우명을 받쳐 들고 자연사랑과 기초과학의 전도사로 전국을 누비고 다닌다. 하버드 시절 세계적 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로 있었으며, 그의 개념을 국내에 도입하였다. '통섭'이라는 학문용어를 만들어 학계 및 일반사회에 널리 알리고 있다. 1998년부터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과학기술부 과학교육발전위원회의 전문위원을 맡아 청소년의 이공계 진출을 촉진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과학의 대중화를 실천하기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수많은 어린이책에 과학적인 내용을 감수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러한 활동 외에도 최 교수는 영장류연구소를 설립하여 침팬지들을 연구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이 생태계의 가치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도 이곳을 활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생물학자에서 출발하여 사회생물학, 생태학, 진화심리학 등 학문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언제나 공부하는 과학자이다. 그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합을 꿈꾼다. 학문 간 벽을 허물고 통합적으로 사고해야만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져온 최재천은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지식의 대통합』을 번역 소개하여 학문 간 교류와 소통의 필요성을 널리 알렸으며, 저서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를 통해 생물학적인 시선으로 고령화 사회의 해법을 제시하여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인간상으로 ‘호모 심비우스’를 제시하여 극단적인 경쟁과 환경 파괴로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는 여성의 세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생물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진정한 여성성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렇다면 그 새 시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결국 여성과 남성이 더불어 잘사는 길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학자의 서재』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를 비롯하여 30여 권의 책을 저술하거나 번역했다. 그가 한국어로 쓴 최초의 저서 『개미제국의 발견』은 2012년 봄에 영문판 The Secret Lives of Ants로 존스홉킨스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한 영문서적을 비롯하여 다수의 전문서적들과 『개미제국의 발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인간의 그늘에서』,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인간은 왜 늙는가』,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통섭』, 『알이 닭을 낳는다』,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알이 닭을 낳는다』, 『벌들의 화두』, 『상상 오디세이』, 『경이로운 꿀벌의 세계』, 『21세기 다윈 혁명』, 『개미』, 『인문학 콘서트』, 『과학자의 서재』, 『통섭의 식탁』, 『호모심미우스』, 『다윈지능』,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등의 저 · 역서 외에도 여러 책에 감수자로 참여했다. 2019년 출간된 『동물행동학 백과사전(Encyclopedia of Animal Behavior)』의 총괄 편집장을 역임했다.